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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는 소맷부리로 입가를 슥 문지르며 빈 찻잔을 다시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부인. 저기, 혹시… 저녁에 주방 일 거들 테니까 이따가 주방 좀 써도 될까요? 로렐이 닭고기 파이를 먹고 싶다고 해서요.”
“얘는. 동생 아픈데 거들기는 뭘 또 거들어. 됐으니까 마음껏 쓰렴.”
“고맙습니다. 완성되면 부인께도 드릴 테니 맛 좀 보세요.”
밝게 웃으며 달리아가 들고 있던 가방을 추슬렀다. 마고 부인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어서 나가보라 배웅했다.
달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진한 갈색 머리카락이 문을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는 달리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마고 부인은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얼굴에 만연해있던 미소를 지우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렐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원래 좋다 나쁘다 하는 게 예사라고는 들었지만… 일단 보고는 해둬야겠다.”
마고 부인은 찻잔을 치우고 혹여 누가 있을까 주변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지난 여관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둥지둥 계산대로 걸어가 펜을 집어 들었다.
펜이 움직일 때마다 글인지 기호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부호들이 빈 종이에 새겨졌다. 푸근한 인상과 통통한 몸집으로 여관 주인의 표상 같아 보이는 외양과 달리, 글을 써 내려가는 마고 부인의 눈은 한없이 예리했다.
* * *
약사에게 약을 내밀고 기다리기를 한참, 달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약제실을 나온 약사의 표정을 읽고 불안한 예감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역시.
“동생 질환이 천식이라고 들었는데… 상태가 많이 나쁜가 봐.”
하얗게 센 눈썹을 위로 들추고서 약사가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쪼글쪼글한 손바닥에 파란색 약 한 알이 놓여 있었다. 로렐이 진통제라고 설명했던 그 약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약사가 눈매를 찌푸리며 쯧쯧, 혀를 찼다.
“이게 중독 성분이 있어서 어지간하면 잘 안 쓰는 약이거든. 더 이상 호전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나 쓰는 약이야. 혹시 예전에 약 받을 때 약사가 충고한 적 없어?”
놀란 눈을 깜빡이던 달리아가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없었다. 약도, 의원도 모두 원장님이 알아서 해줬으니까. 달리아는 매달 약값과 생활비를 보내는 것뿐, 병의 진행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진통제라고만 했는데… 왜 그런 약을 먹고 있었던 걸까.
“호전 가능성이 없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당황해 묻자 약사가 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약사가 주름진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동생이 주기적으로 발작이 있다고 했지? 날이 추워지면 더 심해지고. 그건 괜찮은데, 잘 때 코피를 많이 흘린다면서.”
“네. 작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요즘 자주 그러네요.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코피가 많이 나? 철철?”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아침에 이불에 피가 좀 묻어 있어서 물어보면 밤에 코피 났다고만 해서요.”
약사가 미간을 좁힌 채 뭔가를 가늠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좁혀지는 눈매 속에 어떤 확신이 느껴져, 달리아가 다급히 약사의 소매를 붙들었다.
“왜요?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세요?”
약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말해도 될까 고민하는 듯한 눈초리에 달리아가 붙들고 있던 소매를 제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무언의 재촉에 약사가 푹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천식 환자는 워낙 면역력이 떨어져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왠지 그 피가… 코에서 난 게 아닌 것 같아서 좀 걸리는구먼.”
“그게 코피가 아니면 어디서…”
말끝을 흐리며 달리아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뜩잖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약사가 파란색 약으로 시선을 떨구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이전 약사가 이 약을 처방해 준 걸 보면 상태가 안 좋은 건 확실해. 비슷한 걸 조제해 줄 테니까 잘 챙겨 먹이고. 폐병은 낫는 것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게 최선이야.”
약사가 재차 쯧쯧 혀를 차고 다시 약제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달리아는 멍한 얼굴로 약사가 서 있던 자리만 쳐다보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비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폐병이라니.
무슨 정신으로 약재상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약 주머니를 품 안에 끌어안고서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시장을 지나쳤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뒤에서 욕이 날아왔지만 달리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폐병…?”
여태껏 폐병을 앓아왔는데. 그 지긋지긋한 천식.
그런데 또 폐병이라고…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약사가 말한 폐병은 전혀 다른 병이었다.
평소에는 무증상으로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발병하는 그 전염병. 잘 먹고 잘 쉬면 금방 호전되는 그 병.
그러나 로렐처럼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언제부터 아팠던 걸까. 원래부터 겨울에는 늘 기침을 달고 사는 아이였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보면, 여긴 우브랑이었다.
사계절 내내 따스한 남쪽 도시. 그런데도 로렐은 계속 기침을 했었다.
“…그런 걸 잊어버리다니.”
숙소를 찾고, 단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생활 용품을 사고, 가게 자리를 알아보고 꽃다발 만드는 법을 배우고.
사는 데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이 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건 로렐의 건강인데. 그게 가장 중요했는데.
괜찮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흘려넘긴 스스로가 너무 멍청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늘 괜찮다고만 하지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데. 그걸 알면서, 잘 챙겼어야 했는데.
괜찮다는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새로운 삶에 들떠서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평소처럼 예민하게 잘 살폈으면 미리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입 안에 자꾸 침이 고였다.
부모님과 고향을 잃은 이후, 로렐을 키워내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늘 희망을 품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고난은 스쳐 가는 것일 뿐 미래는 행복으로만 점철되어 있을 것이라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
희망은 달리아를 배신하지 않았다.
공작 저에 취직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로렐은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꿈을 좇을 만한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로렐처럼, 어쩌면 로렐보다 더 소중한 것도 생겨났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작도 잃고 직장도 잃었다. 남은 건 로렐 하나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필이면…
“…아니. 아직 아니야.”
조용히 읊조리며 눈가를 문질렀다. 배어 나온 물기를 치맛자락에 닦아내고서 분연한 얼굴로 앞을 향해 걸었다.
벌써부터 비참해지는 건 이르다.
나을 수 있다. 여긴 체레코팔츠처럼 춥고 삭막한 지방도 아니고, 구빈원처럼 좁고 지저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이 곁에서 내내 간호해 줄 수 있다.
좋아하는 걸 잔뜩 먹이고 잘 쉬면 분명 낫겠지. 그간 잘 버텨왔으니 이번에도 별 일없이 잘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달리아는 가슴을 부풀려 크게 숨을 내뱉고서 우울한 근심을 떨쳐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밝은 얼굴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외쳤다.
“안녕하세요. 파이용 닭다리 살 2파운드만 주시겠어요?”
* * *
열린 창틈 사이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가에 바짝 붙어 그림을 그리고 있던 로렐이 소리를 듣고 색연필을 움켜쥔 채 목을 앞으로 쭈욱 뺐다. 다시 한번 왁자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창밖을 바라보던 초록 눈동자 속에 은은한 반짝임이 스쳐 지나갔다.
“언니, 저기 봐라? 어린애들이 모래사장에서 공놀이 해. 엄청 재미있어 보인다.”
빨래를 개고 있던 달리아가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닷가에서 서너 명의 아이들이 가죽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그시 풍경을 관조하던 달리아가 로렐의 어깨를 움켜쥔 채 웃음을 흘렸다.
“어리기는 무슨. 로렐 너랑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 것 같은데?”
“아니거든. 내가 쟤네들보다 훨씬 키가 크잖아. 딱 보니까 나보다 훨씬 어린 애들인데?”
“…으음. 쟤네들 얼굴 보니까 너랑 비슷한 것 같은데? 네 키가 워낙 큰 편이라서 그냥 커 보이는 거지.”
로렐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 위로 어린 소녀 특유의 개구진 표정이 천천히 퍼져나갔다.
“맞아. 나, 구빈원에서도 같은 또래 애들 중에서 제일 컸어. 지금 언니랑 한 뼘 밖에 차이 안 나니까, 내년이면 언니보다 클지도 몰라.”
“밥도 그렇게 깨작깨작 먹으면서 나보다 크기는. 아직 언니 넘어서려면 한참 멀었다. 약은 먹었어?”
아아니이이, 길게 끄는 목소리에서 먹기 싫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리아는 약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로렐의 입속에 털어 넣었다.
“…읍, 으으으…!”
못마땅한 얼굴로 입 안에 약을 물고 있던 로렐은 쓴맛이 퍼지는지 진저리를 치며 물을 달라고 손을 파닥였다. 금방 새빨갛게 변하는 얼굴이 우스워서 달리아는 쿡쿡 웃으며 재빨리 협탁 옆에 놓인 물컵을 건넸다.
“로렐. 슬슬 옷 갈아입고 나가자. 오늘은 좀 오래 걸어야 하니까 편한 신발 신고.”
“아, 맞다! 오늘 가게 계약한다고 한 날이었지! 여기서 많이 걸어야 돼?”
달리아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서 태연한 어조로 동요를 감췄다.
“가게 가는 건 아니고. 유명한 약초사분이 있으시다고 해서 오늘은 거기 갈 거야.”
“약초사? 거기를 왜 가?”
“말린 약초로 증기를 쬐어주는 곳인데 몇 번 하다 보면 폐가 금방 나을 거래.“
“또 이상한 데 가는 거야? 가게는? 계약한다고 했잖아.”
로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붙잡았다. 달리아는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병부터 나아야 가게 계약을 하지. 아픈데 꽃가게는 무슨… 이상한 곳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자. 응?”
“…….”
“엄청 유명한 데라서 언니가 힘들게 예약했어. 돈도 많이 들었으니까 싫어도 가야 해. 여기, 옷 둘 테니까 다 갈아입으면 내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