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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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하게 흘러든 목소리는 체념하는 기색도 우울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진심으로 느껴졌다. 

카를라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뻗어 아이작의 팔을 붙잡았다.

“파혼을 철회하지 않으면 네 정통성에 대한 인증도 취소하겠대.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니?”

“괜찮지 않으면.”

팔을 붙들고 있던 카를라의 손 위로 아이작의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아이작은 느릿하게 관절을 구부려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서 아주 정중한 태도로 그녀의 손을 떨궈 냈다.

“그래봤자 잃을 것도 없는데.”

하얗고 가느다란 카를라의 손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가 매료된 손은 전혀 달랐다. 흉지고 갈라진 달리아의 손. 고운 얼굴과 달리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던 그 손만이 뇌리에 떠올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 정말 이대로도 좋아? 가문은 아무래도 좋아?”

아이작이 가늘게 뜬 눈으로 카를라를 쏘아보았다.

가문, 가문. 어느새인가 공작 부인 대신 그의 딸이 가문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유프겐슐트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치를 부르짖기에는 그녀의 명석함이 썩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아이작은 내키지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인증서를 발급한 순간부터 지락탈은 나와 공범이 된 거야. 자신이 직접 발부한 서류를 스스로 파기한다는 건 의장으로서의 권위를 내다 버리는 짓이지. 제 줄로 자신을 묶는 짓을 그 영악한 지락탈이 나서서 할까.”

짧은 침묵 후에, 아이작은 의아한 빛을 띠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대답을 이었다.

“이미 가문 승계는 끝났어. 작위 수여식 전에는 정통성이니 어쩌니 하면서 협박하는 게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게다가 지락탈이 원하는 건 내 파멸 따위가 아니야. 내가 무너지면 그에게 건넨 제안도 무효가 될 텐데 그렇게 손해 보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럼?”

“그냥… 파혼의 대가로 더 큰 걸 요구하겠지.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면 그만이야. 물론 어느 정도 불이익은 있겠지만 알아서 조율해.”

책임을 떠넘기며 아이작이 응접실 안쪽으로 걸었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자질구레한 일들로 상념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이작은 주머니에 담겨 있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침실에 들어섰다.

침대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협탁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방을 배회하다가 창가에 허리를 기댔다. 창살이 떼어진 창밖으로 겨울 숲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별채로 왔다.

저택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은 그만의 망상이었다. 지고한 가치로 그를 현혹시켰던 저택은 달리아가 사라진 순간 음울한 기억만이 가득한 감옥이 되었다.

어디서도 숨을 내쉴 수가 없어, 유일하게 행복한 기억이 남아있던 곳으로 도망쳐왔다.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게 시작되었던 이곳으로.

“아이작.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니.”

어느새 따라온 카를라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난처한 표정을 떠올렸다.

아이작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소복이 눈이 쌓인 숲이 흑색 망막을 가득 채웠다.

하얗게 변한 숲이 옅은 햇살에 반짝이는 빛을 반사했다. 평소였다면 무척 만족스러워했을 만한 풍광이었지만 막상 이를 관조하는 눈동자는 전혀 다른 것을 그리고 있었다.

“결혼 같은 거… 이럴 거면 진작부터 거절했으면 좋았을걸.”

입 속에 굴리고 있던 자조가 툭 하고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아이작은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 달리아가… 왜 자기를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어.”

반쯤 내려와 있던 속눈썹이 깊은 음영을 자아냈다.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들리고, 흰자와 동공이 진한 대비를 이루며 카를라를 응시했다.

“그때는 그냥 속상한가 보다 하고 흘려넘겼는데. 왜 자기를 좋아해 주지 않냐고, 질투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멍청했지.”

미간을 추어올린 채 피부가 팽팽히 당겨질 정도로 세게 입술을 말아 문다. 꾹 깨물었다 놓은 아랫입술에 잇자국이 아주 깊게 패여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었어. 그 애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기준을 강요한 거지. 달리아가 바란 건 공작 부인 따위가 아니었는데. 달리아가 바란 건… 그냥, 그냥…”

“…….”

“내가 병신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애의 자존감을 짓밟았어. 어떻게든 알아서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애를 하찮은 인간으로 몰아세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엘리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작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악다문 턱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애는 그 자체로 완벽했는데. 별은, 내가 아니라 달리아였는데. 자격지심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는데. 왜…”

목울대가 울렁거리더니 이내 가늘게 뜬 눈매에 물기가 차올랐다.

카를라가 당황한 얼굴로 손수건을 건넸다. 아이작은 고개를 저어 손수건을 거부하고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얼굴을 묻었다.

손수건이 아닌, 레이스로 짠 하얀 리본이었다.

숙연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던 카를라가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늘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작이 갑피를 잃어버린 채 인간적인 모습을 내보이는 건, 내내 궁금하고 기다려온 광경이었음에도 그 어떠한 통쾌함이나 동질감 따위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아니, 통쾌하기는커녕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런 정물 같은 얼굴로 별채를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소싯적의 별명 그대로 별채의 유령 같았다.

“달리아 아직도 못 찾았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자 아이작이 리본에 얼굴을 묻은 채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찾았다는 건지 못 찾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되물으려던 찰나 아이작이 끄는 듯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아. 어딨는지.”

“…뭐?”

어디 있는지 안다니.

찾았다는 말인가? 언제?

카를라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그럼 빨리 데리고 와. 구질구질하게 이러고 있지 말고,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니야.”

“아니, 그렇게는 못 해.”

탁한 목소리로 말을 자르며 아이작이 긴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리본을 내려다본다. 눈물로 젖은 부분에서 얼핏 달리아의 체취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코끝을 리본에 대고 그녀의 흔적을 좇았다.

“내 멋대로 데리고 왔다가 또 그 애가 상처받으면 어쩌나 싶어서. 내가 줄 수 있는 건 편안한 삶뿐인데 달리아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곁에 있으면 초라해진다는데, 자기가 싫어진다는데.”

붉어진 눈가에 또다시 맑은 눈물이 고인다. 아이작은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참다가 탄식처럼 말을 흘렸다.

“좋아하는 마음이 그 애를 궁지로 몰아넣는데. 그런데 어떻게 데리고 와.”

그녀가 향할 곳이 어딘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브랑에 사람을 풀었고 달리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매일 보고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하루를 보내는 자신과 다르게 달리아는 저택에서의 시무룩한 모습을 내던지고 활기찬 하루를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보잘것없는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푼돈을 받고 소일거리를 하면서도, 가게 자리를 알아보며 동생과 시장 지리를 익히고, 꽃다발 만드는 법을 배우고…

달리아는 그렇게 매일을, 꿈을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하루를 살았다.

“나와 떨어져 사는 게 더 행복한 애를 어떻게… 데리고 와.”

처음에는 달리아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억지로 끌고 온다 한들 또다시 별채에 갇혀 시름시름 앓는 모습만 보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나서야 그 당연한 걸 깨달았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나는 이대로 멈춰 버렸는데. 억지로 데려올 수도 없고…

그러나 그의 명석한 두뇌도 이번만큼은 그 어떤 해결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아이작이 살아 온 방식은 단순했다. 체스판 위의 말들이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모색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플랜을 세워놓는다. 그리고 흐름에 따라 플랜을 선택한다.

그 끝은 늘 성공 하나뿐이었는데…

그녀가 사라지면 그 무수히 많은 플랜 또한 쓸모없는 것이라는 걸. 애초에 중요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녀의 삶에 끼지 못한 낙오자는 그저 손 놓고 추억을 더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어코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목울대를 적셨다. 아이작은 소리 없이 오열하며 리본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 * *

달리아는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로렐을 내려다보았다.

애정 어린 미소가 잔잔히 떠올라 있는 얼굴에는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피로가 짙게 묻어 있었다.

여전히 미열이 남아있는 로렐의 이마를 손으로 짚은 뒤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직도 열이 좀 있네.”

우브랑으로 내려온 이후, 로렐은 놀라울 만큼 건강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잔기침은 여전했지만 색색거리며 숨을 쉬거나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일도 없었다. 겨울이면 늘 감기와 열을 달고 살던 아이가 건강하게 뛰어다니니, 달리아는 호전된 모습이 남부의 축복이라 여기며 경계를 느슨히 했다.

하지만 위기는 방심하는 순간 찾아온다. 그간 아무 일 없이 멀쩡하던 로렐은 사흘 전 저녁 식사 후에 쓰러지듯 잠이 들더니 내내 고열에 시달렸다.

“언니…”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로렐이 목이 타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달리아는 재빨리 로렐을 일으킨 후 협탁에 놓여 있던 물컵을 입에 대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죽 좀 먹을래?”

“이따 먹을래. 약… 약부터 줘.”

달리아가 서랍을 뒤져 약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여는 그녀의 얼굴 위로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약이 거의 다 떨어졌네.”

우브랑에 내려올 때까지 수북했던 약 주머니가 슬슬 바닥을 드러냈다. 하긴 우브랑에 내려온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으니 슬슬 떨어질 때가 되긴 했다.

약을 챙겨주고 깨끗한 옷으로 로렐을 갈아입힌 후, 달리아는 이불을 덮어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사올 테니까 좀 더 자고 있어.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나… 닭고기 먹고 싶어. 구워서 빵이랑 먹는 거.”

“닭고기 파이 말하는 거야?”

“응. 생일 때 언니가 만들어준 거.”

로렐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며칠 내내 기운 없던 아이가 저렇게 눈을 반짝이니, 달리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알았어. 그럼 올 때 시장도 들러야겠다. 이따 밤에 해 줄 테니까 기대해.”

작은 머리통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서 측은한 눈길로 로렐을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떨쳐내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좁은 복도를 지나 그보다 더 좁은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아래층이 가까워질수록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달리아. 어디 가려고?”

홀에 내려서자 여관 주인인 마고 부인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달리아는 싱긋 웃으며 바깥을 가리켰다.

“약재상에 좀 다녀올까 하는데요. 추천하실만한 곳 있으세요?”

“약재상… 동생 약 사러 가는 거야?”

“네.”

“그럼 시장에서 다섯 번째 골목 안에 있는 데로 가 봐. 거기 약사 할아버지가 진료도 같이 보는데 병을 그렇게 잘 찾는다고 하더라고.”

마고 부인이 노련한 손길로 뜨거운 차를 따라 달리아에게 내밀었다.

두 자매를 볼 때마다 뭔가 주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이니 거절하면 상처받을 것 같아서, 달리아는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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