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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골드 70실버 22데른. 그녀의 전 재산이자 그를 떠난 대가였다. 

상상도 못 한 엄청난 거금을 품게 되었지만 막상 가슴에 차오르는 건 기쁨이 아닌 쓰디쓴 슬픔뿐이었다. 그의 호의를 이용했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이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기합리화가 한데 뒤섞여 가슴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시린 아픔이 눈물로 화하기 전에 달리아가 먼저 마른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그만 울어야지. 떨쳐내야지.

이 정도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을 테니까. 미안해할 것도 죄스러워할 것도 없어.

스스로 되뇌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싸구려 시트에 배인 역한 체취가 야간열차 특유의 요란한 덜컹거림과 맞물려 몸과 상념을 동시에 뒤흔들었다.

“언니…”

로렐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작게 하품을 내뱉었다. 달리아의 팔과 꼭 달라붙어 있던 뺨이 열기로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있었다.

“아직도 밤이네. 도착하려면 멀었어?”

“응. 내일 아침쯤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언니는 안 잤어?”

“자다가 깼어. 배고프지?”

달리아가 가방에서 물통과 비스킷을 꺼내 로렐에게 건넸다. 눈을 부비며 싱거운 얼굴로 물과 비스킷을 쳐다보던 로렐은 표정이 무색하게도 허겁지겁 비스킷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또 있으니까.”

열심히 비스킷을 씹는 동생의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하긴, 하루 종일 정신없이 따라다니느라 제대로 밥도 못 먹었을 테니 이렇게 허기져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짜고짜 구빈원에 쳐들어가서 당장 가야 한다고 억지로 끌고 나왔으니 로렐로서도 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순한 동생은 언니의 말이 법이라는 듯 순순히 그녀를 따라 나왔다.

궁금한 게 많았을 텐데 울 것 같은 언니의 얼굴을 보고 질문을 삼킨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은 배려는 때로는 고마우면서도 때로는 철없는 자신을 타박하는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달리아는 헝클어진 로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 미리 서신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 원장님 많이 놀라셨어?”

“원장님은 뭐… 매일 똑같으니까 괜찮아. 언니는 많이 바빴어?”

“응. 저택에… 그. 주인님께 좋은 일이 생겨서. 그래서… 너무 바빠서 서신을 못 보냈어.”

“주인님? 언니랑 친구인 그 공작님?”

고개를 끄덕이자 로렐이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였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는데? 공작님한테 좋은 일이면 언니한테도 좋은 일이겠네?”

“어… 응. 엄청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하시게 됐거든. 잘됐지?”

비스킷을 오물거리던 입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눈치를 살피던 로렐이 비스킷을 조물거리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언니, 그 공작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순진한 물음에 달리아의 눈매가 움칫 떨렸다.

늘 편지에 아이작 이야기를 써온 만큼 동생도 자신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나 보다. 달리아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심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좋아하는데 신분이 너무 다르니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막…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

“언니 또 거짓말한다. 저번 휴가 때에도 매일 그 공작님 얘기만 했는걸. 눈이 이렇게 커져서 매일 매일 그 공작님 얘기만 했잖아.”

“…….”

달리아는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벌려진 입을 재빨리 다물고 가방으로 시선을 떨궜다.

눈치 빠른 동생에게는 어설픈 변명 따위가 통하지 않았다. 이럴 때에는 화제를 돌리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비스킷이나 마저 먹어. 약 아직 안 먹었지?”

“응.”

“가방 안에 넣어놨는데 어디 있지… 기침약하고 소화제하고…”

달리아가 손을 더듬거려 약 주머니를 찾았다. 가방 구석에서 거칠거칠한 천의 촉감이 느껴졌다.

뻣뻣한 약 주머니 속에는 그보다 더 작은 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달리아는 순서대로 약을 꺼내 개수를 세다가, 늘 먹던 약 다섯 개에서 하나가 더 추가된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로렐. 이 파란색 약은 뭐야?”

“아. 그 약… 진통제야.”

“진통제?”

깜짝 놀라 되물으니 로렐이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을 이었다.

“왜 작년에 한 번 크게 앓고 나서 한동안 초록색 약 먹었잖아. 올겨울에도 또 그럴까 봐 선생님이 새로 지어주신 거야. 나쁜 약은 아니래.”

“…진짜?”

미심쩍은 어조로 묻자 로렐이 남아있던 비스킷을 한입에 욱여넣으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진짜야, 평연한 어조를 듣고서야 달리아는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긴, 원장님이 알아서 잘 챙겨주셨겠지.

구빈원의 원장님은 달리아를 딸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원장님의 아들이 로렐과 비슷한 병을 앓고 있어 누구보다 로렐의 병환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먼 타지에 있어도 안심하고 어린 로렐을 맡길 수 있었다.

원장님과 그의 아들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그리운 표정이 되었다. 달리아는 힘겹게 약을 삼키는 로렐에게 물을 더 따라주며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매니토는 잘 지낸대? 걔가 로렐 너보다 한 살 많았지?”

“매니토… 응. 잘 지내. 이번에 수술받는다고 수도로 갔어.”

“수술? 무슨 수술?”

“그건 잘 모르겠어. 그냥, 수술하면 엄청 나아질 수 있다고 하면서 한 달 전에 원장님이 수도로 데려갔어.”

얼마나 상태가 안 좋길래 그랬을까.

수술이면 적잖이 돈이 들어갔을 텐데…

작년, 로렐의 발작이 심했을 때 달리아도 수술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명성이 자자한 의사들에게 수술을 받으려면 최소 5골드에서 10골드의 거금이 필요하다는 말에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도 빈곤하기는 달리아와 마찬가지라서 아들이 아파도 눈물을 머금고 약만 먹였었다. 하긴, 구빈원의 궁핍한 살림을 돌이켜보면 원장님도 매니토의 약값으로 대부분의 월급을 지출하고 있었을 텐데,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용돈이라도 좀 드리고 올 걸 그랬네.”

난처한 듯 반가운 듯 푸근한 웃음을 머금은 원장님의 얼굴을 떠올리니 너무 급하게 나온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웠다. 제대로 이야기라도 나누고 올걸.

“안 그래도 돼. 이제 구빈원으로 돌아갈 일 없잖아.”

로렐이 물통 뚜껑을 닫고서 옷소매로 입가를 슥슥 닦았다. 여전히 잠기운이 묻어 있던 눈가에 포만감으로 인한 나른함이 차근차근 쌓여갔다.

로렐은 시트 위로 다리를 끌어올려 양팔로 무릎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대로 쓰러지듯 달리아에게 몸을 기댄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콜록콜록, 이제는 일상이 된 작은 기침 소리가 귓가를 배회했다. 로렐은 담요로 입을 가리고서 들릴 듯 말듯 작은 속삭임을 내뱉었다.

“나 이제 계속 언니랑 사는 거지? 우리 이제 떨어지는 일 없지?”

“응.”

“우브랑에 가면 바다에서 실컷 놀고 싶다. 거긴 따뜻하니까 수영해도 기침 많이 안 나오겠지?”

“그랬으면 좋겠네.”

"언니는 우브랑에서 살 때 기억나?”

“로렐은 기억 안 나니? 너 아기 때부터 바다 수영 엄청 잘했는데.”

“음… 기억 안 나. 너무 아기였으니까. 그래도 아기 때부터 잘했으면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겠지…”

로렐이 쿡쿡 웃으며 달리아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잔떨림이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달리아는 로렐을 꼭 끌어안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난 이제 괜찮아. 로렐이 있으니까. 둘이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누군가는 사랑이 삶의 최대 가치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생은 수없이 많은 행복이 산재해 있고 어떤 행복이 가장 가치 있는지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다.

사랑은 이미 꺾였지만 달리아에게는 또 다른 꽃가지들이 남아있다. 로렐과 함께하는 삶, 속박되지 않은 일상.

…분명, 그가 없더라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자주 가던 절벽은 여전히 그대로 있겠지? 구경 가 보고 싶네.”

“난 라임 셔벗 꼭 먹고 싶어. 아기 때 기억은 하나도 안 나는데 그건 또렷하게 기억나! 엄청 맛있었어!”

“그러니? 언니도 그거 엄청 그리웠는데. 그럼 역에서 내리면 라임 셔벗부터 먼저 먹을까?

“응!”

“좋아, 그럼 그거 먹고 숙소를 먼저 잡은 다음에…”

도착하면 어딜 가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집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으면 좋겠고 침대는 둘이 같이 잘 수 있는 커다란 침대였으면 좋겠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들이 야간열차의 소음을 뚫고 잔잔히 퍼져나갔다. 달리아는 동생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며 파도에 모래가 쓸려나가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아이작의 자취를 뇌리에서 지워나갔다.

* * *

해가 지나고 새해의 들뜬 기분도 가라앉을 무렵.

가신 회의와 신년 인사로 북적거려야 마땅한 유프겐슐트 공작 저의 본관은 개미 한 마리 없이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친인척들이 거주하던 좌익관은 텅 빈 채로 스산한 공기만 감돌고, 공작 가의 일원들이 거주하는 우익관만이 유령 저택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소소한 인기척을 내보일 뿐이었다.

사용인들조차 발소리를 죽이며 주인의 눈치를 보게 된 배경은 의외로 단순했다. 공작이 익애하던 시녀가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춘 탓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의 결혼식 날에.

예식은 무산되었고 천여 명의 사병들이 도시를 뒤지며 시녀를 찾았다. 그러나 공작이 찾은 건 흔적을 교란하기 위해 발권한 가짜 행선지 티켓과 진흙으로 엉망이 된 낡은 부츠뿐이었다.

시녀의 물건을 건네받는 공작의 표정은, 놀랍게도 무척 평온했다.

결혼식 당일, 식을 무효로 돌려 사교계 역사상 전무후무의 파란을 일으킨 공작이었기에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그가 시녀를 찾지 못한 점에 대해서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공작은 절규하며 화를 내는 대신 저택 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심경을 대변했다.

그렇게 한 달여가 흘렀다.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집질에 미쳐있냐는 비난은 우습게도 그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사교를 끊고 가신들의 방문을 최소화한 것뿐 공작은 무감정한 얼굴로 맡겨진 직무를 착실히 수행해냈다.

그리고 가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그런 모습을 더욱 소름 끼치게 여겼다.

“아이작.”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이복누이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떠한 감정도 없이 무욕으로만 채워진 얼굴은 마주할 때마다 사람 같지가 않아 섬찟한 느낌을 들게 했다. 카를라는 소름 돋은 팔을 슥 문지르며 들고 있던 서신을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지락탈 후작에게서 온 거야. 파혼 건에 대해서 자세히 해명해 달래. 이번이 마지막 서신이라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대.”

“네가 알아서 해.”

카를라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아이작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너 정말… 파혼은 네가 했으면서 뒷수습은 내가 하라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한테 미룰 거야?”

“파혼이라면 한 번 해 봤으니까 어떻게 대처할지는 카를라 네가 더 잘 알겠지.”

아이작은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리며 김빠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쓸 여력 없어. 삶든지 굽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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