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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은 대답 대신 한쪽 입매를 끌어올려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하다못해 유프겐슐트와 관련된 이라면 아이작이 별채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결혼 상대인 엘리제 또한 그를 알고 있을 터였다.
엘리제는 대놓고 아이작을 조롱하고 있는 거였다.
막스를 죽인 이후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도발적으로 구는 이가 없어서 잊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앞의 발칙한 여자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떤 식으로 죽이면 좋을지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요, 레이디 지락탈. 지금은 겨울이라 적적하지만 봄이 오면 별채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답니다.”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던 카를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엘리제는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공작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봄과 여름은 조금 볼 만한가요? 나무가 워낙 빽빽이 들어차서 볕이 잘 들지 않을 것 같던걸요.”
“그렇지 않아요. 정원사가 세심히 관리해서 때로는 저택의 정원보다 더 아름답지요. 희귀한 야생화도 많아서 학술자들도 자주 오곤 해요.”
“어머. 다른 계절은 풍경이 정말 다른가 보네요.”
“봄과 여름은 아마 아레츠헬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일 거예요. 아, 본관 내 관람실에 풍경화가 걸려 있는데. 혹시 관심 있으시면 안내해드릴까요?”
“직접 안내해 주시면 저야 기쁘지요.”
능숙하게 화제를 바꾼 카를라가 그녀를 이끌고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내내 얼굴을 잠식하고 있던 웃음을 더욱 진하게 머금고서 우아한 태도로 카를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옷자락을 들추는 손끝과 흐트러짐 하나 없는 걸음걸이까지, 누가 봐도 완벽하게 재단된 귀족 영애의 표상이었다.
“…….”
미심쩍은 눈으로 엘리제와 시녀를 쳐다보던 아이작이 문득 뺨에 닿은 찬기를 느끼고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흐린 하늘 너머로 작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첫눈이 오고 있었다.
* * *
늘 전조처럼 스쳐 지나간 예년의 첫눈과 달리 올해는 첫눈이 소복이 쌓여 정원을 하얗게 물들였다. 세상을 백지로 만든 풍경이 보기 좋아서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웬일로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가 좋아하는 눈이 세상을 가득 감싸고, 내내 골머리를 앓아왔던 철로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게다가 이르미나가 저택에 새로운 안주인이 들어왔으니 자신은 당분간 남부로 요양 가겠다며 저택을 비운다는 소식을 알렸다.
일은 일대로 풀리고 보기 싫은 면상이 알아서 저택을 떠난다니, 결혼식이 내일이라는 사실만 빼면 심적으로 무척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각하.”
회의가 끝난 오후, 자료를 추스르고 있던 아이작에게 오브릭 자작이 별일이라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아이작은 솔직히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전자를 택했다.
“조금 특별한 날이라서요.”
“…흠. 결혼식을 딱히 기대하고 계시는 건 아닌 듯싶었는데요.”
결혼식이라는 말에 아이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 때문은 아니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서 조금 흥이 났나 봅니다.”
“예? 생일이라고 함은…”
공작의 생일? 사용인도 가신도,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생일이라니.
혼란에 빠져 멍하니 있던 자작이 눈을 크게 치켜뜨며 뒤늦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가신으로서 주군의 축일을 모르고 있던 점 부디 용서하십시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별로 즐거울 날도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부러 알리지 않았습니다. 경에게만 알리는 거니 조용히 넘어가 주세요.”
자작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얼굴로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사생아라며 그를 핍박한 사람이 오브릭 자작 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축하한다느니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느니 말하는 것도 그에 대만 기만처럼 느껴져 쉬이 감정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건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브릭 자작에게 아이작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자식 잃은 분께 생일이니 뭐니 하찮은 일로 서운해할 생각 없습니다.”
오브릭 자작이 한결 깊어진 눈으로 아이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렇게 속 깊은 인재를 출신만 보고 비하하다니. 가신으로 복귀한 이후, 오브릭 자작은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하루하루 실감하는 중이었다.
회한에 잠겨 그를 바라보던 자작이 문득 아이작의 나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탄식 같은 신음을 흘렸다.
“…아, 올해라면… 원래대로라면 성년식을 치르셔야 하는 날이군요.”
성년을 맞은 영지민들은 공작 휘하의 시장들에게 각각 축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편지와 명패를 받는다. 물론, 친지들과 함께 축하 연회를 여는 건 기본이었다. 아이작도 평범하게 성인이 되었다면 이와 같이 명패를 받고, 연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공작이 되어 성년식 명패를 받기는커녕 명패를 줘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더군다나 가족들과 사이가 험악한 상태에서 연회를 치르는 것도 영 껄끄러운 상황이니 아이작이 생일을 기피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문득,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야… 죽은 딸은 어땠더라.
생일 일주일 전부터 여기저기서 선물이 쏟아졌다. 한없이 사치스러운 무도회와 야회가 사흘간 이어지고 그동안 내내 딸 아이는 축하한다는 인사를 배경음처럼 전해 들었다. 성년식 때는 무도회 홀을 빌려 오페라 가수와 오케스트라까지 초대해 더 이상 화려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물론 오브릭 자작이 공작가의 가신 중 일선을 달리는 자였기에 그의 딸도 그만큼 호화로운 생일을 보낼 수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가신에 불과한 자신이 이랬을진대 정작 공작인 아이작은 생일 케이크 하나 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퍽 우스우면서도 마음이 아려왔다.
씁쓸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이작이 미간을 추어올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듯 김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경은 늘 나를 불쌍한 사람처럼 쳐다봅니다. 그러지 마세요. 나한테도 축하해 줄 사람 정도는 있습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리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예정이니 경도 일찍 돌아가 쉬세요. 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추스른 서류를 보좌에게 넘긴 뒤 아이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쓰러운 시선이 계속 머리 뒤로 따라붙어 아이작은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지랖 한번 넓기도 하지.
생일이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날만 되면 다들 자신을 가엾은 아이처럼 쳐다보곤 한다. 그냥 태어났을 뿐인 날인데 무슨 의미부여를 그리하는지.
뭐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긴 했다. 생일을 빌미로 달리아에게 응석 부릴 수 있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줄 생각이었다.
“생일이라고 꼭 선물을 받기만 하라는 법은 없지.”
허리 주변을 톡톡 건드리던 손가락이 재킷 안에 들어있던 안주머니로 향했다. 손바닥만 한 천 주머니 속에 잘그락잘그락,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손길이 이어질수록 아이작의 눈매에 조금씩 웃음기가 번져나갔다. 조급한 마음을 추스르며 본관을 뛰쳐나온 아이작이 별채를 향해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오묘한 광휘를 뿌리며 해질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분홍색과 푸른색, 노란색이 한데 섞인 빛이 지평선과 닿으며 강렬한 색채의 향연을 드러냈다. 먼 곳의 하늘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은 별채에 다다라서야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방문을 지키고 있던 위병들이 그를 확인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은 턱짓으로 물러서라 말한 뒤 손수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커다란 전실을 지나 응접실로 향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에 창가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달리아가 그를 발견하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별일 없었지? 마무리해야 할 게 많아서 어제는 못 왔…”
즐겁게 말을 이어가던 아이작이 달리아의 얼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얼굴이.
티끌 한 점 없이 보드라운 상아 빛으로 빛나던 뺨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눈 밑이 언뜻 푸르스름한 것이 멍이 든 것 같았다. 우물쭈물하며 달리아가 뺨을 가렸지만, 이미 아이작의 눈은 상처를 각인한 상태였다.
“아니, 왜…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대체 어쩌다가 이랬어.”
“그게… 산책을 나갔다가 넘어졌어요. 그, 나무뿌리에 걸려서.”
아이작은 상처를 만져도 되나 망설이다가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을 쓸었다. 살짝 스쳤음에도 꽤나 아픈지, 달리아가 눈매를 움찔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조심해야지! 어쩌다 이런… 델마 퀀츠는 뭐 했길래 이 지경이 됐어…!”
“델마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냥 제가 실수로 넘어진 거니까… 주인님. 인상 좀 펴세요. 금방 나을 거예요.”
미간을 찡그린 채 어설프게 웃는 얼굴이 아이작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자, 달리아가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인상 쓰면 못생겨진다며 웃었다.
그렇게나마 웃는 얼굴을 보니 우습게도 쓰린 속이 점차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다음부터는 조심해. 덧날지 모르니까 약부터 바르자.”
아이작은 손가락으로 붉어진 뺨을 한참 동안 덧그리다가 아쉬운 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급약을 찾기 위해 책상 서랍을 연 아이작이 텅 빈 서랍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곧, 별채를 정리할 때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전부 치운 걸 깨닫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위병에게 약을 갖고 오라 할까…
고민하다가, 붉게 부어오른 뺨을 보고 그 잠깐 기다리는 것도 초조해서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실크 꾸러미 속, 언젠가 달리아가 선물한 연고 통이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에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