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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질 따위야 당연히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엘리제는 가느스름하게 내리뜬 눈으로 위병을 훑으며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경계가 철두철미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썩 그렇지도 않나 보군요. 됐어요. 그냥 각하를 모시고 한 번 더 오는 게 낫겠군요.”
그대로 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위병이 머뭇거리는 위병을 밀쳐내며 옆으로 비켜섰다.
엘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명령 체계가 엉망이라며 공작에게 직접 호통을 들을 수도 있다.
어차피 위험인물도 아니고 소란을 일으킬 만한 소지도 없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엘리제를 믿는 게 최선이었다. 위병은 곁에서 만류하는 동료를 무시한 채 엘리제에게 길을 내주었다.
엘리제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별채를 향해 똑바로 걸었다. 머뭇거리며 한 박자 늦게 몸을 움직인 시녀가 곤혹스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가씨가 누군지 알면서도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
“여기, 인적도 드물고 저희 둘밖에 없는데… 혹시 그 시녀라는 계집애가 아가씨께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네? 아가씨. 돌아가요.”
엘리제가 손을 들어 시녀의 입을 닥치게 했다.
정작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위병의 태도도, 시녀의 걱정 어린 말도 아니었다. 저 멀리, 자신과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인영만이 그녀의 관심을 온통 빼앗고 있었다.
“누구지.”
길인지 아닌지 모를 숲 저편에서 여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드레스에 하얀 앞치마, 싸구려 모직 코트를 걸친 하녀 한 명과 그보다 작은 체구에 더 낡은 옷차림을 한 여자.
키가 커다란 하녀는 엘리제도 아는 얼굴이었다. 상급 하녀 중 한 명으로 하녀장이 각별히 아낀다는 여자였다. 그러나 뒤편에 선 젊은 여자는 하녀 차림도 아니고 시녀라기에는 차림새가 너무 소박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꼴이 마치 상급 하녀의 시중을 드는 잡역 하녀처럼 보였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외양에서 느껴지는 편견을 흘려보내며 엘리제가 가늘게 치켜뜬 눈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자신조차 제대로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라면 단 한 명뿐이었다.
인기척을 눈치챈 하녀가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하녀에게 손이 붙들려 있던 젊은 여자가 떨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굽이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얼굴은 입고 있는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게 무척 곱상했다. 짙은 동공를 중심으로 물감 퍼지듯 농도를 달리하는 초록 눈동자가 계절을 거스르는 마지막 잎새처럼 고운 빛으로 녹음을 퍼트리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엘리제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여자구나.
“레이디 지락탈. 여긴,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서둘러 달리아를 뒤로 물린 델마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쯤 저택에서 드레스 가봉에 열을 올리고 있어야 할 엘리제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입구의 위병들은 어쩐 건지. 설마 아이작이 그녀의 출입을 용인한 건지. 왔다면 무슨 용건으로 온 건지.
생각을 더듬어봤지만 어떤 답도 도출해 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동요를 눈치챈 듯 달리아도 어깨를 흠칫하며 초조한 듯 손을 쥐락펴락했다.
“뒤에 있는 이가 공작 각하의 전담 시녀인가?”
한 치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어조가 부드러운 표정과 맞물려 엘리제를 온화한 사람으로 비쳐 보이게 했다. 입매를 굳힌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델마는 평연한 모습에 경계심을 늦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살짝 입을 벌린 채 뭔가를 납득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눈시울을 살짝 접어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잠시 비켜 줘.”
목소리에 담긴 기백은 가히 거절할 수 없는 주인의 위엄을 담고 있었다. 델마는 망설임조차 없이 사용인의 본능에 따라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엘리제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정면을 응시했다. 네 사람이 머문 자리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위압감이 내려앉았다.
달리아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난감한 얼굴로 애꿎은 팔뚝만 문질러댔다. 아이작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막상 결혼 상대를 눈앞에 두니 죄인이 된 듯한 느낌에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니?”
느릿하게 달리아를 훑으며 엘리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달리아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달리아… 달리아 벨로흐입니다.”
“나이가 어려 보이네. 저택에 들어온 지 몇 년 됐지?”
“4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때부터 각하를 모신 거니?”
나직하게 이어지는 음성은 추궁하는 기색 따위 없이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안심한 어조로 그렇다 대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엘리제가 고개를 옆으로 세운 채 속삭이듯 물음을 던졌다.
“오래됐네. 보좌가 되기 전부터 모셔왔나 봐.”
“…네.”
“부모님은?”
“네?”
난데없이 날아든 단어가 뭘 뜻하는 건지 애매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엘리제는 보폭을 줄여 느린 걸음으로 달리아의 앞에 섰다.
“네 부모는, 딸이 외간 남자한테 다리 벌리고 사는 거 알고 있니?”
조롱 섞인 물음에 달리아가 치맛자락을 지분거리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급변한 분위기를 감지한 델마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는 찰나 엘리제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짜악!
레이스 장갑을 낀 섬섬한 손이 거침없이 달리아의 뺨을 내리쳤다. 반동으로 휘청거리는 얼굴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달리아는 재차 날아온 손찌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뭘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날아든 폭력에 달리아는 저항할 생각도 못 한 채 맞은 상태로 눈만 깜빡였다.
멍한 뇌리에 방금 전과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새어들어 왔다.
“달리아.”
“…네, 네.”
“4년이면 이미 빨아먹을 만큼 빨아먹었을 텐데. 지나치게 욕심낸다는 생각 안 드니?”
“…….”
“내일모레가 결혼식인 거 너도 알고 있지?”
입을 벙긋거리던 달리아가 숨소리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대답을 토해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더더욱 염치 있게 굴어야지. 여태까지 다들 네 존재를 묵인하고 넘어갔나 본데 나는 그러기가 힘들어. 이해하지?”
“…….”
“당장 짐 정리해서 나가도록 해.”
“……주… 주인, 각하께서 나가면 안 된다고…”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내려다본 엘리제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장갑 낀 손을 가볍게 털었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천것들에게는 좋은 말로 타이르기보다 초장부터 강하게 기선제압을 하는 게 훨씬 유용하다. 너그러운 모습을 내비치면 정말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하소연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하물며, 천박한 몸뚱이 하나로 공작을 휘어잡고 있던 계집애에게 조금이나마 자비를 보였다면 공작의 이름을 들먹이며 머리끝까지 기어오를 게 뻔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처신했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협박이 먹힌 건지 눈앞의 계집애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여 쥔 채 굽신거리며 사죄를 토해냈다. 깊이 숙인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엘리제는 서늘한 표정을 거두고 싱긋 웃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알면 됐지. 가급적 결혼식 이후로는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으면서, 이를 악문 채 꿋꿋이 눈물을 참는 게 여간 독종이 아니었다.
한 번 더 혼쭐을 내줄까 고민하던 엘리제는 움츠린 태도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안절부절못하며 곁에 서 있던 시녀가 후다닥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손! 손은 괜찮으세요?”
연신 뒤돌며 눈치를 살피던 시녀가 정원에 이르자 걱정스러운 어조로 엘리제의 손을 붙들었다.
“아유. 빨개졌어요. 빨리 가서 냉찜질해 드릴게요.”
“됐어. 이 정도로 찜질은 무슨.”
온 힘을 다해 때린지라 손바닥 전체가 아직까지도 얼얼했다.
얇은 레이스 장갑은 전혀 쿠션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 뭐, 때릴 때 큰 소리가 나서 분위기를 압도하는데 더없이 효과적이기는 했다.
엘리제는 손목을 털어 손에 남아 있던 열감을 떨쳐내고서 장갑을 벗어 관목 위에 내던졌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괜히 불결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공작과 그 계집이 어떤 식으로 굴러먹었을지 모르니 그저 느낌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좁혀든 미간을 억지로 펴서 평온한 표정을 떠올렸다. 말귀는 알아들은 것 같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겠지. 가볍게 숨을 내쉬고 메인 가든에 들어섰을 참이었다.
“어머, 유프겐슐트 공.”
정원 한쪽 구석에서, 카를라 유프겐슐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공작을 발견했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서자 카를라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엘리제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우아하게 예를 갖춘 다음 평온한 얼굴로 양손을 마주 잡았다.
“철도 시찰 가신다고 들어서 내일이나 뵐 줄 알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그리 먼 곳이 아니라서 금방 돌아왔습니다. 레이디께서는 산책 다녀오십니까?”
“아, 네. 북쪽 숲의 계곡이 예쁘다고 들어서 한번 걸음해 보았지요.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위병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더군요. 사고라도 있던 건가요?”
모르는 척 시침을 떼며 숲을 언급하자 공작이 슬그머니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고 공사 중이라 위험해서 말입니다. 위병들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했는데, 혹여 별채에 가신 건 아니시겠지요?”
얼핏 웃는 것 같아 보이는 눈매 속에 밤을 녹여낸 듯한 새카만 눈동자가 오묘한 냉기를 뿌리고 있었다.
“별채가 오래되어 보수 중이라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절벽도 있고 사고도 잦은 곳이라 레이디처럼 초행이신 분은 더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숲에 걸음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당부하는 말이 아니꼽게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절대 가지 말라니. 어지간히 그 시녀를 아끼던 모양이지.
속으로 코웃음 치며 엘리제는 품위 있는 미소를 면전에 끌어올렸다.
“걱정 마세요. 가다가 어쩐지 스산한 느낌이 들어서 금방 돌아 나왔답니다.”
엘리제는 공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덧붙였다.
“왜 별채를 이런 곳에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썩 마음 가는 곳은 아니네요. 외양도 낡고 음습해서 별채라기보다는 목재 창고 같아요. 딱히 보수할 필요 없이 다른 곳에 새로 별채를 짓는 게 나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