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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번갈아 숲을 울렸다. 숲을 거슬러 올라가자 눈으로 촉촉이 젖은 낙엽들이 발소리를 지워냈다. 바짝 메말라 쓸쓸함이 느껴지는 겨울 숲의 풍경이 심상한 뇌리에 작은 위로를 던져주었다.
“달리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델마가 물이 마른 계곡에 다다라서야 무겁게 말문을 뗐다. 대답 대신 눈을 들어 올리자 델마가 계곡 쪽으로 손을 가리켰다.
“여기 이쯤. 계곡 옆으로 돌아서 전나무 숲 쪽으로 가다 보면 어린 묘목들만 심어놓은 곳이 나와. 거기 지나쳐서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시가지가 나오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달리아의 시선을 무시하며 델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부지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30분 정도 걸려. 그래도, 위병들의 숙소랑은 한참 떨어져 있으니까 도망치기 어렵지는 않을 거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던 달리아가 뒤늦게 말뜻을 깨닫고 입을 벌렸다.
“도망이라니요. 델마 씨. 제가…”
“너. 이대로 계속 여기 갇혀 있을 거야?”
난데없는 말에 달리아가 입매를 단단히 굳힌 채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왜 갑자기 밖으로 끌고 나오나 싶었더니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생각지 못한 제안에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조심스레 문장을 고르던 달리아가 긴 침묵 끝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은데… 주인님이 마음에 걸려요. 게다가 도망치면 델마 씨도 무사하지 못할 테고.”
“가.”
망설임을 끊어내는 어조가 평소보다 한결 단호했다.
“매일 시름시름 앓으면서 갇혀 살 거야? 도망치고 싶다고 했잖아. 네 동생도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 걱정하지 말고, 달리아. 네 생각만 해.”
마침표를 찍듯 강한 어조로 의지를 일깨우는 그녀의 말에 달리아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도망치고 싶다고 습관처럼 내뱉던 푸념을 델마는 무척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깨를 붙든 손이 억세다기보다는 무척 든든한 느낌을 주었다. 달리아는 입매를 움찔거리다가 신음처럼 한숨을 뱉었다.
흔들리는 초점을 간신히 맞춰 델마를 올려다보며 어깨를 붙들고 있는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만약에. 저 때문에 델마 씨가 해를 입으면… 저 용서할 수 있어요? 델마 씨도 주인님 성정 잘 아시잖아요.”
“달리아.”
계곡 아래, 마른 낙엽이 가득 쌓인 수면을 바라보며 델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내가 하녀로 일한 지도 벌써 십 년 가까이 됐거든.”
물빛이 어른거리는 눈 속에 나이답지 않은 회한이 깊게 내려앉았다.
“그동안 귀족들한테 휘둘리다가 버림받는 애들 충분히 봐왔어. 공작 저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여기도 똑같더라.”
“…….”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좋게 생각하고 넘어갔지. 그러다가 작은 도련님이 주인이 되시고…”
씁쓸한 얼굴로 말을 흐린 델마가 달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작은 도련님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봐. 사람 가둬놓고 제멋대로 구는 거… 이제 묵인하기 싫다.”
어깨를 붙잡은 손을 미끄러트려 달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래도, 그래도 하는 달리아의 입을 조용히 하란 말로 침묵시킨 뒤, 델마는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별채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일모레가 결혼식인 거 알지?”
결혼식이라는 말에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모든 위병들이 손님들 호위하느라 정신없어서 숲까지 경계하지는 않을 테니까. 도망치려면 그때 도망쳐.”
“…….”
“기차역까지 가면 직행 노선 타지 말고 서부에서 내려서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 꼬리 밟히지 않게. 주인님 여간 철두철미한 성격이 아니니까 얼굴은 꼭 숨기고, 절대 흔적 남기지 마.”
달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희게 질린 얼굴 위에 떠오른 복잡한 심상이 손에 그릴 듯 선명해, 델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앞장서 걸었다.
침묵 사이로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별채 뒤편의 작은 화단이 시야에 들어찰 때쯤, 앞서가던 델마가 걸음을 멈췄다.
멍하니 뒤를 따르던 달리아가 뒤늦게 고개를 들고 앞을 쳐다보았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델마 너머로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한 발 한 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엘리제 지락탈은 지극히 도덕적인 여자였다.
의무와 애정은 별개로 치는 귀족 사회에서 정부를 두고 놀아나는 건 암묵적인 관례에 가까웠다. 비싼 코르티잔을 서넛씩 거느리고 다니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풍조도 이에 기반했다. 예쁘고 잘생긴 창부들은 고급 장식품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엘리제 지락탈은 이를 질색했다.
지락탈 가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말 그대로 공주와 다름없이 자라났다. 예쁘고 아름다운, 순수하게 정제된 정보만을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녀는 사춘기를 거치며 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달라.
그 누구보다 권위 있고 품격 있는 지락탈 가의 영애로서 엘리제는 여느 귀족들과 다른 고결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그런 그녀에게 결혼이란 자신의 위상을 한결 드높일 절호의 이벤트였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 그것도 천박한 사생아 출신과 결혼하라는 명을 감내한 것도 상대가 유프겐슐트 공작이었기 때문이었다.
격에 있어서 달리 견줄 자가 없는 그 유프겐슐트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남은 건 더 이상 오를 데 없는 품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불미스러운 화제가 정부에 관련한 것이었다.
사교계에서 가장 큰 추문으로 오르내리는 화제는 늘 여자 문제였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든 아무래도 좋지만, 남편의 정부에 대해서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부인과 정부를 비교하곤 했다. 엘리제는 그런 비교분석의 대상으로 자신이 오르내린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왜 하필.
“여자 문제로 신경 쓰게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장갑을 갖고 오라 명하는 엘리제의 얼굴 위로 북풍 같은 한기가 서렸다.
시녀들을 시켜 저택의 분위기를 캐내라고 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엘리제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정보를 전해 들었다. 저택 내에 공작이 은밀히 아끼는 정부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를 알린 시녀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공작과 어린 시절부터 친밀했던 하녀라고 합니다. 보좌가 되면서 전담 시녀로 진급하고, 작위를 이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부 노릇을 해온 것 같아요.”
“딱 그 천박한 인간이 빠져들 만한 여자네.”
레이스 장갑에 손을 꿰며 엘리제가 그렇지 않냐는 듯 동의를 구했다.
“모친도 없고 유모도 없이 자랐다고 했으니 상냥하게 구는 여자가 얼마나 반갑겠어. 어쩐지 공작의 낯짝이 너무 반반한 게 느낌이 안 좋더라니… 예상대로네. 그 시녀 어디 있어?”
“북쪽 숲 안에 있는 별채에 갇혀 있다고 했어요.”
말을 듣자마자 엘리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세등등한 태도에 잠시 주눅이 들어있던 시녀가 뒤늦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북쪽 숲은 허가받은 위병 외에는 출입을 금한다고 공작이 명을 내렸대요. 하녀장도 집사도 명 없이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아주 거기에 감춰두려고 제대로 작정했나 보네. 됐어. 그냥 가.”
“안 돼요, 아가씨. 지금 공작은 상벌에 엄격한 사람이래요. 가신들이라고 해도 명을 어기면 처벌을 면치 못한다고 했어요.”
명을 어기고 들어간 시종 한 명이 불구가 된 채 저택 밖으로 쫓겨났다며 시녀가 겁먹은 얼굴로 엘리제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엘리제는 안절부절못하는 시녀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작 유프겐슐트가 생각 이상으로 강경한 인물이라는 건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매우 사근사근하게 굴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꽤 가차 없는 인물이라고. 뭐 그런 건 아버지인 지락탈 후작도 비슷하니 별로 놀랍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에 접근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종을 내친다니… 좀 과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까지 그 시녀를 애지중지하는 건가.
“내가 그 시녀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고 가는 것 같니?”
우아하게 턱을 치켜든 엘리제가 시녀의 손을 쳐내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지저분한 추문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렇다고 공작에게 직접적으로 정리하라며 분탕 칠 수는 없잖아. 당장 결혼식이 내일모레인걸.”
“그럼 어쩌시려고요?”
“나가라고 타일러야지. 아무리 내가 너그러운 성격이라 해도 저택 부지 내에서 여자를 끼고 노는 꼴을 볼 수는 없어.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모양인데, 결혼식 전에 나가라고 설득할 거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하자 시녀가 낯빛을 바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납득된 건지, 당장 앞장서라는 명에 시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먼저 저택을 빠져나왔다. 엘리제는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무감한 얼굴로 시녀의 뒤를 따랐다.
설득은 무슨.
글이라고는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모르는 미련한 하층민에게 설득 따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 아래에 무릎 꿇리며 살아온 엘리제에게 대화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 작위가 있는 인간들과 소통하는 수단이었다. 그 외의 인간들에게는 그저 명령만 내리면 된다.
곱게 가지를 친 관목 위에 피막처럼 얇은 눈이 쌓여 있었다.
메인 가든을 지나 북쪽 숲으로 이어지는 정원 입구를 스쳤다. 흠 하나 없이 매끈하게 관리된 하얀 대리석 장식이 곱게 치장한 엘리제의 모습을 언뜻 반사했다.
붉은 벨벳 드레스, 설원 토끼로 만든 하얀 코트와 붉은 공단 리본, 루비 귀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는 호사스러운 차림새에 맞춘 듯 미려하기 그지없었다. 냉기가 흐르는 표정만 아니었더라면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 게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다.
“길을 잘못 드셨나 보군요. 이쪽은 숲입니다.”
그렇게 착각한 위병이 왔던 길을 가리키며 산책은 이쪽으로 가셔야 한다 일렀다. 엘리제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북쪽 숲의 계곡이 워낙 아름답다고 평판이 자자하더군요. 거기를 좀 구경하고 싶어서요.”
위병이 태도를 바꿔 경계심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낮췄다. 눈앞의 여자가 며칠 뒤면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불온한 자세로 물음을 던졌다.
“죄송하지만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각하께 언질 받지 못했나요?”
휘둥그레한 눈으로 위병을 올려다보며 되묻자 위병이 난처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위병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또한 모르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