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남편이 될 사람을 처음 마주한 엘리제가 홉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다시 슬그머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현 공작은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엘리제는 내심 외모에 대해서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선대 유프겐슐트 공작도, 소공작이었던 막스도 그리 수준 높은 외모가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예측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공작은 놀랄 만큼 수려한 외모였다. 눈매에서 얼핏 선대의 느낌이 묻어나지만 그 외에는 전혀 공작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저 까만 눈동자는 늘 푸른 눈동자가 대물림되던 유프겐슐트의 가주들과 대비되어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빨려들 듯 고혹적인 빛을 냈다.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딜 보나 외모만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남편감이었다.
하긴.
불결한 핏줄을 타고났다고 들었으니, 저 빼어난 외모를 어디서 물려받았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엘리제는 입가를 단속하며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도 처음 뵙네요.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유프겐슐트 공.”
흐뭇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던 이르미나가 하녀들에게 손짓해 차를 준비하라 명했다.
다갈색 액체가 담긴 찻잔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아이작 앞에 놓였다. 아이작은 형식적인 인사로 대답을 대신한 뒤 느슨한 자세로 앉아 이르미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환담을 나누고 계셨는지 궁금하군요.”
“결혼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드레스 마무리가 어떤지 궁금해서.”
“…아. 벌써 다음 주군요. 별다른 차질은 없으십니까.”
“얘도 참… 차질은 무슨. 준비는 진즉에 끝났단다. 남은 건 초대객 명단 확인 정도지.”
“하긴 연회 준비에 있어서는 어머니께서 저보다 훨씬 베테랑이시니, 실례되는 질문이었겠군요.”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 모자지간이라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실례는 무슨. 그나저나 오늘은 회의가 일찍 끝났나 보구나. 좀 어땠니.”
이르미나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친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앞선 건 자신의 격을 지키려는 귀족의 본능이었다. 아이작에 대한 증오로 삶을 유지하기에는 그녀는 잃을 게 너무 많았다.
때문에 이르미나는 현실을 깨닫자마자 아이작과 타협해 살기로 결심했고, 여전히 유프겐슐트 부인으로서 품위 있는 삶을 영위했다. 저택의 주인이 된 아이작을 존중하는 태도는 마음이 아닌 본능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던 이르미나는 자신이 지나치게 아이작을 독점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식 준비도 그렇고, 서로 처음 만나서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내가 눈치 없이 아이작을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먼저 올라가도록 하마. 저녁 식사 때 다시 보자꾸나.”
부드러운 미소를 남긴 채 이르미나가 정원을 떠났다.
샤프롱 역할을 하던 사람이 떠나자 테이블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남아 두 사람을 짓눌렀다. 가만히 앉아 레이스 장갑을 매만지던 엘리제는 이르미나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뒤에 천천히 말문을 뗐다.
“갑작스레 추진된 결혼식이라 깜짝 놀랐답니다. 아버지께 듣기로는 유프겐슐트 공께서 먼저 청혼장을 내밀었다 하셨는데 어쩐지 저를 환영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
노래하듯 이어지는 어조는 이르미나를 대하던 때와 달리 다소 도발적인 기색이 물씬 풍겼다. 아이작은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럴 리가요. 제가 과묵한 편이라 좋은 내색을 잘 드러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먼저 결혼 청탁을 넣으신 거겠지요. 공께서 가문을 잇기 전에는 막시밀리언 소공작과 약혼 이야기가 오갔으니까요. 물론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엘리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레이스 장갑 끝에 매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에 아이작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듯한데 편히 말씀하시지요.”
“…결혼을 조건으로 아버지와 협정을 맺으셨지요.”
“그렇습니다.”
“협정이 지락탈 가에 유리한 이유가 유프겐슐트 공의 정통성 문제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다소 맹랑한 본론에도 아이작은 표정 변화 없이 엘리제를 쳐다보기만 했다. 엘리제는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어깨를 당당히 폈다.
“저는 공작님을 존중하겠어요. 출신에 대해 걸고 넘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에 대한 분풀이로 제게 화가 미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태연히 내뱉으며 엘리제가 날 선 눈으로 아이작을 쏘아보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이작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실소를 흘렸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지락탈 후작께 잡힌 약점으로 영애께 분풀이를 할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죠. 게다가 공께서는…”
무심결에 말을 내뱉으려던 엘리제가 서둘러 입을 단속했다.
흐린 말미에 숨겨진 본심을 눈치챈 아이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떠올렸다.
“방금 전에 출신에 대해 걸고 넘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더니. 곧바로 제 출신을 비꼬시는 겁니까.”
“아니… 오해예요.”
“그렇지요. 사람 일은 모르는 법입니다. 게다가 저처럼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불결한 인간은 영애처럼 고매한 핏줄로서 그 속내를 가늠하기 힘들 겁니다.”
거칠게 도발했지만 의외로 엘리제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은 채 차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함을 가장하며 고고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그 태도가 아이작의 심기를 퍽 불편하게 했다. 아이작은 비아냥을 관두기로 마음먹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농은 관두지요. 좋습니다.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새침한 얼굴로 테이블 모서리를 쏘아보던 엘리제가 시선을 들어 아이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외적인 일은 알아서 하실 테고 저도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부디 여자 문제로 지저분한 추문을 일으키지 않겠다 약조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약속하지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눈을 치켜뜨고서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모호한 눈으로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티끌 한 점 없는 우윳빛 손등, 그와 이어지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책보다 무거운 물건은 평생 들어보지 않은 것처럼 가냘프고 섬세했다.
키스를 바라는 깨끗한 손은 지저분한 상처 자국이 있는 달리아의 손보다 훨씬 곱고 아름다웠다.
눈을 들어 엘리제를 쳐다본 아이작이 이내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은 살결에서, 향수를 뿌린 듯 은은한 꽃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 * *
달리아는 다 쓴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올해는 추위가 늦게 오나 싶었는데 갑자기 휘몰아치듯 추운 날씨가 도래했다. 달리아는 느슨히 풀어둔 단추를 꼼꼼히 여몄다.
“빨리 부쳤어야 했는데… 편지 많이 기다렸겠네.”
편지를 내려다보는 눈길에 복잡다단한 애수가 스쳐 지나갔다.
연말 전까지 구빈원에 편지가 도착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편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언니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생에게 달리아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저택이 바빠서 올해는 구빈원에 못 갈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또 편지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