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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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투정 부리고 있지만 결국 자신이 문제였다. 

애초에 시녀가 되어 우익관에 가둬졌을 때부터 그가 자신을 특별대우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묵과했다. 진작에 밀어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난감해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매몰차게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그를 향한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은 탓이었다.

달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속내를 삼켰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념을 억지로 한편에 구겨 넣고서 태연한 어조를 가장했다.

“꼭 경험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후버 씨도 저랑 비슷한 경험 있으세요?”

“하아. 이런 고민을 너만 하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나 쫓아다니는 여자는 아이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야.”

기운 빠진 숨을 내뱉고서 후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큼지막한 손으로 달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창밖으로 힐끗 시선을 던진다.

“주인님, 요즘 밤에 오셔?”

다시 정중하게 호칭을 바꿔 물었다. 달리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며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채에 갇힌 지 벌써 사흘이 넘었다.

첫날에 자신을 공작 부인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읊고 떠난 아이작은 다음날부터 태연한 얼굴로 별채에 찾아와 한참 동안 달리아를 들여다보고 떠나곤 했다.

딱히 뭔가 하는 것도 없고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다가, 서로 서먹해져 문장이 드문드문 토막 날 때쯤부터는 아예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밤이 이슥해서야 간다는 말만 내뱉고 홀연히 방을 나가 버린다.

“밤에 잠깐 오셨다가… 잠들 때쯤 돌아가세요.”

요즘 아이작은 정말 이상했다.

마치 어항에 담긴 관상어를 관찰하는 것처럼 자신을 투영하는 눈은 여태까지 봐 온 아이작의 눈과 너무 달라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망설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자신의 약점을 잡기 위해 날카롭게 촉을 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자신을 보는 게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참, 알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속내를 잘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드문드문 엿보이는 그의 감정들만큼은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 이후로는 오히려 더더욱 그의 행보를 알 수 없어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걸까.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한참 예민하시니까. 너도 불편하겠지만… 뭘 하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후버는 커다란 손으로 달리아의 머리를 슥슥 훑어내린 뒤 간다는 말도 없이 훌쩍 방을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위병들에게 뭔가 지시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미 밤낮없이 문을 지키며 혹여 도망가지 않을까 호시탐탐 지키고 있는데, 기합을 줘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뭘 가져오신 거지?”

삐딱한 마음을 달래며 후버가 갖고 온 짐을 살펴보았다.

자수용 색실과 패치워크용 천 조각들, 모험 소설 몇 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심심할까 봐 갖다 둔 모양이었다.

쓰다만 편지지가 물건들 옆에 놓여 있었다. 동생에게 보낼 편지, 바느질감과 소설책들. 평소에는 좋아하는 것들인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런지 어떤 것도 영 손이 가질 않았다.

달리아는 잉크 뚜껑을 닫고 물건들을 정리한 뒤 방 안쪽의 침실로 들어가 풀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벌써 노을이 지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해질녘의 붉은 빛이 새어 들어와 방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달리아는 의식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발치를 간지르는 차가운 물결이 어딘가 익숙했다.

눈을 내리자 투명한 물속에 담긴 금빛 모래가 들이치는 파도에 반짝거리는 모습이 비쳤다.

조금 더 눈을 들어 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찬연한 박하 색을 띠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푸른빛으로 짙어지는, 그립고 그리운 바다.

우브랑이다…

‘언니, 언니.’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모래사장에 앉아 샌들을 신었다 벗었다 하는 로렐의 모습이 보였다. 로렐은 신발 속의 모래를 손으로 긁어내며 환하게 웃었다.

‘빨리 안 가면 꽃시장 문 닫는다면서. 빨리 가자.’

…아, 그랬지.

꽃시장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가야 하는데. 늦게 가면 꽃이 다 피어버리니까, 최대한 빨리 가야지.

찰박찰박, 물소리를 내며 로렐의 손을 잡고 걸었다. 하얀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엉기는 느낌이 썩 싫지 않았다. 파도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햇볕을 품고 있는 모래사장이 차갑게 식은 발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언니, 이쪽이야.’

로렐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향했다. 신기하게도, 백사장이 끝나자마자 꽃시장이 나왔다.

커다란 바퀴가 네 개씩 달린 손수레에 색색의 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란색과 하얀색의 알라만다, 화분째 놓여 있는 칠변화와 주홍빛이 아름다운 카시아를 골라 한아름 안아 들었다. 로렐은 파란 부겐빌레아와 색색의 튤립을 끌어안고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뒤를 따랐다.

‘빨리 가야 돼.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다려? 누가?

의아한 심정으로 로렐을 돌아보자 로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핀잔을 주었다.

‘그 오빠. 아침마다 우리 기다리잖아.’

……아.

맞다. 맞아. 지금쯤 기다리고 있을 텐데.

걸음을 서둘렀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반짝이는 백사장을 지나 부모님이 있는 묘소를 건너 초록 지붕이 예쁜 우리 집을 스쳐 지나갔다. 에디나와 델마가 차를 마시고 있는 카페테리아를 지나자, 비로소 꽃가게가 보였다.

플라워 벨로흐.

하얀 유목에 어설픈 글씨로 삐뚤빼뚤하게 적힌 간판 아래 하얀 플루메리아와 초록 잎사귀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듯 장식되어 있었다. 가게는 이미 문을 열어놓은 듯 작은 창까지 활짝 열려 있고 바람을 품은 하얀 커튼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창가 주변으로 우아하게 팔랑거렸다.

벌써 온 건가?

가게 앞에 놓인 벤치에 그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달리아가 걸음을 늦췄다. 헥헥거리며 뒤따라오던 로렐이 달리아의 손을 덥썩 잡고서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거봐. 오빠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

로렐의 말대로였다. 이미 한참 전부터 가게 문을 열고 기다린 듯, 문 앞에 놓여 있던 화분들이 전부 촉촉하게 젖어 싱그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하얀 셔츠를 걷어 올린 채 느슨한 얼굴로 화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분에 심어진 선인장을 희귀한 것 보듯 빤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달리아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표정 없던 얼굴 위로 꽃이 피어나듯 천천히 미소가 퍼져나갔다. 아이작은 더없이 환한 얼굴로 자신을 반겼다.

‘달리아.’

오래 기다렸을까. 최대한 서두른 건데.

그래도 이렇게 왔어요. 찾아왔어요.

‘왜 이렇게 늦었어.’

얼굴 위로 미소가 조금씩 걷히더니 이윽고 울먹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느새, 청년이었던 그의 몸이 작은 소년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 울지 마세요.

달래자 작은 몸을 웅크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보다가 힐긋 눈을 들어 자신과 눈을 맞춘다.

‘나 두고 가지 마.’

단단하게 굳은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달리아는 웅크려있는 등으로 손을 뻗어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쥐었다 폈다 바쁘게 움직이던 두 손이 달리아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 작고 가냘픈 손길이 목덜미에 스미는 촉촉한 감촉과 더불어 달리아를 하염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안 그래요. 왜 도련님을 두고 가요.

‘달리아.’

울지 말아요, 도련님.

누가 도와줬으면 싶을 때에는 꼭 저를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거니까.

“…리아.”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일어나요.

“……달리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혼몽한 정신으로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푸른 어둠에 휘감긴 천장이 이제는 익숙했다.

가쁜 숨소리와 격하게 오르내리는 가슴, 축축한 등과 머리. 내 것인지 아닌지 모를 감각을 떨쳐내고 나서야 달리아는 모든 게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잠이 든 걸까.

호흡을 가다듬고서 눈곱이 낀 눈을 슥슥 문질렀다. 시야가 맑아지고 나른한 기운이 조금씩 가셨다. 달리아는 꿈벅꿈벅 천장을 쳐다보다가 몸에 달라붙은 슬립이 답답해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옆에 누워 잠들어 있는 아이작을 발견했다.

“어……”

그대로 굳어 가만히 아이작을 내려다보던 달리아가 시트를 움켜쥔 채 슬그머니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아이작이었다.

왜 주인님이 여기에 있지.

“주인님… 주무세요?”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아이작은 여간 깊이 잠든 건지 인기척을 내도 미동조차 없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달리아는 이내 김빠진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 헤드에 등허리를 기댔다. 푸르스름한 어둠 사이로 새어든 달빛이 떠다니는 먼지에 은은한 빛을 뿌렸다.

언제 온 걸까.

잠든 걸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든 걸까.

지나치게 생생한 꿈, 거기에 눈을 뜨자마자 보인 아이작의 얼굴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살아있는 감각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달리아는 가슴 언저리를 스치는 찬기를 느끼고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잠들기 전까지 고동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하얀 슬립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속옷마저 느슨하게 풀어져 있어 가슴 끝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잠결에 내가 벗었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언덕을 쳐다보던 달리아가 붉어진 뺨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은 속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순결하고 무구하기만 했다. 평소에 손잡는 것조차 민망해하는 그였으니 아마 잠든 사이에 답답해서 스스로 벗은 모양이었다.

미쳤나 봐.

다 큰 숙녀가 어쩜 이렇게 무방비할 수 있을까.

가슴을 내려다보던 달리아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속옷을 빼냈다. 드레스 룸으로 가서 옷매무새를 추스르기 위해 침대 밖으로 발을 뻗은 찰나.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울음 섞인 목소리가, 달리아의 발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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