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63/97)

63

“내가 붙잡으면 저택을 떠날 거라며. 그럼 안 되지. 그래서 도망갈 수 없게 붙들어놓은 것뿐이야. 뭐든 다 해 줄 테니까… 정리될 때까지 여기에 있어.” 

큼지막한 손바닥이 달리아의 뺨을 덮듯이 어루만졌다. 아이작은 눈동자를 내려 달리아를 응시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러는 게 당황스러운가 보네.”

“주인님이 제 입장이라면 더 당황하실걸요. 저 어디 안 가니까 그냥 놔주세요.”

글쎄, 중얼거리며 아이작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옛날얘기 하나 할까.”

곧은 손가락이 귀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긁듯이 턱을 쓸며 내려왔다.

“꽤 오래전에 네가 그런 말을 했어. 카를라의 약혼 드레스가 너무 예쁘다고. 그런 드레스 입고 좋아하는 사람과 약혼하는 건 모두의 꿈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런 드레스 입혀 주면 나와 약혼할 거냐고 물었는데, 네가 뭐라고 답했는 줄 알아?”

“…그건.”

“마음이 변치 않으면 성년식을 치르는 날, 정식으로 청혼해달라고 했어.”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던 눈매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아이작은 턱을 쓸던 손가락을 들어 달리아의 아랫입술을 지분거렸다.

“일주일 뒤면 성년식인데. 이제 어쩔래?”

“…주인님.”

“청혼해도 싫다고 하겠지. 넌 날 남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너를 여자로 느끼는데. 널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엄지로 끌어내리며 아이작이 모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어린애한테 함부로 약속 같은 걸 하면 안 된다는 거야.”

“…….”

“순진한 꼬마는 그게 진심인 줄 알고 죽자사자 매달리거든. 특히 제대로 된 사랑도 못 받고 자란 불쌍한 사생아 새끼에게 그런 말을 하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해 줄 줄 알고서 맹목적으로 달려들어.”

“그건… 그냥…”

“너와 함께할 날만 꿈꾸면서 살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물 먹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렸을 때니까. 옛날이야기니까.

변명하려 해도 이게 변명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나가듯 건넨 농담을 지지대 삼아 여태까지 살아왔다는 이를 눈앞에 두고 감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달리아는 어두운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작 또한 무슨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응? 이렇게 다 이뤄놨는데 이제 와서 나를 밀어내면 어떻게 해. 다른 사람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너는 날 밀어내면 안 되지. 달리아… 너는 내 편이잖아.”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가느다란 눈매 속에 담긴 눈동자가 오묘한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달리아는 최후의 보루로 벼려놨던 변명을 끄집어냈다.

“주인님은… 저 말고 다른 분이 계시잖아요. 곧, 결혼하실 거잖아요. 그런데도 제게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스스럼없이 할 수 있으세요?”

“내가 정말 얼굴도 모르는 계집애를 좋아서 결혼할 거라 생각해?”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귀 뒤로 넘겨주며 아이작이 작게 웃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 달리아. 이 집안에서 일하면서 사랑해서 결혼한 귀족들을 본 적 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작위를 가지려면 어쩔 수 없이 필요했으니까 진행한 것뿐이야. 그 작위를 위해 움직이게 한 사람이 달리아 바로 너고.”

“저는…!”

귓바퀴를 어루만지던 손을 쳐내며 달리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주인님의 정부 따위로 남을 생각은 추호도…!”

“누가 너를 정부로 삼는다고 해.”

어처구니없다는 듯 쓰린 웃음을 흘리며 아이작이 뿌리친 손목을 재차 붙들었다.

“엘리제 지락탈은 곧 죽을 거야.”

일그러진 눈매 속에 당혹으로 물든 초록 눈동자가 비쳤다. 아이작은 고개를 숙여 달리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은 너야, 달리아.”

홉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달리아가 굳은 입매를 억지로 움직여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 채 가쁜 숨만 흘렸다.

아이작은 벌린 입술에 살포시 입술을 포개 입을 맞춘 뒤 벌린 틈새로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내가 말했지. 난 한 번도 너를 정부로 생각한 적 없다고.”

실소를 흘리며 아이작이 살짝 눈시울을 접었다.

“부인으로 삼을 여자를 어떻게 정부로 삼아. 안 그래?”

* * *

겨울을 알리는 비가 세차게 땅을 두드렸다. 흐린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던 달리아는 다시 편지로 시선을 내려 바쁘게 펜을 움직였다.

반쯤 채워진 편지지 옆으로 동글동글한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진 편지가 놓여 있었다.

얼마 전 열두 살이 된 여동생은 이제 어휘도 글씨도 제법 어른스럽게 변했다. 무의식적으로 동생의 편지를 읽어내리던 달리아가 중간 단락에서 눈길을 멈췄다.

‘겨울 휴가 때 올 거지? 언제 올지 미리 알려주면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