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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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카펫과 하얀 벽, 높게 트여있는 창문 너머로 녹음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얗게 늘어진 커튼은 지겨우리만치 익숙한 무늬였고, 빼곡하게 늘어선 책장 속에는 달리아가 빌려 읽었던 책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분명, 별채에 있는 아이작의 방이었다.

“잘 때 분명 우익관에 있었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던 달리아는 곧 어떤 위화감을 깨달았다. 그 순간,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일어났냐, 달리아?”

“…후버 씨.”

후버가 푸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뒤로 넘기며 달리아에게 다가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후버는 옷차림 외에도 자세나 걸음걸이 등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듯했다.

“깨지 않게 데리고 오느라 약을 좀 썼다. 머리 아프지?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야.”

달리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약병을 받아들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후버가 뺨을 쓸며 머쓱한 어조로 말했다.

“…당분간 널 가둬두라고 주인님께서 명하셨어. 우익관에 두면 도망칠 것 같다고… 잠든 사이에 여기로 옮겼다. 위병 세워놨으니까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시중은 델마 퀀츠가 들 거야. 정리될 때까지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이어지는 통보에 정신이 없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달리아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눈을 뜬 순간부터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주먹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한 촘촘한 창살이 모든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창살을 바라보던 달리아가 약병과 후버, 실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아직도 꿈속에 있는 건가 싶어 머리가 어질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주인님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시는 거냐. 하여간 조용할 날이 없네.”

“이게… 지금, 이게 무슨…”

“놀란 걸 알겠지만, 요즘 예민하시니까 네가 좀 맞춰드려. 필요한 게 있으면 밖에 있는 위병들한테 말하고. 그럼 간다.”

후버는 툭툭 어깨를 두드린 후에 입을 뗄 새도 없이 나가버렸다.

그 손길에, 달리아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서 천천히 입을 벌렸다.

* * *

가신 회의가 끝난 건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토론에 녹초가 된 카를라와 달리, 아이작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한 얼굴로 비서와 보좌들에게 지시사항을 일렀다.

하나둘 지시를 받아 자리를 떠나고 이윽고 카를라와 아이작 둘만 남았다. 카를라는 단정하게 여미고 있던 더플코트의 단추를 풀어 헤치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피곤해 보이네, 카를라.”

펜촉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아이작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신과 달리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에 카를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넌 나보다 훨씬 바쁠 텐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니.”

“반년 전에는 이것보다 더 일찍 일어났어. 보좌였으니까. 너도 조만간 대표로 취임하면 더 바빠질 테니 금방 익숙해질 거야.”

“그거 격려 맞아?”

아이작이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던 서류들을 정리했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 카를라는 묵묵히 피로한 눈가를 문질렀다.

영지를 다스리는 일과 별도로 유프겐슐트 가문은 꽤 많은 사업을 주관하고 있었다. 철강과 그를 바탕으로 한 군수 산업으로 무역 경제의 부흥을 이끌고, 철도와 항만을 이용해 유통까지 아우르고 있는 유프겐슐트 사는 가문의 위명을 드높이는 데에 헬만의 영주라는 이름보다 더욱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비대해진 사업체는 아무리 날고 기는 사업가라 해도 혼자 힘으로 운영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혼담이 깨져 한가해진 카를라가 경영에 관심을 갖고 아이작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고, 아이작은 카를라가 경영자로서 나름 재능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서 그녀에게 철강과 군수 쪽을 넘기기로 했다.

“의외네.”

“뭐가?”

“오늘 회의에서 전부 내 취임에 반대할 줄 알았거든.”

흘리듯 내뱉은 말에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카를라는 눈꼬리를 누르며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가 대표로 취임한다는데 이상하잖아. 게다가 나는 다른 귀족 자제들처럼 퍼블릭 스쿨이나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퍼블릭 스쿨은 나도 안 나왔어. 그리고 네가 학교를 안 간 건 공작 부인이 결혼이나 하지 무슨 학교를 가냐고 반대해서 못 간 거였지, 네가 멍청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

“그도 그렇지만.”

“신경 쓰지 마. 게다가 오늘 회의 의장이 디테른 자작이었잖아. 그 사람이 가문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너니까.”

카를라가 눈매를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말도 안 돼. 그 늙은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매번 나한테 엄청 떽떽거리기만 했는데?”

“막스는 원래부터 좀 모자랐고 나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는데, 그나마 나은 후계자감이라고 생각한 게 너였던 거지. 여자로 태어나서 아쉽다고 종종 나한테 한탄했었거든.”

“정말?”

“너랑 막스에게 영지 경영을 가르친 사람이 디테른이라면서. 그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나 보지.”

말도 안 돼, 중얼거리면서도 카를라의 입꼬리는 쾌활한 기분을 반영하듯 높이 치솟았다.

그냥 배우는 게 좋아서 열심히 공부한 게 이런 식으로 남에게 비춰질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무척 뿌듯했다. 카를라는 입매를 단속하며 힐끗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다음 일정은 뭐니? 시간 있으면 식사라도 같이할래?”

“웬일로 데이트 신청을 다 하네. 아쉽지만 거절할게. 지락탈의 심부름꾼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지락탈이라는 말에 카를라가 미소를 지웠다.

그녀의 뇌리에 엘리제 지락탈과 그사이에 오가는 혼담, 그리고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던 지락탈 후작의 얼굴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너 정말 그 여자랑 결혼하려고?”

“그런 거래였으니까.”

“그 애는?”

아이작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길을 멈추고 무감한 표정으로 카를라를 쳐다보았다. 그 애라는 게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지.”

찬기가 서린 시선을 던지며 아이작이 입 다물라 경고했다. 하지만 카를라는 미간을 좁힌 채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별채를 새로 개축했다고 했지. 그리고 오늘 새벽에 위병들이 떼를 지어서 북쪽 숲으로 가던데… 아침에 보니까 그 애는 방에 없고. 이상하더라.”

아침에 봤던 기이한 행렬을 떠올리며 카를라가 쓴웃음을 흘렸다.

“별채에 그 애를 가둬두기라도 할 셈이니?”

아이작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시선만 던졌다. 무언의 긍정에 카를라는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 애 놔줘.”

“결론이 이상하게 나네.”

“결혼할 여자가 알면 걔를 가만 놔둘 것 같아? 그리고 그 애, 여기 가둬놔봤자 행복해할 사람도 아니야. 물욕 따위 없는 애한테 뭘 갖다 바친들 아무 의미 없어.”

“꼭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카를라.”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애한테 집착하는 거 이제 관둬. 너희 둘 다 하나도 득 될 거 없는 사이라고. 어렸을 때야 뭣도 모르고 서로 정들었다 쳐도 이제는 입장이 너무 달라졌다는 걸 모르겠어?”

“……하.”

아이작이 가늘어진 눈매로 카를라를 노려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같잖은 충고 정말 고맙긴 한데, 카를라.”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서류의 끄트머리를 천천히 우그러트렸다.

“네가 아버지한테 떼쓰면서 결혼도 질질 끌고, 아버지와 막스의 죽음을 방조한 것까지 모든 게 그 사랑 타령 때문이었잖아. 네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상대를 좋아하니 그런 헛짓거리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헛짓거리라니…”

“그래도 나는 널 한 번도 비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았어. 왜 그런 것 같아?”

비틀린 입매를 슬쩍 끌어올리며 아이작이 찬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너랑 다를 게 없으니까. 네가 미쳤다고 쫓아다니는 남자처럼, 나한테 달리아가 그런 존재니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유를 제거해 그 사람을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면 모든 이별이 그렇게 씁쓸하게 막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상대를 가려가며 사랑하겠지.

“그 애가 좋아서. 그 애를 위해서 이 자리까지 기어 올라온 거야. 너도 나랑 똑같잖아. 알면서 그런 말을 참 쉽게 하네.”

“…아이작.”

“난 달리아 가질 거야.”

단언하는 말은 카를라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이작은 가늘게 뜬 눈으로 구겨진 모서리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배려하는 것도 의미 없어. 그게 어떤 형태든지 아무래도 좋아. 난… 그 애를 가질 수만 있으면 돼.”

자신의 배려를 달리아가 부담스럽게 느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나름 방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내뱉은 말은 충격이었다.

‘배려하실 생각이 없으신 거니까, 저택을 떠나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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