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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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어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달리아가 흘리듯 말을 뱉었다.

“주인님께서 바라는 것 없이 제게 잘해 주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주인님께 드릴 게 없어요. 이 몸 하나밖에 남은 게 없어요. 이대로 있으면… 계속 주인님께서 제게 뭔가를 바란다고 착각해서 선을 넘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안 되는데…”

“…….”

“저는 주인님의 정부가 아니잖아요.”

담담히 말을 매듭짓고서 달리아가 똑바로 눈을 들어 아이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옅은 숨만 뱉어내고 있었다. 이 분위기에서는 어떤 말을 한들 달리아에게 제대로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일부터 다시 기숙사로 돌아갈게요. 델마 씨도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려놔 주세요.”

“…달리아.”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고요. 보고 싶으실 때에는 제가 서재로 차 심부름 갈게요.”

“달리아.”

아이작이 미간을 좁힌 채 잘근잘근 씹어 잇자국이 난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달리아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배려하실 생각이 없으신 거니까, 저택을 떠나야겠지요.”

아무렇지 않게 툭, 튀어나온 답변에 아이작이 탄식을 흘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떠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서로 양극에 서 있는 것처럼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다. 변명을 들을 생각조차 없이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그녀에게 설핏 원망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초래한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오해를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입장을 바꿔서 달리아가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놈하고 결혼한다면, 배신감을 못 이기고 다 죽인 다음 스스로 목을 매달 것 같았다.

“……알겠어.”

더 이상 설전은 무의미했다. 지금은 조금은 놓아주는 척 그녀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어 줄 때라는 걸, 그래야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서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 계속… 내 멋대로 붙잡아둬서 미안해.”

미안하지 않지만 정말로 미안한 듯 눈매를 일그러트린 채 슬쩍 고개를 숙였다.

달리아는 알겠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몸짓에 아이작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그의 손을 붙든 채 달리아가 방문을 향해 걸었다. 마지못해 문 앞에 선 아이작이 불현듯 몸을 돌려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두지만, 나 한 번도 달리아를 정부로 생각한 적 없어.”

불신이 가득한 눈동자가 알겠다는 듯 느리게 깜빡였다. 아이작은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좋아한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진심이야. 나, 아주 예전부터 달리아를 좋아했었어.”

“…알아요.”

담담한 목소리에 속이 탄 아이작이 입매를 굳혔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달리아는 나한테 할 말 없어?”

답변을 종용하는 어투에 초조함이 흠씬 묻어났다.

아이작은 목덜미를 쓸던 손을 내려 달리아의 뺨에 손가락을 댔다. 손길마저 거부당할까 싶어 차마 쓸지 못하고 손가락만 움찔대던 찰나, 달리아가 서슴없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곧게 뻗은 손끝을 지나 불거진 마디를 스친다. 지그시 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미끄러트린 달리아가 그의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손등을 누르고 있던 입술이 달싹이더니 숨과 함께 작은 속삭임을 내뱉었다.

“저는 주인님을 남동생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아이작의 새카만 속눈썹이 동요로 잘게 떨렸다. 차마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달리아는 눈을 내리뜬 채로 숨만 내뱉었다.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그대로 굳어버린 몸을 밀어내는 손길은 평소처럼 상냥했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아이작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문이 자신의 고백에 대한 답변이었다.

입술이 스친 손등에 여전히 그녀의 체온이 남겨져 있었다. 아이작은 손등으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울렁이는 목구멍 안쪽에서, 진한 눈물 내음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 * *

달리아는 침대에 누워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융단 끝에 화려한 술이 촘촘히 달려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서너 명은 같이 누워도 될 법한 침대는 무척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워서 눈을 감으면 저도 모르게 잠들기 일쑤였다.

몸은 편했다. 화려하고… 좋았다.

그러나 마음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는다.

“내일 바로 짐 옮겨야겠다.”

옮길 것도 거의 없지만. 중얼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 화려하고 넓은 침대보다 기숙사의 딱딱하고 좁은 침대가 편하다고 하면 바보 같은 걸까.

아무리 익숙해지려 노력해봐도 달리아는 사치스러운 환경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평생 동경해 왔지만 막상 일상을 누리게 되니 마치 짝이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혹여 망가질까 찢어질까 겁이 나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고 종국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거만 떨기를 좋아하고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조금이나마 편했을 텐데.

소심하고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는 달리아로서는 제 주제에 맞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사는 나날이 지옥과 다름없었다.

그는 이걸 배려라고 생각했겠지. 아니,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베푼 호의였을 수도 있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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