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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로 옮기려는 것도, 매너 교사를 붙인다는 것도. 모두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정말로 달리아를 자신과 어울리는 정부로 만들 속셈인 것 같았다.
별채에 두고 내킬 때마다 찾으려는 걸까.
…다른 귀족들과 똑같이, 인적 없는 곳에 가둬두고 좋을 때마다 안으려는 건가.
켜켜이 쌓인 물음 중에서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용인은 주인의 물음에 대답하기만 할 뿐 질문을 던지는 건 엄금이었다.
“혼자 들어가지.”
어느새 방 앞에 도달한 아이작이 고개를 까딱여 옆을 가리켰다. 따라오지 말라는 태도에 델마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채 얌전히 방문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아이작이 내내 힘주고 있던 얼굴 근육을 느슨하게 풀었다.
콧속으로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그녀의 향기가 물씬 들어찼다. 아이작은 문 앞에 걸려있던 거울을 힐끗 쳐다보고서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포켓을 정리하고, 이마에 두어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단정히 뒤로 넘기고.
마지막으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음성을 높였다.
“달리아.”
소파에 웅크려 있던 다갈색 머리통이 굼실거리며 움직이더니 위로 쭈욱 목을 빼 자신을 돌아보았다.
자연스레 흘러내린 다갈색 머리카락 아래, 볼 때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조막만 한 얼굴에 잠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
“늦으셨어요, 주인님. 오늘도 바쁘셨나 봐요.”
눈을 비비적거리며 달리아가 소파 옆자리를 내주었다.
아이작은 소파 앉는 대신 달리아가 앉아 있던 소파 앞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달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슬슬 매만졌다.
“졸리면 그냥 누워 있지. 나 기다리느라 못 잔 거야?”
“하하… 아니에요. 항상 일찍 자는 게 버릇이라서 조금만 늦어도 잠이 오네요. 하는 것도 없는데 꼬박꼬박 잠이 와서 힘들어요.”
“재워 줄까?”
아이작이 양팔을 벌린 채 몸을 돌려 제 품에 안기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활짝 웃는 얼굴을 나른한 눈으로 바라보던 달리아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그보다 오늘은 좀 어떠셨어요? 오늘 그 철도 노선 회의 날이었죠? 요즘 계속 고민하고 계셨던 거.”
단호하게 거절하는 몸짓과 달리 일과를 묻는 어조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작은 시무룩할 새도 없이 빙그레 웃으며 말문을 뗐다.
“응. 보좌들하고도 얘기해 봤는데 역시 남부 노선 쪽은 사업체를 별도로 분리해서 관리하는 게 나을 것 같대. 요즘은 카를라도 경영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회사가 두 개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고…”
달리아의 무릎에 턱을 올려두고서 아이작이 재잘거림을 이었다.
“북부 노선하고 철강 쪽은 카를라에게 맡기고 나는 새로운 사업체에 집중하려고. 수익성으로 따지면 남부가 훨씬 가치가 높으니까, 아마 회사도 금방 크겠지.”
“수익성… 그럼 지금보다 훨씬 더 부자 되는 거 아니에요?”
“음, 남부 노선은 기업이랑 부르주아를 대상으로 관리할 거니까.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부자 될 수 있어.”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치자 달리아가 나른한 얼굴 위에 싱긋 미소를 덧씌웠다.
“즐거우신가 봐요. 주인님은 일 얘기하실 때 눈이 엄청 빛나요. 철도 얘기하실 때 특히나 더.”
“…내가 그랬어?”
“네.”
“기차를 좋아하니까… 늘 한 곳에만 갇혀 살아서, 어딘가 멀리 떠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멋쩍게 웃는 아이작이 귀여워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슬슬 쓸었다.
“하긴 주인님은 지도 보실 때도 눈이 반짝반짝하셨지요. 가보지도 못한 곳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참 신기해요.”
“직접 가보는 것보다 책으로 외우는 게 빠르잖아.”
사실은 데려가 줄 사람이 없으니 책으로나마 정경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달리아의 손을 붙잡아 입술에 갖다 댔다.
“슬슬 추워지니까 따뜻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 달리아는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가고 싶은 곳,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그리웠던 정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저는……”
우브랑에 가고 싶어요.
무심코 고향을 말하려던 찰나, 달리아의 뇌리에 로렐과 부모님, 폐허가 된 집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서랍 안쪽에 모아놨던 돈과 부모님의 묘비, 건강한 로렐과 함께 예쁜 꽃가게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도 둥실 떠올랐다.
달리아는 느슨하게 기대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우브랑. 그리고 로렐…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건 로렐과 함께하는 미래였다. 아이작에게 맞춰 저택에 갇혀 있는 건 이제 할 만큼 했다. 더이상 허송세월로 시간을 때울 수는 없었다.
그에게 몸을 내어준다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시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달리아는 붙잡힌 손을 떨쳐내고서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뭐든 말해. 다 들어줄게.”
아이작이 반짝이는 눈망울로 달리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달리아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다시 하녀로 복귀하고 싶어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아이작이 이내 크게 눈을 키웠다. 안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달리아가 그의 뺨을 콕콕 찌르며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하지 마세요. 여태까지 얌전히 주인님의 뜻에 따랐잖아요. 제게 뭔가 해 주고 싶으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더이상 이대로 못 있겠어요.”
“…왜?”
“그냥요. 일하고 싶어요.”
“그냥 일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이대로 편히 있어. 굳이 일할 필요 없잖아.”
아이작이 미간을 추어올리며 달리아의 무릎을 붙잡았다.
“필요한 건 다 갖다줄게. 동생도 데리고 올게. 여기가 갑갑하면… 그래. 별채로 옮길까? 달리아, 숲에서 산책하는 거 좋아하잖아. 안 그래도 마침 별채를 개축 중이었거든. 지내기 편하도록 드레스 룸 하고 도서관도 확장했는데, 지금 바로 옮겨서.”
“그런 거 아니에요.”
달리아는 무릎에 놓인 커다란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 감쌌다.
아이작은 늘 이런 식으로 말을 막았다. 한 톨의 숨김도 없이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그의 얼굴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금세 같은 감정을 전이시켰다.
아마 배우를 했다면 대성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이렇게, 서글프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로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절절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서 담담히 말을 이었다.
“곧 약혼… 아니. 결혼하신다고 들었어요.”
검은 눈동자가 동요로 출렁였다. 달리아는 입을 뗐다 다물었다 하며 난감해하는 아이작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이었구나.
부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니 날카로운 얼음이 가슴에 박혀 서서히 냉기를 퍼트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요.”
아이작은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사정이… 있었어. 정략적으로 이뤄지는 거라 그리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는 않을 거야. 물론 부부관계 같은 것도 없을 거고.”
“…….”
“이건 정말…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이렇게 오해할까 봐 사용인들한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건데. 후작을 회유하려면 어쩔 수가 없어서…”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아이작이 달리아의 손을 붙잡아 바쁘게 쓸어내렸다. 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핀 아이작이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짓을 뚝 멈췄다.
달리아가 내리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시선이 꼭.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로, 내 의도가 아니었어.”
늘 고운 봄을 담고 있던 초록 눈동자가 따스한 애정이 아닌 차디찬 책망의 시선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내 토로하는 심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달리아뿐이야.”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한결 가늘어진다. 아이작은 숨이 가빠오는 걸 느끼며 재차 진심을 내뱉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달리아야.”
고해하듯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말에 당황한 건 달리아가 아닌 아이작 본인이었다.
항상 뇌리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말이 기묘한 울림으로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백번이고 천 번이고 외치고 싶었지만 밖으로 끄집어내려 할 때마다 너무 먹먹해져서 도무지 내뱉을 수 없던 그 말이, 하필 이런 최악의 상황에 문장으로 형태를 드러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쉴 새 없이 달싹이며 가쁜 숨을 이어가던 입술이 변명하듯 또다시 들썩였다.
“나… 그게, 전부 다 정리되면 말하려고 했어.”
왜 이런 말을 해. 이런 거 말고.
“오래 가지 않을 거니까. 그 여자는 금방 사라질 거고… 자리가 안정되면 달리아를 제대로 맞아들이려고 했어.”
이런 말 같지 않은 말 말고, 좀 더 제대로…
제대로 된 말을 해야 하는데.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는 말을.
“피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으면 작위 계승을 취소한다고 해서. 다 이뤄놨는데 놓치면 너무 아쉽잖아. 그래서 조건만 생각하고.”
“주인님께서는.”
달리아가 붙잡힌 손을 빼내 아이작의 손을 세게 거머쥐었다.
“저를 사랑하시면서 다른 분과 결혼하시는 거네요.”
아이작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달리아를 응시했다. 달리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담담히 말문을 이었다.
“저는 상관없어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하셔서 그걸로 주인님께서 안정되실 수 있다면 좋은 일이잖아요. 어차피 공작 각하가 되셨으니 누구하고든 결혼하셔야지요.”
“난… 그래서 달리아를.”
“그런 농담은 그만 하세요.”
달리아는 달래듯 그의 손을 토닥였다.
“자꾸 헛된 꿈 꾸게 만드실 거예요? 저 같은 무지렁이가 어떻게 주인님과 결혼을 해요.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이작이 왜 결혼을 못 하냐고 반박하려던 찰나 달리아가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눌러 말을 막았다.
달리아는 입가를 당겨 억지로 활짝 웃어 보였다.
“타박하려고 말 꺼낸 게 아니에요. 아무튼… 곧 결혼하시는데, 결혼하실 분께서 주인님이 저를 이렇게 편애한다는 걸 알게 되면 제 입장이 난처해져요. 사실 지금도 많이 불편하거든요. 사람들이 저희 사이를 오해하니까요.”
“오해하라고 내버려 둬. 다른 사람 말은 아무래도 좋은걸.”
“저는 싫어요. 괜한 오해 받는 것도,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는 것도요. 평생 일하고 살아와서 이렇게 대접받기만 하는 거… 저 정말 불편해요. 편의 봐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아요.”
아이작이 미간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하녀로 복귀하게 해 달라는 거야?”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