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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계승이 끝나면 아이작은 정말로 유프겐슐트 공작이 된다.
정통성을 들먹이며 누군가가 시비를 걸 일도 없다. 작위를 인정한 중앙 행정부와 추밀원의 의견에 대한 반발로 간주되어 처벌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여 문제가 거론된다 해도 중앙 정부는 작위를 줬다 뺐었다 할 권리가 없다.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저 찬란하고 드높은 유프겐슐트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일인데.
…체크메이트가 바로 코 앞인데, 판을 뒤엎으려니 속이 쓰렸다.
어쩔까.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으면서 이 노친네를 망가트릴 수 있는 방법은…
아이작은 검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감정을 배제한 채 결론을 도출하고 도출된 결론에 대처할 후일을 도모한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렇군요.”
입매를 당겨 부드럽게 웃음을 떠올렸다.
“생각지 않게 너무 과분하신 분을 반려로 맞게 되어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게 후작님께서 바라시는 바라면 기꺼이.”
눈에 띄게 밝아진 후작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그에게 동조하듯 더욱 눈시울을 휘었다.
“영애와의 혼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기꺼이 받아들여서.
“오클란트와 달리 헬만은 기후가 다소 춥습니다만, 영애께서 잘 적응하실지 조금 걱정되는군요.”
막스를 떨어뜨린 망루에 데려가.
“부디 영애께서도 공작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겠습니다.”
떨어뜨려 주지.
장례식은 화려할 것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공작 부인이자 지락탈이 물고 빨던 막내딸이었으니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삼기 딱 좋은 소재다.
곁에 두기 싫은 인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치울 방법으로는 역시 죽이는 게 최고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뒤탈이 날 염려가 없다.
르네도, 막스도 게헤른도 그렇게 죽었는데 거기에 한 명 더 보탠들 무슨 차이일까. 최대한 살생은 멀리하려고 했으나, 달리아와의 미래를 막는 요소는 무조건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뒤부터는 누구를 죽인들 거리낌이 없었다.
비극의 가장 큰 관객이 될 후작은 속도 모르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하. 이 공작 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화국 어딜 가도 전부 내키지 않아 할 걸세. 내 딸은 그리 까탈스럽지 않으니 너무 걱정 말게나.”
웃으며 지락탈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너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공손히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지금만 넘기면 된다.
작위 계승을 끝낸 뒤, 자신이 지락탈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기 전에 그 딸을 죽여버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복잡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반지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아이작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엘리제 지락탈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 * *
보슬비가 내리는 정원에 아직 여물지 않은 낙엽이 떨어져 징검다리를 이루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빗방울을 쳐다보며 바늘을 꿰던 달리아가 따끔한 통증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야…”
여간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바늘에 제대로 찔린 것 같았다.
검지 끝에 맺힌 핏방울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걸 보고서 뒤늦게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쪽쪽 빨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책장을 정리하던 델마가 어느새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달리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며칠 내내 넋이 나간 얼굴로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지켜본 델마는 아무렇지 않다는 그녀의 태도가 못내 거슬렸다.
“도련님 약혼 얘기가 그렇게 충격이었어?”
“네?”
“약혼 얘기 들은 이후부터 계속 멍하잖아.”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인데요.”
“아무 상관 없기는.”
눈썹을 찌푸린 델마가 달리아의 몸을 훑으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둣빛 모직 드레스에 촘촘히 레이스가 달린 목면 스카프. 스카프와 같은 색의 하얀 리본으로 높이 올려묶은 머리가 청순하면서도 다소곳한 달리아의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원래도 예쁘장하던 얼굴인데 잘 입히고 잘 먹여서 예쁘게 꾸며놓기까지 하니 도자기 인형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잘 꾸며놔도 막상 아이작이 선택한 건 다른 여자였다.
“주인님께서 너를 그렇게 아끼셨는데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한다니, 당연히 충격이지.”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니까요.”
“왜 상관없어. 너 주인님 좋아하잖아.”
달리아가 입을 떡 벌린 채 델마를 쳐다보다가 어, 어어 하며 더듬거렸다. 입을 가린 채 우물쭈물하다가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티 나요?”
“아니. 나 말고는 모를 거야. 다들 반대로 알고 있겠지.”
“그렇겠죠…?”
달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바느질감을 손에서 내려놨다. 곤혹에 찬 얼굴 위로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래도요. 저랑 주인님, 정말로 그런 사이 아니에요.”
“나도 알아. 매일 곁에서 보는데 왜 모르겠니. 그래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뒤치다꺼리나 하던 보잘것없는 하녀를 갑자기 시녀로 올리더니, 방에 가둬놓고 예쁜 옷을 입히고 좋은 걸 먹인다. 극진한 대접처럼 보여도 실상 ‘사육’과 다를 바 없었다.
이걸 단순히 인형 놀이 따위의 유희로 생각하는 이는 세상에 없었다. 사용인들은 자연스레 달리아와 아이작을 부정한 관계로 인지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주인님이 될 줄 알았으면 나도 진작에 별채로 가서 다리나 벌릴 걸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