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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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 

이대로 안아버릴까. 그냥, 이대로 다 삼켜버릴까.

타는 듯한 눈으로 달리아를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안 돼요.”

본능에 잠식되려는 순간, 떨리는 목소리가 단호히 그를 밀어냈다.

“안 돼… 그만. 더는 안 돼요…”

“먼저 입 맞춘 건 달리아였는데.”

“그게… 이, 입술에 뭐가 묻어 있었어요! 떼, 떼려다가 고개를 너무 숙여서…!”

“…….”

“어쩌다 보니 실수한 거예요. 정말… 정말이에요.”

달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는 게 느껴졌다.

잠든 줄 알고, 아주 살짝만. 살짝만 입을 맞추려고 했을 뿐인데.

깨어 있을 줄 몰랐다. 이렇게 질척이는 입맞춤을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달리아… 응큼하네…”

흘리듯 내뱉은 말이 가시가 되어 따끔하게 양심을 찔러댔다.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달리아는 무릎이 이마에 닿게끔 더욱 깊이 몸을 구부렸다.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정원사와 잡역부가 환담을 나누는 소리가 열린 창으로 스미듯 흘러들어왔다. 한동안 그렇게 웅크려 있던 달리아는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입술이 아까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색이 진해진 입술에 맞춰 아랫입술에 콕 박힌 점도 아까보다 색이 진해진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당황을 숨기기 위해 흡, 숨을 들이마시고서 입가를 단단히 굳혔다. 태연한 얼굴로 시선에 응수하자 아이작의 눈시울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입 맞추고 싶으면 몰래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해.”

“…….”

“대신, 다음부터는 안 된다고 해도 끝까지 갈 거야. 그건 감안하고 달려들어.”

“끝까지요?”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골반을 빙 덧그리며 내려와 아랫배 언저리에 머물렀다. 아이작은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달리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끝까지. 싫다고 해도 안 봐줄 거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입 맞춰. 알았지?”

색정적인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달리아는 대답 대신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려 그의 눈치를 보다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 실수한 거예요. 정말로 고개 숙이려다가.”

“그런 실수 자주 하면 좋겠네.”

아이작이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운 기색이 다분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다음, 달리아의 머리카락을 차분히 뒤로 넘겨주었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서로의 눈이 상대의 젖은 입술에서 떨어져나오지를 못했다.

한 번 더 하면.

그리고 이것보다 더 야한 짓을 할 수 있었으면.

서로 다르게 갈구하는 마음이 눈짓으로 읽어져 함부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일어나세요, 주인님.”

달리아가 먼저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건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꺼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몸을 겹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만약 끝까지… 가버리면.

지금껏 소중히 가꿔왔던 그와의 관계에 다른 이름표가 붙여질 것만 같았다. 아이작과 달리아가 아닌, 유프겐슐트 공작과 그가 총애하는 정부가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를 좋아하는 것뿐 그에게 삶을 의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든 이들이 서로 다른 각자의 자긍심을 갖고 살아간다. 에디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살아왔으며 로렐은 아무리 아파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버티다가 끝에 끝까지 다다라서야 도와 달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달리아는, 수없이 많은 역경을 거쳐오면서도 자신의 몸을 담보로 미래를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는 대단치 않은 것들이라 폄하할지언정 이런 것들은 자신의 긍지를 지키는 아주 작은 불씨였다. 괴롭고 힘들고 외롭더라도 달리아는 제 손으로 일해 번 돈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걸 이제 와서,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의 호의에 맞춰 준다는 이유로 어그러트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달리아는 그의 정부가 될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차 식겠어요. 빨리 나오세요.”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몸짓이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애달팠다. 아이작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새로운 유프겐슐트 공작의 이름이 전서구의 발에 매달려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작위 계승식이 코앞으로 닥쳐오고, 모든 게 순조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라는 듯 작위 계승식 바로 전날 비보가 닥쳤다. 집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아이작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님. 송구하오나 지금 당장 응접실로 가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계승식 준비로 정신없는 오후에 난데없이 불청객이 쳐들어왔다.

당장 새벽 일찍 수도로 떠나야 하는데 이럴 때 손님이라니. 게다가 초대장도, 연락도 없이 방문한 손님이었기에 평소였다면 집사 선에서 정중히 방문을 거절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응접실에 앉아 있는 손님은 집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손님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피로한 기색을 떨쳐내고 기품있는 자세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손님을 보고 의례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님. 내일 수도에서 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어쩐 일로 이 먼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씰룩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많아. 워낙 시급한 안건이라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네.”

지락탈 후작이 앉으라는 듯 건너편을 가리키며 웃었다.

토비아스 지락탈.

동부를 지배하는 대영주이자 현 추밀원의 의장이었다. 아이작에게 추밀원의 인정서를 발급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의구심을 숨긴 채 웃는 낯으로 그의 앞에 앉았다.

“시급한 안건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말로 하기는 그렇고. 한번 읽어보게.”

아이작의 앞에 작은 봉투를 내려놓고서 검지로 끄트머리를 툭툭 두드린다.

굵직한 손가락에는 인장 반지 외에도 커다란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여러 개 끼워져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들을 쳐다보던 아이작이 이내 봉투를 열어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짧았다. 그러나 눈동자가 아래로 움직일수록 아이작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편지를 갈무리한 아이작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실소를 흘렸다.

“후작님.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후작은 멋쩍어하는 대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과욕은 자네가 부리는 거지. 사생아를 적자로 인정하는데 어찌 그런 소소한 대가로 만족하라는 건가.”

“분쟁 지구와 상업 지구의 지배권을 통째로 넘겨드렸는데 그게 소소한 대가입니까. 후작님께서는 그릇이 참 크시군요.”

그날, 동북부 회담을 위해 저택을 떠난 날.

아이작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지락탈을 만나 포석을 깔아두었다.

적을 적으로 제압하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술이었다. 그때는 공작이 될 생각이 반신반의했기에, 혹시 모를 가신들의 배반과 막스에 대한 제동장치로서 지락탈과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막스가 죽고, 깔아둔 포석을 활용할 때가 되었다.

지락탈을 회유하는 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아이작은 지락탈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지락탈은 이득 앞에서는 모든 걸 불사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렇게 거래가 이루어졌다.

땅과 세금 인하, 탄광과 두 개의 철광까지. 모두 추밀원의 인정서를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다.

물론 지락탈이 이걸로 만족할 작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혹시 다른 걸 원한다면 땅이든 군사든 충분히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편지는 선을 넘었다.

“따님을 주신다 해도 저는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만.”

약혼이니 결혼이니 운운할 사람은 공작 부인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락탈은 자신의 딸과 아이작이 결혼하기를 마지막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이걸로 화친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서로 으르렁대던 앙숙이 결혼한다면 영주민들도 서로에게 너그러워지지 않겠나. 자네 또한 내 밑에서 정치를 배우는 게 여러모로 득일세. 감히 지락탈 가의 사위에게 정통성이니 뭐니 함부로 입을 놀릴 자는 없을 테니 말이야.”

내 밑에서. 정통성. 지락탈 가의 사위.

서술된 단어를 곱씹던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좁혀 지락탈을 쳐다보다가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의도로 찾아온 건지 알 만했다.

인증서를 빌미로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내내 얌전히 있다가 작위 계승식 바로 전날 찾아온 것도 이를 위한 것이었다.

유프겐슐트 공작을 사위로 삼기 위해서.

유프겐슐트를 제 휘하에 넣기 위해서.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게. 어차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누군가는 옆에 앉아야 하지 않겠나. 괜히 이곳저곳 견줄 필요 없이 내 딸을 공작 부인으로 맞이하게나. 내 딸이지만 꽤 쓸모있는.”

“거절하면 어쩌실 거냐 여쭸습니다.”

건조한 어조로 말을 자르자 지락탈이 설핏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곧 다시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기는.”

지락탈은 턱을 쓸며 오만한 미소를 떠올렸다.

“인증서 발급을 취소해야지. 자네가 정통한 후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던가. 작위 계승은 취소되고 자네는 예전의 사생아 자리로 돌아와야겠지?”

“…인정서의 발급 주체인 후작님의 위명에도 금이 갈 텐데요. 그 점은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손해야 보겠지만 자네만큼 심각한 타격이 있지는 않을걸세.”

아이작은 느릿하게 입술을 핥고서 피로한 눈가를 짓눌렀다.

일이 지나치게 잘 굴러간다 했다. 혹여 엇나간다 해도 전부 손안에서 조정할 수 있었는데. 설마 지락탈이 자신의 딸을 무기로 내세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에게 딸은 하나뿐이었다. 엘리제 지락탈.

아들만 내리 셋을 낳고 마지막으로 낳은 딸인 만큼 그가 엘리제를 아끼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아버지의 후광을 차치하고서라도 미모와 식견이 뛰어나 사교계에서 무척이나 환영받는 인물이라 했다.

뭐, 아버지가 오클란트의 대영주이니 박색에 멍청한 여자였다 해도 여기저기서 결혼하자 달려들었을 테지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게 전부였다. 딱히 알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딸을 아무리 유프겐슐트라해도 창부 소생의 사생아에게 팔아넘길 리 만무했고, 때문에 아이작 또한 그게 걸림돌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유프겐슐트는 사랑하는 딸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였나 보다.

…어쩌면 좋을까.

이 비열한 노인의 말을 순순히 따라야 하나.

아이작은 입속을 깨물며 눈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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