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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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주인의 탄생으로 저택은 변혁의 바람이 불었다. 

게헤른의 취향이 가득했던 다갈색 실내 장식이 푸른 계열로 전부 교체되고, 우익관에 있던 가주의 방은 좌익관으로 옮겨졌다.

폭우가 지나간 정원에서 습한 여름 냄새가 났다. 창틀을 만지작거리던 카를라가 정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약속 지켰어.”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시선을 향했다. 책상에 앉아 종이 더미를 들추는 아이작에게 재차 고하듯 말을 잇는다.

“널 공작으로 추대했잖아. 이제 네 차례야. 약혼 없었던 걸로 해 줘.”

“걱정하지 마.”

아이작은 서류에 눈길을 못 박은 채 흘리듯 대답했다.

“이미 처리했어. 어제 서신을 보냈으니 못해도 내일 안에는 답장이 오겠지.”

카를라의 눈이 커졌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카를라가 심란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 사람,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공자가 약혼 파기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설마.”

펜에 잉크를 채우며 아이작이 옅게 미소를 띠었다.

“그런 일은 없지.”

“…네가 직접 요청한 거라서?”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 카를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 공작이 직접 요청한 거니까.”

말하면서, 아이작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듯 한쪽 입매를 끌어올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놋테 후작가 또한 추밀원의 일원이지만 격으로는 유프겐슐트에 한참 모자란 가문이었다. 영주들 간에 딱히 상하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혼약을 주관하는 가문의 대표가 거절한다면, 그리고 그게 유프겐슐트라면 후작가에서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터였다.

“이로써 돼지 공자와도 안녕이네. 기분이 어때, 카를라?”

“…….”

“왜 표정이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이작이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으며 옆으로 고개를 세웠다.

눈썹을 들어 올린 채 걱정스러운 시선을 쏟아내는 모습이 마치 좋아하는 이를 걱정하는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사람은 참 단순해서, 본질이 뒤틀려 있다 해도 겉피가 저렇게 번듯하면 모두 깜박 속아 넘어간다. 카를라 또한 그렇게 최악의 방식으로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이작을 착하고 품행 바른 아이로 여겼을 터였다.

그의 본질을 아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아니… 몰랐다면 자신도 막스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겠지. 알아서 다행이었다.

카를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걱정하는 척 집어치워. 소름 끼쳐.”

“진짜로 걱정하는 거야. 결혼하기 싫다고 그렇게 난리 쳐서 나랑 손잡은 거였잖아. 그럼 좋아해야지 왜 죽상을 쓰고 있어?”

“……어머님이.”

다 식어버린 찻잔 속에 미처 거르지 못한 찻잎 부스러기가 떠 있었다. 카를라는 물끄러미 부스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혼처를 찾는다고 난리 치실 것 같아서. 여태 결혼을 미뤄 온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는데 이제는 아버지도 안 계시니까. 지금이야 파혼했다 쳐도 또 언젠가는 다시 결혼하라고…”

“내가 있잖아.”

아이작은 깍지 낀 양 손등에 턱을 올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나 그렇게 야박한 놈 아니야. 결혼하기 싫으면 언제까지고 막아 줄게.”

“…….”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어질 수 없는 거… 나도 충분히 이해하거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좋을 대로 살아.”

차분하게 말을 읊던 아이작이 이내 눈매를 갸름하게 좁히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공작 부인은 네게 신경 쓸 틈이 없을 텐데 무슨 걱정인가 싶다. 여전히 방에서 안 나오셔? 우익관을 갈 일이 없어서 만날 일이 없네.”

“…요즘은 그래도 식사 꼬박꼬박하시고 정원에도 나오셔.”

“그래. 그 사람이 오랫동안 풀 죽어 있을 사람은 아니지. 아마 다음 계책을 모색하느라 바쁠 거야.”

“계책?”

“지금 네 어머니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네 결혼 상대가 아니라 내 결혼 상대일 테니까.”

입을 벙긋거리던 카를라가 아,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친정과 친족들을 이용해 권력을 쥐려던 어머니였으니, 며느리를 이용해 아이작을 쥐락펴락할 생각을 떠올리는 건 아주 쉬울 것이다.

게다가 입장 상 그녀는 아이작의 어머니였다. 배우자를 제시할 명분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래도 돼? 넌 괜찮아?”

카를라가 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애정없는 결혼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 절절히 아는 그녀로서, 자신을 대신해 고난을 짊어질 아이작이 괜스레 안쓰럽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너… 그 애 좋아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괜찮겠어?”

“나 걱정해주는 거야?”

아이작은 부드러운 천으로 안경을 닦으며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카를라가 눈살을 찡그리며 왈칵 성을 냈다.

“넌 기껏 걱정해줬더니 또 그렇게 장난이나 치니.”

“생전 관심 없던 사람이 쓸데없이 걱정해주니까 기분 좋아서 그러지.”

“왜 쓸데없는 걱정이야?”

“결혼하라고 협박하면 내가 알겠습니다 하고 결혼하겠어? 나 이 자리 욕심나서 앉아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차지한 것뿐이지.”

웃고 있는 눈매 속에 서늘한 파랑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카를라는 성을 내던 걸 멈추고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자신과 다르다. 권력이라고는 한 자락도 쥔 게 없어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다르게, 제 손으로 기어 올라온 아이작은 가문의 모든 걸 손에 쥐고 있었다.

공작 부인이 뭐라 하든 닥치게 할 힘을 갖고 있는 거다. 그를 자신의 입장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어리석어도 한참을 어리석었다.

“그러시겠지. 누가 누구를 걱정하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가려고?”

“그래. 파혼 건은 더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제대로 마무리해 줘. 그럼 나 갈게.”

자리에서 일어나 숄을 여미는 카를라의 모습에 아이작이 흘리듯 한마디를 던졌다.

“나갈 거면 가는 길에 달리아 좀 불러 줘.”

카를라가 손짓을 멈추고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아이작을 쏘아보았다. 다시 서류에 신경을 쏟고 있던 아이작이 뒤늦게 고개를 들고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그 시녀가 뭐가 그리 좋아서 목을 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남의 연애 사정이 이해가 되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너나 나나 귀족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그냥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걸. 그지?”

비꼬듯 말을 내뱉고서 카를라가 쾅, 방문을 닫았다.

무슨 뜻인지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작이 뒤늦게 뜻을 이해하고서 설핏 웃음을 흘렸다.

격에 맞지 않는 사람을 굳이 만나고 싶어서, 고작 그 이유로 이 난리를 치며 집안을 뒤집어 놨다. 다 같이 비슷하게 태어났으면 쓸데없이 갈등 겪을 일도 없었을 테니 꽤나 뼈 있는 말이었다.

뭐 이제 와 그런 생각 해봤자 아무 의미 없지만.

상념을 지우고서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빠르게 글씨를 훑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정리해야 할 일과 앞으로 벌여둬야 할 일들을 상기했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창틈으로 흘러들어온 새 소리와 맞물려 평온한 적요를 불러들였다.

고요 속에 문이 열렸다.

“도련… 아니, 주인님…?”

티 세트를 들고 온 달리아가 힐끗 아이작을 쳐다보고서 걸음 소리를 죽여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한 번 몰입하면 어지간해서는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는 아이작이었다. 그런 그를 알기에, 달리아는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차를 내렸다. 티 테이블에 다과를 내려놓고서 달리아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일이 많으신가 보네.

서류 파묻혀 있는 아이작을 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작위를 잇겠다 공표한 뒤로는 책상에 쌓인 서류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보조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두루마리는 공문인 것 같은데, 그것만 보는데에도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질리는 서류들을 아이작은 묵묵히 하나씩 정리했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 위로, 아침 일찍 단정히 뒤로 넘겨줬던 머리카락이 하나둘 흐트러져 가볍게 이마를 스치고 있었다.

원래도 차분하고 이지적이던 얼굴에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무척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하긴, 평소에도 그랬지.

분명 자신이 더 연상인데도 아이작을 보고 있으면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을 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타고나는 분위기 때문인 걸까.

“달리아?”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고개를 들자 아이작이 놀란 얼굴로 안경을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왔어? 왔으면 말하지 그랬어.”

“바빠 보이셔서… 금방 일어나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침 방금 전에 차를 따랐는데, 드시겠어요?”

티포트를 들어 올리며 싱긋 웃자 아이작이 따라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달리아는 설탕 그릇과 우유 포트를 아이작 앞에 밀어주고서 작은 레몬 조각을 찻잔에 띄웠다. 스푼을 건네려던 찰나,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손이 스푼을 빼앗아 들더니 빈손을 제 쪽으로 낚아챘다.

“오늘은 뭐 했어?”

엄지로 손등을 슬슬 쓸어내리며 아이작이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손등의 상처를 쓰다듬는 건 이제 습관처럼 굳어졌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 닿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리아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냥… 도련님 나가시고, 방 정리하고.”

“그런 건 하녀들에게 시키라고 했잖아.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마. 그리고 또?”

“…그게 전부예요. 남은 시간에는 책 읽고 편지 썼어요.”

손등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부드럽게 팔을 쓸었다. 궤적을 좇듯 살결을 타고 올라온 손가락이 이내 달리아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달리아는 밀어낼 생각도 못 한 채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손길을 받아냈다.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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