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방계 혈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골랐다. 그렇게 누군가가 입을 열기 전, 공작 부인이 음울한 어조로 먼저 말을 가로챘다.
“막스가 유일한 적자였으니 이제 가문 내에서 유프겐슐트를 이끌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친족분들께 의탁하는 것도 괜찮겠으나 추밀원에서 이를 인정할 리가 없지요.”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는 무척 감정적이었으나 그 안의 담긴 내용은 지나치게 타산적이었다. 이르미나는 단 한 마디로 혈족들의 입을 닥치게 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혈족 중에서 후계자가 될 만한 아이를 제가 고르겠어요. 그동안은 제 친정인 솔본 후작가에 공작가의 대리를 위임하는 건 어떨까요. 후계 수업을 마칠 동안만 대리 집행하다가 후계에게 자리를 양보하지요.”
방금 전까지 아들과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던 여자라고 볼 수 없는 탐욕적인 제안이었다. 노골적으로 대리 집권을 하겠다는 말에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디테른 자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이오. 다른 것도 아닌 어찌 솔본 후작가가, 후작가따위가 유프겐슐트를 대변한다니! 나 원, 여우가 호랑이를 제치고 왕 노릇 하라는 꼴 아닙니까?”
“디테른 자작! 말씀이 지나치군요! 지금 제 친정을 욕보이는 건가요?”
“지나친 말씀은 지금 공작 부인께서 하셨잖소. 후작가를 가벼이 여기는 게 아니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반박한 것뿐이지.”
“아니…!”
“차라리 직접 헬만을 다스리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 그러시오. 공작 부인께서 입후보하겠다고 하신다면 당당히 반대를 표하겠소.”
이르미나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자작 또한 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적의 어린 시선을 던졌다.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이르미나와 유프겐슐트 외에 다른 귀족들을 머저리로 취급하는 디테른 자작은 사이가 나쁘기로는 지락탈과 유프겐슐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원로 가신을 축출하지 못해 안달 난 이르미나가 쉼 없이 게헤른에게 쫓아내라 잔소리를 했지만 게헤른 또한 가신이자 그의 스승인 사람을 함부로 내쫓을 수는 없었다.
죽일 듯한 눈으로 자작을 노려보던 이르미나가 베일을 뒤로 걷으며 신경질적인 손길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지요. 지금 와서 다른 대안이 있나요? 더 나은 제안이 있으면 얼마든지 수용하겠어요.”
“더 나은 제안…”
당연히 없다며 고개 숙일 줄 알았건만, 자작은 한 쪽 눈썹을 찡그린 채 옆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모호한 눈빛을 던졌다.
시선을 받은 뉴엣 백작이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건너편에 위치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묘한 기류에 다른 친족들 또한 호기심 어린 얼굴로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문을 이을 만한 사람,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있던 오브릭 자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받아쳤다.
딸의 죽음으로 술독에 빠져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완벽한 가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작은 오연한 태도를 내보이며 느릿하게 움직이던 시선을 한 곳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을 따라 회의실 안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이르미나 또한 카를라의 옆에 앉아 있는 이에게 시선을 멈췄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곳에 무거운 적막만이 남았다. 이윽고, 이르미나가 멈췄던 숨을 내쉬며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저 애를 감히 어떻게…!”
끼익,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이르미나가 말을 흐리며 눈을 부릅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작이 옷깃을 추스르며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철없고 부족한 몸이지만 맡겨 주신다면 여력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작은 옆으로 고개를 틀어 이르미나의 시선을 응수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가문의 안주인이신 공작 부인께도 예절과 정성을 다하며 어떤 가르침이든 감사히 받들 것입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입만 움직여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예절과 정성 따위를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작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음을 깨달은 이르미나 또한 입을 벙긋거리며 치욕을 어떤 식으로 발화해야 하는지 빠르게 계산했다.
“너 따위가 감히…! 여긴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정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 같은 게 어떻게 감히 작위를!”
“제 정통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정당한 후계라는 건 추밀원이 보증하고 있습니다.”
“뭐?”
얼빠진 외침을 내뱉은 건 이르미나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추밀원이라는 단어에 웅성거림과 함께 말도 안 된다는 시선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뼛속까지 오만한 기질이 묻어 있는 추밀원, 그 영주들이 정통성을 인정하는 경우는 적장자뿐이었다. 정식 부인의 첫아들, 아이작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그게, 그게 말이 돼? 별 헛소리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르미나가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자 아이작이 피로하다는 눈으로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예복을 갖춘 채 그의 명을 기다리던 후버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이르미나의 앞에 내려놓았다.
“지락탈 의장이 직접 날인한 인증서입니다.”
아이작은 반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정중하지만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초연한 오만함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이르미나는 후버와 아이작, 두루마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혼란에 빠졌다. 구질구질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번듯한 태도로 제 앞에 나타난 후버도, 고개를 치켜든 채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거만을 떠는 저 사생아 놈도, 그리고 지락탈이 줬다는 인증서까지.
전부가 허상 같았다. 자신을 농락하는 악질적인 장난 같았다.
“지락탈 후작이… 어떻게, 말도 안 돼! 우리 가문이라면 허구한 날 물어뜯기 바쁜 그 승냥이가 어떻게 너 같은 걸 후계로 인정한단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놀랍습니다.”
웃음기 섞인 어조와 달리 아이작의 얼굴은 삭막하게 메말라있었다.
“이미 가신들과 추밀원 행정관들의 입회하에 검증된 문서입니다만… 믿고 안 믿고는 공작 부인께서 결정하실 일이지요.”
이르미나가 사실이냐는 듯 디테른 자작과 뉴엣 백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작과 백작은 복잡한 얼굴로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들이 아이작을 차기 후계로서 추대하는 것과 별개로 추밀원의 인정을 받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사생아라는 벽을 넘지 않은 한, 아이작은 절대 작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이작은 오늘 새벽, 장례 준비에 바쁜 친족들을 따돌린 뒤 가신들에게 추밀원의 인증서를 내보였다.
대체 어떻게 이를 받아냈는가.
의문은 무성했지만 아이작은 정확한 답 없이 가신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이냐만 물었다.
가신들은 망설이며 뉴엣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아이작을 보좌까지 이끈 뉴엣 백작 또한 전대미문의 일에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머뭇거리는 분위기를 종식하며 가장 먼저 충성하겠다 나선 사람은, 놀랍게도 오브릭 자작이었다.
은거하기 전, 사생아는 집안에 해만 된다며 아이작을 배척하던 이가 묵묵히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가신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가신들 틈에서 뉴엣 백작 또한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그를 지켜보던 디테른 자작 또한 한숨을 내쉬며 목을 숙였다.
이를 뒤따르듯 모든 가신이 고개를 숙였다.
사생아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거부감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작위 계승에 대한 화제를 꺼내기 이전부터 가신들 모두가 그를 사생아가 아닌 유프겐슐트를 떠받드는 충직한 보좌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훌륭한 보좌가 훌륭한 주인으로 바뀌는 건 정치에 몸 담그고 있는 가신들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서른 명의 시장들은 그를 차기 후계자로 인정했소.”
오브릭 자작이 허리를 세우고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가 그에 힘을 보탰다.
“이의 없습니다. 저도 그를 차기 공작으로 인정하겠어요.”
이르미나가 기함하며 옆에 있던 딸의 어깨를 흔들었다.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를라!”
“어머니께서는요?”
이르미나의 손을 뿌리치며 카를라가 차분하게 물음을 던졌다.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 것이라 믿었던 딸이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다니, 이르미나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카를라는 주변을 휘 둘러본 뒤 다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대답해 주시면 끝나요. 빨리 결정하세요.”
“무슨… 이게, 말도 안 돼. 무슨…!”
“어차피 반대하셔도 의미 없는 것 같지만요. 승계 관련은 다수결로 결정된다면서요.”
가신들도,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직계인 카를라도 그의 편에 손을 들었다. 추밀원 또한 그를 적장자로 인정한다며 아이작의 편을 들고 있었다. 자신이 닥치게 만든 방계 혈족들은 입을 다물고 흐름에 편승한 지 오래전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이르미나 혼자뿐이었다.
허옇게 뜬 얼굴로 딸과 가신들, 친족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모두 침묵하거나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내 아이작에게 닿았다.
아이작은 바른 자세로 서서 물끄러미 그녀를 마주 보았다. 눈짓으로 서로의 타협안이 교차한 순간. 아이작이 부드럽게 눈매를 접었다.
“용인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아이작은 아랫입술을 축이며 보일 듯 말듯 은근히 미소를 끌어올렸다.
천박한 출신 주제에 감히 자신을 어머니라 칭하는 꼴이 못 견디게 뻔뻔스러웠다.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이 상황에서 입을 열어봤자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승자는 이미 확연했다.
이르미나는 입술을 깨물며 분한 눈으로 사생아 놈을 노려보았다. 아이작 또한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건조한 어조로 종지부를 찍었다.
“헬만과 가문의 번영에 이 몸 바쳐 노력할 테니, 어머니께서도 모자란 아들을 부디 긍휼히 지켜봐 주십시오.”
아이작은 정중히 인사한 뒤 먼저 나서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작 유프겐슐트.
유프겐슐트 공작가의 아홉 번째 주인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