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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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천 위에 드러난 윤곽으로 그의 얼굴을 그린다. 

아버지. 그러나 생전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던 이상한 존재.

“아버지, 정말 웃긴 사람이었어요. 챙기는 척하면서 꼭 결정적일 때는 뒤로 물러나고. 이르미나가 나 욕할 때도, 막스가 때릴 때도 모른 척하셨잖아요. 그러다가 내킬 때만 나한테 상냥하게 굴고.”

한때는 그런 것마저도 애정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헬만의 지배자, 공화국을 주도한 혁명 영웅. 위대하기에 일반적인 감정으로 그를 대하면 안 된다고, 기대를 내려놓고 그의 선택적 애정에 자신도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질없는 것을.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가면 같은 무표정 위에 맹렬한 비웃음이 번져나갔다.

“위선자라고 해요. 적당히 착한 척하면서 너그러운 자신에게 도취해 그걸로 자위하는 사람.”

제멋대로 상냥하다가 제멋대로 무관심해지는.

그 얼마 되지 않는 다정함마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닌 르네에 대한 속죄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기만자이자 위선자였다.

가만히 게헤른을 쳐다보던 아이작이 시선을 돌려 방을 쳐다보았다. 다갈색 톤의 벽지와 커튼, 그에 맞춘 듯 짙은 고동색의 가구들이 중후함을 뽐내며 주인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

그렇게 사랑한다는 르네의 찌끄레기에게는 보좌 나부랭이를 주려고 했구나.

그걸로 만족하라고 한 거였어.

웃음이 나왔다.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던 자신도 어리석었다.

“보좌 따위는 개나 주라고 해.”

지긋지긋한 다갈색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작이 초연한 얼굴로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유프겐슐트 공작입니다.”

실내 장식을 전부 다른 색으로 갈아치워야겠다 생각한 뒤, 아이작은 한 줌의 미련도 없이 방을 떠났다.

* * *

달리아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막스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눈을 떴지만, 막상 그녀가 전해 들은 건 소공작이 종탑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어째서 소공작님이…?”

간호를 위해 차출된 델마가 무뚝뚝한 얼굴로 달리아에게 물을 건넸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 주인님께서 의식을 잃으신 것도 전부 소공작님 본인 때문이라고… 죄책감이 들었나 봐.”

“소공작님 때문에요? 주인님께서 쓰러지신 건 넘어지셔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요.”

“…아니야. 소공작님이 홧김에 떠밀었다가 의식을 잃으셨대. 소공작님의 유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

물컵을 건네받고서, 델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아의 머리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달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목을 쳐들고 델마를 쳐다보았다.

“그럼 주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사실이에요?”

“그것도 들었어?”

“네. 아까 청소하다가 살짝 엿들었는데… 정말이에요? 왜요?”

델마는 손을 멈추고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다시 머리를 빗질했다.

“소공작님께서 주인님을… 그러셨어. 가는 길에 길동무라도 삼으시려고 했던 건지.”

초록 눈동자가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떠져 델마를 응시했다. 델마는 입속에 맴도는 씁쓸함을 뒤로 삼키며 조용히 침묵을 택했다.

소공작의 자결.

그가 남긴 유서에는 공작에 대한 증오와 그를 죽이게 된 경위, 자신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 따위가 구구절절하게 쓰여 있었다. 법관과 가신들의 참석 하에 개봉된 유서는 틀림없는 막스의 것이라 결론지어졌다.

물론, 그를 믿는 사용인은 없었다. 델마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봐도 살인인 것을.

모든 이가 묵과하는 상황에서 소공작은 아이작에게 살해당했다.

아이작이 집사를 언제 매수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매수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델마로서는 특유의 눈썰미로 세대교체를 직감한 집사가 소공작과 사생아를 저울질하다가 모종의 제안을 받고 사생아의 편을 들기로 마음먹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시종들 사이로 은밀히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에 동조하지 않는 시종들은 소리소문없이 저택을 나갔다. 위병도 하나둘 교체되고 저택은 아이작의 수하로 가득 찼다.

물밑 작업이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그의 부하들이 하녀들에게 접촉하기 시작한 건 한 달 전부터였다. 소공작의 악행에 시달릴 만큼 시달린 하녀들은 손쉽게 그들의 회유를 받아들였다.

델마 또한 그를 택했다. 아니, 아주 일찍부터 그녀는 아이작의 사람이었다.

소공작에게 고통받던 하녀들의 면면이 델마의 뇌리를 스치고, 이제 그런 추잡스러운 일도 끝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 이후는 알 수 없었다.

죽음이야 방조한다 쳐도 사생아가 공작이 된다는 건 귀족 사회에 문외한인 델마의 눈으로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다음 공작은… 저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후계자가 없는 거잖아요.”

달리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핵심을 던졌다. 델마는 미간을 좁힌 채 달리아의 머리를 촘촘히 땋았다.

“…듣기로는 이런 경우 혈족 중에서 남자를 뽑아 승계한다고 하던데 유프겐슐트는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왜요?”

“방계 가문만 여섯 개가 넘으니까. 승계 싸움한다고 난리 나지 않을까?”

“아……”

“게다가 추밀원도 문제야. 정당하지 않은 후계자라면 추밀원에서 작위 승인을 거부할 텐데, 과연 방계에서 난 후계자를 추밀원에서 후계로 인정할까.”

사용인들은 저택에 입주하면 가장 먼저 유프겐슐트의 내력과 그와 얽혀 있는 추밀원의 역사에 대해 배워야 했다. 이를 비롯해 영주들의 관계가 어떤지, 어떤 이에게 더욱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는 건 저택을 구성하는 기물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지식이었다.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해 온 델마 또한 대략적인 정치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켜본 현 상황의 가장 큰 걸림돌은 추밀원이었다.

“유력한 후보는 있고, 오늘 친족 회의에서 결정한다고 했으니까. 될지 안 될지 일단은 지켜봐야겠지.”

모호한 말로 말을 매듭짓고서 델마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며 협탁에 늘어서 있던 핀을 들어 달리아의 머리를 장식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달리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델마씨. 왜 머리를 땋아요?”

“도련님께서 명하셨거든. 일어나거든 잘 치장해서 서재로 보내라고.”

델마가 달리아를 침대에서 끌어내 입고 있던 잠옷의 리본을 풀었다. 놀란 얼굴로 가슴을 가리는 달리아에게 델마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옷 갈아입어야지. 참, 방도 옮겼어. 이제부터 달리아 너는 일반 기숙사 말고 우익관에 있는 시녀 숙소에서 지내야 돼.”

“네? 왜 굳이 숙소를… 왜요?”

“도련님께서 네게 준 남작위를 부여하셨어. 아직 임시지만…”

“네? 남작?”

“그래. 달리아, 넌 이제 귀족이야.”

달리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망설이던 델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두 손을 포갰다. 눈 속에 담긴 담담한 빛이 조금 더 어둑해지고, 델마가 고개를 깊게 숙여 묵례하며 말투를 바꿨다.

“그리고 저 델마 퀀츠가 오늘부터 시녀님을 보필할 겁니다. 저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하녀들이 주인님의 전담 시녀인 레이디 벨로흐의 손이 될 것입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거든 언제든 수족처럼 부려주세요.”

주인님의 전담 시녀?

…레이디 벨로흐?

“아니, 델마 씨. 왜 갑자기 그런…”

큰 눈을 쉴새 없이 깜박이던 달리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델마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손을 붙잡은 채로 장난 그만하라고 입을 떼려던 찰나, 델마가 깊이 조아렸던 고개를 들어 달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무뚝뚝한 표정도,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도 변함없었다. 그 변함없는 표정이 그녀의 말이 농담도 뭣도 아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달리아는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델마를 바라보았다. 델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달리아가 입을 벙긋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아니, 어떻게 레이디… 아니. 도련님이 어떻게 저한테 작위를… 자, 작위는 주인님만 내리실 수 있는 거잖아요. 가신들에게만 내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지금 주인님은 돌아가신, 어떻게 저를… 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무슨 상황인지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달리아는 다시 한번 농담하지 말라고 델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델마는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달리아 또한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멍한 뇌리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초록 눈동자가 동요로 급히 요동쳤다. 바닥을 보고, 느리게 방을 훑었다가 다시 델마에게 시선을 던졌다.

“설마. 설마 도련님이…”

델마는 눈을 마주친 상대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렇게 될 거야.”

아마도 그렇게…?

초록 눈동자 속에 숱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고, 또 다시 커져 델마를 바라보았다.

숱한 당혹 끝에 남은 건 상황에 대한 체념이었다. 미동조차 없이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델마를 마주한 채로 달리아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 거구나.

이제 도련님은, 도련님이 아닌 거구나.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달라졌음을 뒤늦게 깨닫고서, 달리아가 천천히 입매를 굳혔다.

* * *

장례식에는 비가 왔다.

불미스러운 죽음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친족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작 부인 홀로 비통한 울음을 터트릴 뿐, 다른 이들은 말을 아끼며 두 부자가 땅에 묻히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계절은 여름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저택은 서늘한 고요만이 가득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다음 주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치열한 설전이 오고 갈 것을 알기에 사용인들 모두 바짝 움츠린 채 입을 다물었다.

애도할 새도 없이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방계에서 온 수장들이 야심을 감추고서 하나둘 자리를 채우고 가신들이 뒤이어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공작 부인과 카를라, 아이작이 착석하자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기침 소리 하나 없는 조용한 평온이 마치, 태풍의 눈 같았다.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입을 뗀 순간 추모로 아름답게 미화된 이 분위기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리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누가 먼저 본심을 꺼낼까 가늠하는 눈빛들만 바쁘게 오고 갈 뿐이었다. 그런 정적을 부순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제 가문을 이끌어 갈 분은 누구인가요.”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베일을 만지작거리며 카를라가 툭 말을 내뱉었다.

다소 불량한 어투였지만 이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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