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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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으로 내모는 손에 아주 살짝, 힘이 빠졌다. 막스는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자, 자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네게 유감은 없어. 무슨 짓을 하든 지탄할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왜…”

“살, 살려줘…! 제발!”

“내 걸 건드려서 그 지경을 만들어.”

끝이 갈라진 목소리가 감정적 동요를 알리고 있었다. 내내 무감하던 어조와 대비되는 목소리가 더더욱 공포심을 부추겼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화가 난 것이다.

고작 그 시녀 하나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늘 시큰둥하던 표정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던 사생아 새끼의 민낯을 이런 상황에서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스가 사색이 되어 몸을 덜덜 떨었다.

“안 돼… 안 돼…!”

허공에 파닥거리던 팔을 뒤틀어 가까스로 아이작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작은 기꺼이 붙잡힌 채 무기질적인 눈으로 막스를 쳐다보았다.

마치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이 미친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입을 벙긋거리며 꺽꺽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지그시 그를 응시하고 있던 아이작이 들릴 듯 말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풀며,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작별을 고했다.

“잘 가.”

휘청거릴 새도 없이 막스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복형의 비명을 귀에 담으며 아이작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새벽 어스름이 물러난 자리를 하얀빛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창연한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내내 묵혀 둔 답답함이 일시에 해소되는 느낌을 받고 서글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인기척이 들렸다 다시 사라지고,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에 달리아가 누워 있었다.

깬 것도 같고 다시 잠이 든 것도 같았다.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의식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이 내내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와 너무 닮아서,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푸른 어둠으로 둘러싸인 방은 처음 잠이 들었을 때보다 훨씬 어둡고 고요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는지 눈꺼풀이 유난히 무거웠다. 탁한 망막을 조금 더 맑게 하기 위해서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조금 더 맑아지고 사물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허공을 쫓던 달리아가 문득 눈꺼풀의 움직임을 멈추고 힘겹게 옆을 응시했다.

희게 산란하는 달빛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일까 의아하던 찰나 익숙한 체취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다소 야성적이면서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우드 향과 겨울 평야를 응축해 놓은 듯한 바람 내음.

달리아는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물었다.

“도련님…?”

그림자가 웅크려있던 몸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얼굴이 이내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아이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지 아닌지 모호한 미소를 떠올렸다.

달리아도 그를 따라 슬쩍 입매를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무척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낯설었다.

이불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기어 달리아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손이 움직이자 살짝 비릿한 냄새가 그에게서 풍겨 나오던 체향을 밀어내며 후각을 교란했다.

무슨 냄새지.

어딘가… 익숙한 냄새.

“이것도 잠꼬대야? 아니면… 정말 깬 거야?”

달리아는 뭔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묵직하게 머리를 누르고 있던 열이 눈을 타고 내려와 기력을 모두 앗아갔다. 입을 떼기가 힘들어 그저 조용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작은 그를 잠꼬대라 인식했는지 피식 웃기만 했다. 왠지 피로해 보이는 미소였다.

“우리 결혼할까?”

힘없는 어조로 툭, 내뱉은 말은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말장난 같았다.

아이작은 붙잡은 손의 각도를 바꿔 엄지로 달리아의 손등을 연신 쓸었다. 손등 위로 볼록 튀어나온 지저분한 상흔이 손가락에 눌려 자취를 감췄다.

“결혼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달리아에게 다 줘 버리면 어떨까 싶어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

“다들 그렇게 좋다 좋다 하면서 하도 욕심내니까 나도 조금 궁금해졌어. 공작 한 번 돼 볼까. 달리아도 이르미나처럼 공작 부인 한번 해 볼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공작이고 공작 부인이고, 어디 빵 가게 일용직도 아닌데 할까 말까 말하는 그가 우스웠다. 달리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가물어지는 눈을 바로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거 되면, 더 이상 이렇게 상처 날 일 없어.”

손등의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분주했다.

“…더 이상 돈 때문에 일하지 않아도 돼.”

상처를 내려다보며 아이작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울적해하는 표정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일할 필요 없어. 동생도 구빈원에서 데리고 나오자. 걸레질도 할 필요 없고 청소도… 꽃도 팔 필요 없어. 달리아는 그냥 곁에만 있으면 돼.”

찌푸린 미간이 펴지더니, 어두운 눈동자에 오묘한 이채가 서렸다.

“…그래. 내 곁에서. 달리아는, 르네가 그렇게 욕심내던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그 여자가 그렇게 목매던 공작 부인 말이야.

흘리듯 말하며 아이작이 조금 웃었다. 아이작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그리고 나는’ 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고귀하게 떠받들던 직위에 올라서는 거야. 그래… 절대 못 한다고… 나는 안된다고 다들 지껄이던 그 공작위. 공작이 되면 다들 어떤 표정으로 날 대할지 벌써 궁금해지네. 그러면 달리아 너한테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시무룩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아이작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달리아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그의 기분이 매우 즐거워 보여 달리아도 기분 좋았다. 말만 들어도 즐거운 상상, 즐거운 꿈이었다. 달리아는 멍하니 그의 말을 주워 담으며 반쯤 감은 눈꺼풀을 완전히 닫았다.

도련님이 공작님이고, 내가 공작 부인…

꿈인데 굳이 이렇게 구체적일 필요가 있을까? 그냥 단순하게 왕자랑 공주가 더 좋지 않을까.

공작 부인… 마님을 보면 공작 부인 같은 거 하기 싫던데…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그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맞장구치며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점점 힘이 빠져나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다정한 문장을 자장가 삼아 달리아는 다시 심연 속으로 의식을 흘려보냈다.

* * *

침대에 상체를 숙인 채 가만히 달리아의 체향을 음미하던 아이작은 자신도 함께 나른한 기분에 침잠될 것만 같아 뒤늦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은 잠들 때가 아니었다. 막스의 시신을 수습하기 전에 다른 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아이작은 카를라의 방을 나와 그대로 안쪽에 위치한 공작의 방을 향해 걸었다.

“오셨습니까.”

문 앞에서 비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후버가 아이작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함께 있던 비서도 긴장한 얼굴로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비서의 얼굴에서 음울한 죄책감을 읽어낸 아이작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각하께서는?”

“…예정대로 처리했습니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송구하다는 듯 비서가 어깨를 움츠리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이작은 흡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달리아가 손수 만들어 준 손수건에는 올리브 잎과 그의 이니셜이 수 놓여 있었다. 어딘가 그녀의 향기가 묻어나는 기분에 입꼬리가 저절로 들렸다.

아이작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누른 채 방문을 열었다.

연기가 빠져나간 방 안에는 옅은 풀냄새와 꽃향기가 은은하게 남아 약초를 태운 흔적을 알리고 있었다. 꼼꼼히 방을 살핀 아이작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각하.”

반쯤 장막이 가려진 침대에 게헤른이 누워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보고 싶지도 않아 아이작은 그대로 서서 말을 고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막스가 죽었습니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접어 다시 포켓에 집어넣었다. 코끝에 스미는 죽음의 향취가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제가 죽였어요.”

손을 펴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하얀 장갑이 티끌 하나 없이 그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피에 젖은 장갑은 막스와 함께 망루에 버리고 왔다. 미련도 망설임도 함께 던져버렸다. 살인을 고하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아버지도 함께 보내드렸으니까… 막스도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겠지요.”

미동조차 없는 게헤른을 내려다본다. 약에 취해 잠든 듯 세상을 떠나버린 자신의 아버지를.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약초를 어렵게 구해 그를 죽였다. 아이작으로서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아, 그렇지. 르네도 만날 수 있겠네요. 그 여자가 저세상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버지를 만나면 만나자마자 제 욕부터 하지 않을까요.”

아이작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차분하게 고해를 이어갔다.

“그 여자도 제가 죽였거든요.”

묵직한 살을 가르며 하염없이 안을 파고드는 칼날의 느낌.

그 느낌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손에 남아있었다. 아이작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진작에 죽이면 됐을 텐데 왜 그렇게 참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여자 진짜 최악이었는데. 형도 나도 매일 죽을 만큼 때리고.”

차라리 죽이면 좋았을걸.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사람을 피 말리게 했다. 그 여자가 남긴 구타의 흔적은 아직도 형의 몸에 남아있었다.

엄마는 무슨… 미친 여자였다.

“그 여자도 이상하지만 아버지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예요. 원래 부모들은 다 그런가요?”

고개를 돌려 하얀 천이 드리워진 게헤른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버지도 나한테 관심 없었잖아요. 상냥한 척, 다정한 척하면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왜 나한테서 계속 르네를 찾아?”

기분 더럽게.

중얼거리며 아이작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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