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이 다가와 막스의 머리카락을 슬슬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이어지는 말은 조롱기가 다분했다.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이야. 이래서야 왜 가신들이 다음 후계를 걱정했는지 알겠어. 판을 하나도 읽지 못하는구나, 막스.”
아이작은 뒷짐을 진 채 피로한 눈으로 시선을 쏟아냈다.
“적자니 가신이니… 상황을 이해타산적으로만 생각하니 답이 안 나오는 거야.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 봐.”
느린 걸음으로 망루를 오가던 아이작이 난간 위에 놓인 가죽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막스에 앞에 서서 시큰둥한 얼굴로 꾸러미를 보다가, 느릿하게 꾸러미를 풀어 막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한쪽 무릎을 꿇어 막스와 시선을 맞춘 아이작이 손을 내려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헉…”
단검이었다.
두 뼘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짧고 투박한 단검.
예리한 날을 꼼꼼히 살피던 아이작이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을 빙글 돌려 그대로 단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카강, 소리와 함께 돌 틈새에 패인 홈으로 단검이 꽂혔다.
“히익…!”
신음을 흘리며 막스가 뒤로 물러서려던 찰나 후버가 막스의 등을 무릎으로 내리쳤다. 공포로 덜덜 떠는 막스의 눈앞에서 콱, 카칵, 소리와 함께 다섯 개의 단검이 바닥에 꽂혔다.
“내가 너를 왜 끌고 왔을까.”
바닥에 꽂힌 단검 끝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아이작이 물음을 던졌다.
막스는 입술을 깨문 채 빠르게 도리질 쳤다. 워낙 견원지간이었으니 끌고 올 이유가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꼽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막상 해코지를 당한다 생각하니 어떤 말도 쉬이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보다 너를 더 잘 알거든. 네 주변 일도 전부 알고 있어.”
아이작은 눈에 새길 듯 뚫어져라 막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막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묻는 말에 대답해.”
“……무, 무무, 무슨.”
“육 년 전. 이만큼… 어깨까지 오는 갈색 단발에 동부 사투리를 쓰는 하녀가 한 명 있었는데. 기억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맥락을 짚을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는 턱을 움직여 모른다 대답하려 했지만 아이작이 검 손잡이를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이 소름 끼쳐서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기억 안 나?”
“……기, 기억… 못해. 몰라. 내가 어떻게 알…”
“알아야지.”
장난스레 검 손잡이를 지분거리던 손이 덥썩, 단검을 움켜쥔 채로 허공에 들렸다.
“네 애를 가진 여자인데, 이름도 모르면 어떻게 해.”
아이작은 막스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대로 단검을 오른 허벅지에 찔러넣었다.
“아아아악-!!”
쑤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찔린 틈새로 피가 울컥 쏟아져나왔다.
“크흡…! 끄…! 무, 헉, 무슨 짓…!”
근육이 찢기는 아픔에 그대로 혼절할 것만 같았다. 막스는 애벌레처럼 사지를 비틀며 절규했다. 그러나 쩌렁쩌렁한 외침에도 누구 하나 달려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작은 줄줄 흐르는 피를 흥미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조앤 브릴리. 그 여자 이름이야. 네가 갖고 놀다 버린 여자.”
돌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단검이 아이작의 손에 들렸다. 막스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 같지 않은 신음을 흘렸다.
“그럼 오 년 전. 어두운 금발에 너처럼 파란 눈을 가진 하녀. 그 여자는 기억해?”
“모, 모모몰라! 내가 어떻, 하지 마! 하지…! 아아아악!”
푸욱, 왼쪽 허벅지에 방금 전보다 더 깊이 단검이 꽂혔다.
막스는 핏대를 잔뜩 세운 채 그만하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작은 파랗게 핏줄이 선 막스의 목덜미를 응시하며 단검 손잡이를 지분거렸다.
“벨라 맥도웰. 그래도 벨라는 조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아서 다행이지. 아이는 다섯 달도 못 채우고 사산했지만 벨라는 결혼해서 잘 사는 모양이야. 그나마 다행이지?”
세 번째, 중얼거리며 아이작이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막스는 더이상 그만하라 소리지를 힘도 내지 못한 채 흐끅거리며 고개만 저어댔다.
머리채를 붙잡고 있던 후버가 결박해둔 손을 풀고 막스의 뒷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이작은 허우적거리는 오른손을 낚아채 바닥에 내려놓고 단검을 든 손을 치켜 올렸다.
“삼 년 전. 네가 죽인 애.”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막스가 죽인 애라는 말에 경기 일으키듯 상체를 떨며 외쳤다.
“마야! 마야 오브릭! 마야 오브릭이잖아!”
“이건 잘 아네.”
잘했다는 듯 싱긋 웃고서, 아이작이 손등 위로 단검을 내리꽂았다.
“끄으으윽-!!”
부글거리며 시뻘건 피거품이 손등을 적셨다. 침을 질질 흘리며 울음을 터트린 막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왜…! 헉, 허어, 왜…!”
“…마야는 이미 죽었잖아. 그것도 막스 네가 직접 죽였지. 이 정도 아픈 걸로 엄살 부리지 마. 마야는 더 아팠을걸.”
“개새끼! 이, 허억…! 개 같은 새끼!”
“그럼 마지막.”
단검 끝의 폼멜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작이 막스의 턱을 억세게 붙들었다. 허벅지에서 튄 피가 표정 없는 하얀 뺨을 붉게 적셨다.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맞추며, 막스가 끊임없이 욕을 짓씹었다.
“죽어! 개새끼…! 크, 하악, 미친 새끼…!”
아이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을 휘적거리던 손목을 붙잡아 바닥에 눌렀다. 찌를 자리를 가늠하듯이 손등을 훑으며, 여상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저택을 떠난 사람인데. 붉은 머리에 주근깨 많은 여자. 기억해?”
붉은 머리라는 말에 막스가 몸을 들썩이며 흥분했다. 분명, 이름을 물었었다.
“알아! 안다고! 알아!”
“누군지 알아?”
“알아…! 디… 에… 디에나! 디에나야!”
무감하던 얼굴 위로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아이작은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손목을 붙든 손에 힘을 가했다.
“틀렸어.”
박혀 있던 단검이 크극, 소리와 함께 검날을 드러냈다. 여명에 비친 반사광이 막스의 눈에 채 닿기도 전에 단검이 손을 꿰뚫었다.
“끄흐으으-!”
“에디나 작스야. 그런 것도 기억 못 해서 어떻게 살아?”
“미친… 크흑, 미친놈…! 나한테 왜 이래! 왜 이러냐고-!”
“여태까지 얘기 듣고도 모르겠어? 복수하는 거잖아.”
“복수를 왜! 그년들이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 이 미친, 큽, 미친 새끼야!”
사방에 침을 튀겨가며 막스가 고함을 질렀다. 아이작은 작게 숨을 내쉰 뒤 연신 꿈틀대는 막스의 멱살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상관있지. 너한테 억울하게 죽은 마야 빼고 다른 여자들이 가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래도 모르겠어?”
“그딴 걸, 허억…! 내가 어떻게 알아!”
“전부 애를 배고 있었잖아.”
형형한 안광이 섬뜩한 빛으로 막스를 쏘아보았다. 아이작은 바닥을 기는 듯이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부 사생아였어. 나 같은 애들.”
입을 둥글게 벌린 채 부들부들 떨던 막스가 끄으으, 신음과 함께 눈을 꿈벅였다.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에 시선을 못 박은 채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입술에 튄 막스의 피가 영 거슬렸다. 아이작은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미간을 찡그리며 침을 삼켰다.
아무 맛도 없었지만, 막스의 피라고 생각하니 조금 더럽게 느껴져 뱉을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뭐… 그냥, 열 받아서.”
까만 가죽 장갑과 소맷자락이 피에 젖어 무겁게 액체를 떨구고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이라 딱히 핏자국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뚝뚝 떨어지는 게 영 거추장스러웠다. 아이작은 소매를 털어 피를 떨궈냈다.
“열 받아서 끌고 오라고 했어. 너 같은 놈이야 별생각 없이 싸지르고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렇게 태어난 애들은 태어난 것만으로도 욕먹거든. 그렇게 사는 것도 짜증 나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죽으면 얼마나 기분이 거지 같겠어.”
“고작, 고작 그딴 이유로…!”
“고작?”
아이작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눈을 내려 막스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시점에서 아이작이 손등에 박혀 있던 단검을 발로 후려쳤다.
“끄흐으윽!”
“우리한테는 지옥이었는데 너한테는 그게 고작이구나. 하긴 뭐… 겪지 않으면 모르지.”
허벅지와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돌 틈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막스는 꿰뚫린 손등을 쳐다보다가 이내 바닥에 꽂힌 마지막 단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하녀를 함부로 안은 건 에디나가 마지막이었다. 저택이 어수선해서 여자를 안을 마음도 들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남은 저 단검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달리아 벨로흐. 그 계집뿐.
“아. 이거. 혹시 신경 쓰여?”
불안한 마음으로 흘깃 시선을 들자 아이작 또한 단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토해냈다.
“후회할 짓 하지 마! 너 이대로… 무사할 것 같아? 이미, 크… 하아, 여기서, 여기서 멈추면 목숨 정도는…!”
“살려 주게?”
아이작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여 물었다. 뿌득, 이를 갈던 막스는 당장이라도 이 단검을 뽑아 목을 따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 여기서 멈추면 선처해 주지! 충동에 못 이겨 한 짓이라 여겨 너를,”
“그럴 필요 없어, 막스.”
“용서해… 허억!”
차갑고 습한 손이 막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에 스며든 핏물이 덜덜 떨리는 막스의 목덜미를 붉게 물들였다.
아이작은 한 손으로 막스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망루를 향해 걸었다.
막스가 사색이 되어 온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허우적대는 막스의 하체 아래로 붉은 길이 생겨났다. 하얗게 질린 막스의 얼굴이 점점 푸르게 변해갔다.
“이 미친! 어디, 어디 가는 거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가 전신에 퍼져나갔다. 힘껏 몸부림쳐도 아이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을 옥죄는 손에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막스는 켁켁 거리며 힘없이 끌려가기만 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망루 끝에 멈춰선 아이작이 손을 움직여 억지로 아래를 내려다보게 했다. 까마득하게 높은 종탑 아래로 너른 풀밭이 보였다.
떨어지면 바로 죽을 것이다.
평소였다면 평화로운 풍경이라 여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끔찍한 나락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휘잉,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나부꼈다.
“널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우악스레 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과 달리 이어진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다.
“네 자리를 뺏는 것도 어렵지 않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 참았어. 난 의무도 돈도 모두 적당한 게 좋거든. 그런데… 네가 그 애를 건드려서.”
스치듯 깊은 날숨과 함께 비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달리아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