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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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선뜩한 위화감을 느끼며 막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소파에 기대 선잠이 들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어느새 창밖을 보니 새벽을 지나 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단단히 벼를 생각으로 밤늦게까지 아이작을 기다렸건만. 시종이 찾아와 깨우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그놈이 귀가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회담은 어제 끝났고, 아이작이 도착하기로 한 건 오늘 오후였다. 중간에 다른 볼일이 있다 쳐도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쩐지 이상한데.”

미간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점점 또렷해지는 의식 사이로 고민거리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이작도 이상하지만, 요즘 저택을 둘러싼 분위기도 수상쩍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택을 호위하던 위병의 반 이상이 못 보던 얼굴로 교체되었다. 졸업식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유독 새로운 얼굴이 많다 느끼기는 했지만 요 한두 달간 사이에 정말 많은 위병들이 잘리고 새로 교체되었다.

집사의 말로는 농민 개혁으로 시골로 돌아간 이들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후계 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 굳이 위병을 바꾼 이유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작이 병석에 누운 직후,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비서와 보좌진들이 나타나 아이작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가신들은 진작부터 공작이 키우고 있던 인재들이라며 별일 아니라고 넘어갔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이작의 수족처럼 구는 그들이 막스로서는 영 꺼림칙했다.

“…흠.”

아니지. 그놈 때문에 나도 예민해진 건가.

생각해 보면 집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 공작이 오늘내일하는 지금, 가신들의 분위기도 안 좋은 상태에서 경호에 힘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위병들은 원래부터 보안을 이유로 주기적으로 새로 고용하기는 했다.

비서도 그랬다. 오브릭 자작이 일선 가신으로 군림할 때에는 저택의 보좌진 전부가 자작과 연이 있는 인간들뿐이었다.

현재 보좌진이 아이작을 받드는 건 짜증 났지만 지금 와서 오브릭 자작 놈의 끄나풀이 본관을 드나든다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그놈이나 저놈이나 다 짜증 나는 놈들 뿐이군.”

침음을 갈무리하며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크리스털 잔에 담긴 갈색 액체가 손짓에 따라 찰랑이며 빛을 뿜어냈다.

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막스가 비웃음을 머금고서 잔을 기울였다. 바닐라 향이 물씬 풍기는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술을 음미하며 아이작에 대해 다시 골몰했다. 이 시간까지 안 왔다는 건,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거 아닐까.

“오는 길에 기차사고라도 나서 뒈졌으면 좋겠네.”

안 그래도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알아서 뒈졌으면.

아이작을 떠올리니 저절로 오브릭 자작이 지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편지를 들이민 채 해명하라는 모습, 경멸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가신들의 표정과 충격에 앓아누운 공작부인까지.

모든 게 거지 같았다. 모두 아이작 그 개새끼 때문이었다.

술 때문인 건지 화가 나서 그런 건지 목 안쪽으로부터 홧홧한 열기가 솟아올랐다. 막스는 지그시 눈을 감아 분노를 삼켰다.

“…지금은 성낼 때가 아니지.”

대체 뭐 때문에 카를라가 그 년을 끌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이 돌아오면 그놈 앞에서 그 시녀를 욕보이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물고 빠는 달리아 벨로흐를 그 새끼 앞에서 때리고 겁탈하면, 그 반반한 낯짝이 어떻게 변할까.

늘 초연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놈이 과연 어떤 식으로 무너질지,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치솟았다.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사생아 새끼 때문에 제 성적 취향이 이상하게 변한 모양이었다.

막스는 입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흥분한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카를라고 뭐고 그냥 끌고 올 걸 그랬나.”

시녀의 반반한 얼굴을 떠올리니 영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막스는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술을 들이켰다.

언짢았던 마음이 슬쩍 누그러지고 날이 서 있던 눈매에 나른한 기색이 머물렀다. 막스는 소파에 목을 기대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발치를 어른거리던 수마에 슬슬 몸을 놓으려고 할 때쯤, 복도로부터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뭐야…?”

퍼뜩 눈을 떠 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고함과 뭔가를 묻는 듯한 목소리가 번갈아 들리더니 곧 거칠게 문이 열렸다.

완전 무장을 한 위병들이 시종들을 제치고 사나운 기색을 드러내며 막스에게 다가왔다.

“뭐야? 너네 뭐야?”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소공작님.”

“대체 무슨…! 뭐냐고 묻잖아!”

위병들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무색투명한 얼굴로 단호하게 막스를 결박했다. 욕을 씹으며 온몸을 다해 저항했지만, 훈련된 위병들의 손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시종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문 앞의 시종들 모두가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외면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를 모셔 온 수석 시종은 아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어디 가는 거야! 지금 어디 가는 거냐고!”

상체를 뒤틀며 악을 쓰자 한쪽 팔을 붙들고 있던 위병이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팔을 붙잡은 손을 아주 세게 거머쥐었다.

위병들이 그를 질질 끌고 가는데도 사용인들과 다른 위병들 모두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분히 눈길을 돌렸다. 투명 인간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막스는 지금 이 사태가 그저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우익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저택 남쪽의 예배당이었다.

대체 무슨… 예배라도 할 셈인가.

위병들이 종탑 위를 오르는 계단에 발을 내딛고서야 막스는 제 추측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없는 종탑을 왜 올라가는지, 대체 누가 이 일을 사주했는지 쉴 새 없이 물음을 던졌지만 역시나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계단 끝에서 자신의 몸보다 거대한 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어둑한 사위로 희끄무레한 여명이 반쯤 내려앉아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아름다움을 느낄 새도 없이 막스는 위병들의 손에 질질 끌려 종탑 끝에 다다랐다.

“모시고 왔습니다.”

위병들이 막스의 어깨를 짓누르며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에 억지로 무릎을 꿇렸다. 그제야 막스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올려다보았다.

종탑 끝, 난간 없이 작게 뚫려있는 망루 위에 누군가 등을 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숲에서 올라온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려 상대가 누구인지 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막스는 눈매를 좁혀 유심히 상대를 관찰했다. 새까만 코트, 같은 색의 정장. 단정하게 올린 까만 머리카락과 유난히 훤칠한 키…

“수고했습니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막스가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박찼다.

“이 개새끼! 너였어! 너였… 윽!”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위병들이 먼저 어깨를 짓눌러 그를 제압했다. 바닥에 무릎이 부딪힌 막스는 얼얼한 통증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지그시 그를 내려다보던 상대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안개가 걷히고 이내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좋은 아침.”

아이작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세운 채 웃는 듯 마는 듯 모호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셔츠부터 타이, 코트, 장갑에 이르기까지 온통 흑색 일변의 차림을 갖춘 아이작은 옷차림 때문인지 다소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야. 안 그래도 슬픈 날인데 비까지 오면 너무 우울하잖아.”

눈이 마주치자 아이작이 슬쩍 눈매를 접었다. 가볍게 손목을 돌리며 흥미로운 눈빛을 던지는 것까지, 모든 행동이 무척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갑자기 끌려와서 놀랐지? 살살 좀 모셔오지 그랬어요.”

타박하는 듯한 말투와 달리 아이작은 나른한 눈으로 위병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언의 눈짓에 위병들이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막스의 뒤편에서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큭…!”

휘청거리는 상체를 간신히 바로 하고서 막스가 힘겹게 목을 뒤로 꺾었다. 그러자 막스의 움직임에 맞춰 머리채를 붙든 남자가 손아귀의 힘을 더 세게 했다.

몸부림치며 시야를 위로 올리자, 붉은 머리카락 아래의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후버의 얼굴이 비쳤다.

“이, 이 새끼…! 놔! 잡역부 주제에 감히 어디에 손을 대!”

“발버둥 치지 마십시오, 소공작님. 괜히 몸부림치다가 다치십니다.”

붉은 머리에 산만 한 덩치를 가진 후버는 아이작이 매음굴에서부터 데리고 온 종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던 비굴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아주 빳빳하게 허리를 세운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평소의 걸걸한 건 어디에 팔아먹은 건지 아주 낮고 그윽한 저음이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이 서로 얽힐 듯 말듯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뇌리를 떠돌았다.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이작이 물어왔다.

“단서를 이렇게 뿌려놨는데 아직도 답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해. 공들인 사람 허무해지게.”

“…무슨… 뜻이야.”

“이상하다고 느낀 거 없었어? 대놓고 티를 냈는데 못 알아채는 것도 재주다 싶네.”

고깝게 여기는 어투에 막스가 지지 않고 비웃음을 흘렸다.

군소리 없이 자신을 끌고 온 위병들, 그를 외면하는 사용인들. 앞선 사건들까지 모두 합치자 결론은 쉽게 나왔다.

“저택 안의 사람들 전부 매수하고, 가신들까지 네 편으로 만들고? 그래서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음. 어떨 것 같아?”

“미친 새끼…! 눈앞에서 알랑거린다고 가신들이 네 편인 줄 알아? 사교계를 나가본 적이 없으니 귀족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며 사는지도 모르겠지!”

“…….”

“너 따위 사생아가 백 명, 천 명 있어도 적자 한 명 못 이기는 게 이 바닥이야! 날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당장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면, 너 같은 거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어!”

“…….”

“그렇게 똑똑한 척 굴 때는 언제고 왜 그렇게 머저리가 됐냐? 내가 다치는 순간 너도 끝장이야!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빠르게 쏘아붙인 막스가 씨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담담한 태도가 거슬려 다시 욕을 뱉었다.

“개 같은 새끼… 오브릭 자작에게 가서 속살거린 것도 너지? 그렇게 부추겨서 뭐 어쩌려고? 고자질하면 오브릭 자작이 네게 뭐라도 준대? 그 늙은이가 너 따위 사생아에게 퍽이나…”

“시끄러우니까 잠깐 닥쳐 봐.”

…방금 뭐라고 했지?

막스가 말을 흐리며 눈을 키웠다. 방금 이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했지?

닥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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