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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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거리는 발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지고, 발소리의 주인이 달리아의 손목을 붙잡아 거세게 침대 밖으로 밀쳐냈다. 

떨어지듯 침대 아래로 내려가 눈꺼풀을 들어 올린 달리아가 뜻밖의 인물을 보고 숨을 멈췄다.

“아가씨…”

보석 박힌 뮬 샌들 위로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막스와 달리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얀 슈미즈 드레스 뒤로 결 좋은 흑발이 우아하게 나부꼈다.

“미쳤어, 막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카를라가 달리아를 막아선 채 차가운 얼굴로 막스를 쏘아보았다.

막스는 급작스레 난입한 누이를 보고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헐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카를라의 앞에 선다.

“미친 건 너 아니야? 갑자기 쳐들어와서 무슨 짓이야.”

“너.”

뒤를 흘깃거린 카를라가 한층 어두운 눈으로 막스를 응시했다.

“이 애 건드리면 아이작과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어져. 후회할 짓 하지 마.”

“지금 그딴 충고 하려고 내 방에 쳐들어온 거야?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알면 더 조심해야지. 홧김에 일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거,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막스가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몇 번이고 말했지.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하라고. 당장이라도 그 돼지 공자 놈한테 팔려 가고 싶어?”

“너…! 말조심해!”

“네가 아버지한테 졸라서 결혼 미룬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자꾸 그렇게 거슬리게 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그 새끼한테 넘겨버릴 거야.”

분한 눈으로 막스를 흘겨보던 카를라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지를 막스에게 집어던졌다. 얼결에 받아든 막스에게 눈짓으로 하체를 가리킨 뒤, 카를라가 옆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너하고 싸우러 온 거 아니야. 지금 분위기를 봐. 그 애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어?”

“그 개새끼가 열 받아 하는 꼴을 볼 수 있겠지.”

“…관둬. 아이작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 너를 걱정하는 거야.”

무슨 헛소리냐는 시선에 카를라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 지금 가신들을 꽉 쥐고 있는 건 네가 아니라 아이작이야. 그 애마저 등 돌리면 안 좋은 여론 막아 줄 사람도 없는 거라고!”

“그 안 좋은 여론을 만든 게 그 개새끼란 말이야!”

“그럼, 그 개새끼가 열 받아서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잘 알겠네.”

막스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애꿎은 옷가지만 쥐락펴락했다. 그 사이, 카를라는 재빨리 달리아의 손목을 붙들고 말을 매듭지었다.

“자극하는 것보다 회유하는 게 나을 수 있어. 약점을 들쑤실 생각 말고 활용할 생각을 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손 놔. 그 계집애 내려놓고 꺼져.”

“그만하고, 머리 좀 식혀.”

음산한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카를라가 달리아를 끌고 방을 나섰다.

뒤편에서 거친 고함과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카를라는 걸음을 재촉하며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달리아를 감쌌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 순식간에 카를라의 방에 도달했다. 카를라는 복도를 순찰하던 위병을 불러세워 소공작이 오거든 절대 들이지 말라 단단히 이르고서 방문을 잠갔다.

드디어 상황 정리가 끝났다. 카를라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살다가 정말 별꼴을 다 보네.”

막스의 헐벗은 나신이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가 않았다. 꼴사나운 모습을 씻어내려 애쓰며 카를라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찡그린 눈매 속에 상체를 끌어안은 채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달리아의 모습이 비쳤다. 가운 사이로 얼핏 드러난 속살도, 부풀어 오른뺨과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한 하관도 모두 가관이었다.

카를라는 한숨을 내쉬며 달리아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곤 하녀를 불러 젖은 수건과 구급약을 갖고 오라 일렀다.

“가만히 있어.”

쓰린 얼굴로 달리아를 내려다보던 카를라가 로브를 벗기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러자 목석처럼 가만히 있던 달리아가 움칠 어깨를 떨더니, 로브 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넋이 나가 있던 얼굴 위로 다시 표정이 서렸다. 미간을 한껏 추어올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던 달리아가 이내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파들파들 떠는 몸이 그녀가 받은 충격을 대신 알리고 있었다.

“아…… 윽, 아아…”

흐느낌 섞인 신음이 저도 모르게 줄줄 흘러나왔다.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텅 빈 뇌리에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이 저택에서, 손익과 상관없이 자신을 포용해 주는 유일한 사람.

“도, 흑, 도련… 아윽……”

도련님을 만나고 싶어.

멀리 있어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데, 떠올려 봤자 아무 소용 없는데. 왜 이런 상황에서 그의 얼굴이 떠오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보고 싶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달리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 별채에서 지내도록 해. 후버가 시중들 테니까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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