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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늘 그렇듯 구빈원으로 휴가를 떠난 달리아는 웬일로 일찌감치 돌아와 아이작을 찾았다.
그녀가 없는 동안 작은 도련님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엎치락뒤치락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달리아는 평소보다 더욱 살뜰히 그를 챙겼다. 그렇게 예정보다 일찍 저택에 돌아온 달리아는 아이작의 손을 붙들고 숲 안쪽의 개울가로 소풍을 갔다.
…꿈속에, 그때의 정경이 펼쳐졌다.
얇은 여름용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가 물기에 젖은 채로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아름다운 여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는 물장구를 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게 전부였지만, 꿈에서 아이작은 그런 그녀를 바위에 눕힌 채 지그시 굽어보고 있었다.
제 팔뚝 안에 담겨 있는 소담한 여체가 흠칫거리며 작게 몸부림을 친다. 불투명한 옷자락 너머, 뽀얀 살결이 은은하게 제 색을 알리고 있었다.
‘도련님…’
유달리 커다란 자신의 손이 허벅지에 엉겨 붙은 드레스 자락을 천천히 들춰 올린다. 누워 있던 달리아는 가슴을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부끄러운 듯 시선을 외면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 그 아래 은근히 떠오른 홍조가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입을 맞추자 늘 그녀의 주변을 떠돌던 오래된 옷감 냄새와 함께 포근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다 이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아쉽게도 입술의 촉감은 꿈이라서 그런 건지 자세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향기에 취해 아이작은 끊임없이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허벅지에 머물러 있던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스타킹마저 없이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가 허리 주변을 스치다가 이내 위로 들리더니 아이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젖은 옷을 쓸다가 굳게 잠겨 있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리 시작했다. 단추가 풀릴수록 숨겨져 있던 살결이 흰빛을 반사하며 그를 현혹했다.
도드라진 분홍빛 살점,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복부, 음영을 그리는 쇄골…
상상만 해 오던 그녀의 속살은 상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이내 알몸이 된 순간, 달리아가 두 손을 뻗어 안아 달라며 그에게 애원했다.
‘도련님… 어서, 어서 빨리…’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었는데.
우습게도 꿈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이기도 했다. 인지한 순간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가 귓가에 스미고 여름 내음이 물씬 풍기던 광경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초연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실상은 그녀를 취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속이 쓰렸다. 아이작은 서류를 내려놓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욕구불만인가.”
몸과 정신은 이미 한참 전에 어른이 되었지만 그녀만 떠올리면 처음 만난 시절의 철부지가 되어버린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지나치게 소중해 본인마저 함부로 손댈 수 없어 이성으로서 어떻게 갈구해야 할지 난처한 것이다.
제 것이라 낙인찍기 위해 쉴 새 없이 괴롭히고 몰아붙이고 싶은 반면, 손대면 부서질까, 어디 하나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때로는 숨결조차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양극에 선 감정은 어느 접점도 없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어떤 식으로 타협해 그녀를 안아야 할지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안고 싶어.
내 걸로 만들고 싶어.
어떤 식으로도 답을 도출해 낼 수 없는 감정.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이어야 했다. 이렇게 떠올리기만 해도 애 닳는 존재가 또 있다고 생각하면 기가 빨려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상상만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상상일 뿐인데.
결론을 내린 순간 벅찬 흥분이 단전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기차에서 내렸는지 모르겠다. 회담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몸을 맡기고서 아이작은 상상의 가지를 조금 더 멀리 뻗어 나갔다.
꿈속의 달리아를 끝없이 재생하며 안고, 입 맞추고, 핥고 빨아댔다. 아홉 번째로 그녀의 안에 자신을 쏟아낸 순간. 짙은 망상에 빠져 있던 아이작을 비서의 목소리가 현실로 끌어당겼다.
“아이작 님.”
몽상의 파편이 눈동자 근처를 어른거리다 먼지처럼 화해 흔적을 감췄다.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은 어느새 별장에 도착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더는 꿈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녀의 곁에 당당히 서기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했다.
회담은 내일이었지만 전초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별장은 낮과 밤을 바꿔놓은 듯 지천에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장에 들어서자 사용인들 모두 깍듯이 고개를 숙여 그를 맞이했다. 비서는 집사로 추정되는 인물과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곧장 아이작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지락탈 후작이 따로 인사를 나누자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거부해야 하지 않겠냐는 어조였다. 유프겐슐트와 지락탈의 관계를 익히 아는 비서로서는 생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이 제때 닿은 모양이지.
“지금 당장 뵙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비서가 당황하며 재차 집사를 향해 뛰어갔다. 집사 또한 놀라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아이작이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까딱이자 빠르게 몸을 돌렸다.
내일 있을 북동부 회담은 네 명의 영주가 참여해 변경 지구에 대한 논의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래봤자 실상 두 명의 영주는 들러리에 불과할 뿐, 북부의 맹주인 유프겐슐트와 동부의 지배자인 지락탈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자리일 터다.
어차피 참석해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것을 알기에 막스는 영주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을 깨고 아이작을 대리로 보냈다. 추밀원 소속의 영주들만이 참석 가능한 이 고매한 자리에, 감히 가문의 사생아를 들이민 것이다.
……아마도.
막스는 지락탈에게 엉망진창으로 모욕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위라도 하려고 했을까. 그렇게 돌아온 뒤, 영주 대리 주제에 감히 지락탈에게 굽신거렸다며 자신의 뺨을 후려칠 예정이었겠지.
과연 그 새대가리 같은 머리통에서 나올 법한 발상이었다.
“들어가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서가 다가와 아이작의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흑색 셔츠를 바탕으로 연회색 예복과 새카만 프록코트. 완벽한 차림의 절정에는 누구든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수려한 얼굴이 있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바로 부르십시오.”
비서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연신 던지며 뒤로 물러섰다. 뭐가 그리 걱정인가 싶어 아이작이 속으로 웃었다.
도박은 싫어하지만 뭔가를 걸어서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체스판 위의 말들이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모색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플랜을 세워놓고 일의 흐름에 따라 플랜을 선택하는 게 아이작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런 사다리 게임의 끝은 늘 성공 하나뿐이었다.
아이작은 눈웃음으로 비서의 염려를 가라앉힌 뒤 유려한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던 남자가 시린 눈길로 아이작을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님.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벽에 걸린 램프가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 적을 탐색하는 금수의 눈빛이 남아 예리한 빛을 발했다.
* * *
밤이 으슥한 시간, 서릿발 같은 한기가 공작 저를 짓눌렀다.
쾅, 부서트릴 것처럼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막스가 살기 띤 얼굴로 밖을 나섰다. 거친 언쟁이 오가던 회의실은 비난 어린 시선만이 싸늘하게 맴돌고 있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어디 경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공허한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시선 위로 퍼져나갔다. 막스는 부릅뜬 눈으로 회의실을 한 번 노려본 다음, 다시 몸을 돌려 성난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둠에 잠긴 저택은 을씨년스럽기는커녕 분주한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내내 은거 중이었던 오브릭 자작의 방문에 공작 부인까지 서둘러 몸단장을 하고 본관에 내려왔다.
“…제기랄.”
한물간 노인네라고 생각한 자작 놈은 한물가기는커녕 주인이 부재중인 헬만의 또 다른 지배자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밤중에 가신들을 몰고 쳐들어와서는, 노망난 헛소리를 지껄여 파국을 이끌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작 놈이 왜, 왜 갑자기 찾아와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거지?
“막스! 얘야!”
공작 부인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빠른 발걸음으로 막스를 뒤따랐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부터 방으로 돌아가라 했건만, 회의실 앞에서 대화를 엿들은 건지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막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지금 대체, 오브릭 경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아니지? 아니잖니?”
“…놓으세요.”
“마야를… 어떻게 네가…… 그럴 리가 없잖니! 네가 뭐가 아쉬워서!”
“놓으라니까!”
거세게 손을 뿌리치며 막스가 공작 부인을 향해 형형한 눈빛을 던졌다.
그조차도 잊어버려 희끄무레해진 기억을 지금 와서 들쑤셔대는데,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든 와중에 공작 부인에게 해명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막스! 막시밀리언!”
외침을 무시하고 도망치듯 발을 박찼다. 등 뒤로 공작 부인의 울음소리가 허망하게 울렸다.
“빌어먹을… 대체, 왜 이제 와서!”
방에 도착하자마자 막스는 의자를 집어 던지는 것으로 내내 참아왔던 울분을 터트렸다. 차마 분이 풀리지 않아 손에 잡히는 물건을 죄다 벽에 내던졌다.
화병이 박살 나며 막스의 눈에 물을 튀겼다. 그게 또 열받아서, 막스는 눈을 꿈뻑거리며 테이블을 들어 침대 근처로 내동댕이쳤다.
처참하게 부서진 나무토막을 쓰린 눈으로 쳐다보며, 막스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년이 뒈진 걸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야! 죽을 때까지 커닝햄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
아이작을 회담지로 쫓아내고 막스는 그놈이 당할 치욕을 상상하며 독재자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누구의 잔소리도 없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그런 평화가 오브릭 자작의 방문으로 순식간에 박살 났다.
‘소공작! 당장 내 딸의 죽음을 해명하길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