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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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은 진중한 얼굴로 눈을 감고서 구슬픈 목소리로 입을 뗐다. 

“소공작이 레이디 오브릭을 내심 흠모하던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그녀를 취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서 그녀를 잡아끌었지만, 이미 레이디 오브릭은 눈을 감은 상태였고…”

쉼표처럼 비통한 숨을 한 번 내뱉고서, 재차 말을 이어갔다.

“소공작은 절대 함구해야 한다며 윽박지르고는, 치부가 드러날 수 없도록 레이디 오브릭의 시신을 절벽에 유기하라 명했습니다.”

자작이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힘겹게 말을 토했다.

“그럼, 네가… 네가 마야를 그 절벽에…”

아이작은 짧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한 뒤 망설이는 손길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시다시피 저 또한 공작가의 그늘 아래 숨을 죽이고 살던 처지였으니만큼 소공작의 명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함구하라는 명도…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이 편지도 그 때문에 계속 간직해두었다가 지금에서야 자작님께 전해드리는 겁니다.”

“…….”

“제게는 진실을 밝힐 힘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말한들 사생아가 정당한 후계를 모함한다는 비난이나 듣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니… 뒤늦게 진실을 고하는 제 기만을 용서해주십시오.”

자작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연신 입가를 쓸어댔다. 비틀거리는 몸을 부축하기 위해 아이작이 손을 뻗은 찰나, 공작이 거세게 손을 후려치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네, 네 놈 짓이야. 모두 네 놈이 꾸민 일이겠지…”

“…자작님.”

“어떻게 소공작이… 막스가, 내 아들처럼 여겨왔던 녀석이 내 딸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어찌 이 충직한 검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자작님.”

아이작은 눈매에 서려 있던 서글픈 눈빛을 씻어내고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왜 현명하신 자작님께서 이 모든 증거를 목전에 두고도, 소공작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시는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는 연민도 뭣도 없이 심문하듯 물끄러미 그를 투영하고 있었다. 무슨 헛소리냐 호통을 내뱉으려던 순간, 아이작이 말을 가로챘다.

“자작님께서는 소공작이 따님을 건드리려는 걸 충분히 예상하셨을 겁니다. 아니… 예상은커녕 대단히 실례지만 아마도 그러기를 바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헛소리를…!”

“자작님께서는 딸이 차기 공작 부인이 되기를 바라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차기 공작 부인.

자신조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타인의 입으로 듣게 되니 소름이 끼쳤다. 자작은 숨을 멈추고 핏발이 선 눈으로 아이작을 마주 보았다.

아이작은 차분하게 시선을 맞받아쳤다.

“자작님은 충직한 가신이 아닌,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외척으로서 유프겐슐트의 옆에 서고 싶으셨던 겁니다. 굳이 싫다는 딸을 공작 부인의 시녀로 저택에 보낸 것도, 돌아오고 싶다는 그녀를 저지한 것도 모두 그런 연유에서 그러신 게 아닙니까.”

아이작은 가슴 한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프록코트 안쪽, 마지막 남은 마야 오브릭의 편지가 손길에 따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작에게 내보이지 않은 마지막 편지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커닝햄에서 왕처럼 살아와서 다들 고만고만하다 생각하실 테지만 공작가는 달라요.

우리 같은 가신들은 친구로도 여기지 않는, 저 하늘 위의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아무 의미 없어요. 공작 부인은 저같이 하찮은 가신가의 딸이 아니라, 또 다른 대영주의 딸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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