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때맞춰 기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치이익, 터빈에서 나오는 수증기 소리와 함께 기차가 멈췄다.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한 손길로 옷깃을 매만졌다. 백여 명가량 수용 가능한 2량 구조의 특설 기차 내에는 아이작과 비서 둘, 호위 넷이 전부였다.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본 아이작은 손을 움직여 호위 한 명에게 자신을 수행하라 이른 뒤 옷자락을 정돈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비서가 들고 있는 서류를 흘깃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스치듯 말을 뱉었다.
“두 시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은 저를 따라 빌파슨으로 가시고, 다른 한 분은 오브릭 자작님과 함께 헬만으로 돌아가십시오.”
“…예?”
“자작님께 공작 저의 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줄 안내인이 필요합니다. 모셔다드리면 나머지는 자작님께서 알아서 정리하실 겁니다. 저를 따라가실 분은 커닝햄 역에서 호위들과 함께 기다리세요.”
“그게 무슨, 자작은 갑자기 왜…? 아이작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뒤, 아이작은 미소 띤 얼굴로 역에 발을 내디뎠다.
* * *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영애의 사망 이후로 내내 사용하지 않았던 장소였지만 응접실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완벽한 건 저택의 관리상태뿐만이 아니었다. 깍듯하게 손님을 모시는 집사,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는 수많은 사용인.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오브릭 자작가의 권세가 죽지 않았다는 척도로 비췄다.
아이작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다가 감흥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개만도 못한 사생아 취급하는 노인이었으니 차 한잔 얻어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괜히 집사를 보냈을까.”
난데없는 방문에 집사는 아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를 안으로 들여도 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나 마야 오브릭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다 말하니 두말없이 그를 응접실로 안내한 뒤 주인에게 달려갔다.
“…어차피 안 올 텐데.”
자작은 오지 않을 것이다.
딸의 이름을 팔아 그의 환심을 사려던 인간은 숱하게 많았을 테니. 공작가의 사생아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며 단호하게 내쫓을 터였다.
그를 증명하듯 응접실에 들어서는 집사의 발걸음이 좀 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미스터 유프겐슐트.”
응접실 창가에서 저택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집사의 호명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이 든 노집사는 미간을 좁힌 채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는데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뵙지 못하겠다는 전언을 내리셨습니다.”
아이작은 서운함을 표하는 대신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집사에게 손을 까딱였다. 그가 다가오자, 아이작이 품속에 손을 넣어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자작님께 전해드리십시오. 답을 주실 때까지 잠시만 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미심쩍은 눈으로 아이작을 쳐다본 집사가 그대로 눈동자를 내려 봉투를 훑었다. 그리고는, 봉투에 쓰인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서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여태껏 유지해 온 고상함은 다 내다 버린 채로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이작은 미소를 지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렇게 이십여 분 후.
집사는 내다 버린 품위를 다시 장착한 채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 뵙고 싶지 않다 전언하셨습니다. 오신 걸음 송구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심이 어떨는지요.”
거절은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는 귀족들의 예법과 달리 자작은 직설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정말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품 안에 손을 넣어 또 다른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이걸 전해드리십시오.”
거절하려던 집사는 편지 봉투에 쓰인 발신인의 이름에 도저히 거부할 생각을 못 하고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건네받았다. 근심 어린 눈으로 봉투를 내려다보던 집사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자취를 감췄다.
적적한 방 안에 뚜벅거리는 발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지겨워져서 아이작은 고개를 쳐들고 천장에 새겨진 문양을 눈으로 덧그렸다.
어떨까.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을까.
아이작은 마지막으로 남은 편지 한 통을 만지작거리며 차분히 다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집사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깊숙이 상체를 숙였다.
“서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 * *
다갈색 계열로 치장된 복도는 주인의 취향을 반영하듯 중후하면서도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무감한 눈으로 복도를 훑던 아이작은 집사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부드러운 미소를 끌어올렸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거든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집사가 문을 열고서 들어가라는 듯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은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우아한 발걸음으로 서재에 들어섰다.
공적인 일에서는 늘 그랬지만, 절대 허점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적군을 아군으로 회유해야 하는 순간이니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노인들은 축적된 경험과 예리한 눈썰미로 논리에 허점이 있으면 손쉽게 파고든다. 다만, 살아온 만큼 감정도 쌓이는지 그에 도취되면 이성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감정은 고조하되, 이성은 배제하는 쪽으로.
아이작은 책상을 등지고 서 있는 노인에게 다가가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문을 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브릭 자작님.”
“무슨 꿍꿍이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노인이라 생각지 못할 만큼 힘 있고 거칠었다. 오브릭 자작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형형한 시선을 쏟아냈다.
붉게 달아오른 눈매가 그의 동요를 알리고 있었다. 구겨진 편지를 어쩌지도 못한 채, 자작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한 번 더 호통을 뱉었다.
“이 편지가 우리 마야의 것이라고 우길 셈이냐? 이와 똑같은 사기꾼이 너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손에 들린 편지에는 자작의 목숨과도 같은 여식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마야 오브릭.
자작의 외동딸이며 아내마저 사별한 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그의 생명, 마야 오브릭.
그가 들고 있는 편지는 마야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유서였다.
“편지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레이디 오브릭 사후, 그녀가 지니고 있던 유품을 빼서 보관하고 있던 겁니다.”
“유품을 네 놈이 왜…!”
“빼내지 않았다면 누군가 찾아내서 불태웠겠지요. 그 누군가는 아마도 소공작일 테고.”
“…….”
“저는 그저 발신인이 자작님인 걸 확인하고 자작님께 전해드리기 위해 빼낸 것뿐입니다. 굳이 편지를 조작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정 의심 가시거든 필적을 조회해 보시면 알 수 있겠지요.”
필적을 조회할 필요 따위 없었다. 유난히 동글동글한 글씨체, 습관처럼 쉼표를 남발하는 서체는 척 봐도 딸이 쓴 게 분명했다. 게다가 편지에 쓰인 내용 중에는 딸과 그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대화들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는, 딸의 편지였다.
편지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작은 일그러진 눈매로 편지를 쏘아보다가 조심스레 책상 위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첫 번째 편지는 막스가 자신을 음흉한 시선을 쳐다보며 따라다닌다는 것과 공작 부인이 그런 태도를 나무라기는커녕 자의식과잉이라며 자신에게 핀잔을 준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편지는, 막스가 자신을 추행했다는 것과 시녀직을 관두고 자작가로 돌아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뭘 말 하고 싶은 거냐.”
공작가의 모두가 한목소리로 사고였다 말했다. 그러나 자작은 이게 사고가 아닌 별채의 사생아가 저지른 살인이라고 여겨왔다.
눈앞의 반질반질한 낯가죽을 뒤집어쓴 더러운 축생이 절벽 아래로 딸을 떠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걸.
“자작님께서는 제가 레이디 오브릭을 음해했다고 생각하셨지요.”
생각을 꿰뚫는 목소리에 자작이 무심코 어깨를 움찔했다. 아이작은 호흡을 고르고 낮은 저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 날… 레이디 오브릭이 사고를 당한 날. 제가 곁에 있었습니다. 살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더군요.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분명…”
자작이 눈을 홉뜬 채 경악스러운 시선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아이작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기다렸다는 듯 거센 호통이 귓가를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국 네 놈이 범인이라는 말이잖느냐!”
“애써 본질을 외면하시려는 건 자작님이십니다. 진정 편지와 제 말을 듣고 추론되는 게 없으십니까.”
“…그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날. 사고가 있던 날 제가 숲에서 목격한 건.”
“말 같잖은 말로 나를 속이려 드는…!”
“소공작이 레이디 오브릭을 겁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붉으락푸르락하던 자작의 얼굴이 일순 새하얗게 질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자작이 입가를 가리며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그날. 제가 아는 경위는 공작 저에서 진술한 내용과 판이합니다.”
그날. 마야는 편지를 보내기 위해 심부름꾼을 불렀다.
공작 저에 대한 험담이 가득 쓰여 있는 편지를 차마 공작 저의 집사에게 맡길 수 없던 그녀는, 굳이 자작가의 심부름꾼에게 편지를 맡기기 위해 정원에 나가 있었다.
그렇게 음습한 밤하늘 아래에서 술에 취한 막스와 마야가 조우했다.
정원 끝까지 쫓아와 자신을 취하려던 막스를 피하기 위해 마야는 인적이 드문 북쪽 숲으로 내달렸다. 차라리 위병들이 있는 정원 쪽으로 도망쳤으면 나았을 것을,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발마저 빠르지 못한 그녀가 막스에게 붙잡히는 건 필연에 가까웠다.
창을 열어 둔 채 독서에 잠겨 있던 아이작은 때아닌 인기척을 느끼고서 조심스레 숲으로 향했다. 그렇게 보름달로 인해 유난히 밝았던 어두운 숲에서, 아이작은 그의 이복형과 마야가 한데 뒤엉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서로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긴 밤이었다.
그렇게 막스는 약점을 내어주었고, 아이작은 복종하는 척 입을 다물고 날을 갈아왔다.
언젠가 진실을 써먹을 날을 기다리며.
그날이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