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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가 달리아를 들먹여 협박해 온 이후, 아이작은 반나절 이상 저택을 떠난 적이 없었다.
막스가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것뿐 굳이 그녀를 취해 자신의 분노를 살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닌 걸 알지만, 육욕이라면 환장하는 놈이 자신을 비운 사이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자리를 비운 이유는 막스에게 역공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촘촘히 설계한 계획이니만큼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야 했다.
대비책은 미리 준비해놨으니 아마 별일은 없겠지만…
놈을 공격하기 위한 일에 달리아가 해를 입는다면 주객전도였다. 막스를 끌어내리는 일은 결국 달리아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달리아가 다친다면,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달리아.”
아이작은 고민을 접고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은근슬쩍 그녀의 배를 끌어당겨 상체를 밀착시키자 달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작은 뺨을 부비며 그녀의 귓가에 은근한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두 달 후에 내 생일인데. 잊어버린 거 아니지?”
성인이 되면 함께 떠나자고 한 말, 기억하고 있을까.
…약혼하자는 말, 기억하고 있을까.
기대 없이 물었다. 그리고 역시나, 시시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네요. 곧 도련님 생일… 엇, 올해 생일이면, 성년식도 같이 치르는 거 아니에요?”
생일이 지남과 함께 아이작은 성인으로서 독립할 기회를 갖게 된다. 동시에, 가신 작위를 받을 수도 있고 개인 재산을 취득할 수도 있었다.
매년 둘이서 조촐하게 생일을 축하했지만 올해는 다르다. 성년식도 있고, 영주 대리인이자 공작 보좌인 입장이니 이전과는 격이 다른 화려한 생일 파티를 치를 것이다.
어쩐지 서운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달리아는 착잡한 마음으로 억지웃음을 떠올렸다.
“미리 생일 축하드려요, 도련님. 갖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너무 비싼 건 못 사드리지만… 그래도 애써 볼게요.”
“정말?”
“그럼요. 매년 그랬던 것처럼 책 사다 드릴까요? 이제는 읽고 싶으신 것도 거의 없으시겠지만… 책갈피는 어떠세요? 만년필… 이미 좋은 걸 쓰고 계시니 필요 없겠구나. 음, 손수건… 아니면 장갑…”
말이 이어질수록 달리아가 점점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아이작에게는 필요한 게 없었다. 아니, 필요한 게 있더라도 그녀의 봉급으로는 살 수 없는 고급 수제품이 필요할 터였다. 직접 수 놓은 손수건,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장갑 따위는 평소 그가 들고 다니는 물품에 비해 한없이 초라했다.
지난 2년 동안 필사적으로 일해 다다를 수 있는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미 저 창공 위를 훨훨 날고 있었다. 달리아는 그와의 격차가 더 이상 메워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걸 새삼 깨닫고서 울적한 표정을 떠올렸다.
“왜 그래?”
아이작이 의아한 얼굴로 달리아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얼굴만 봐도 알아. 또 혼자 이상한 생각 했지?”
뜨끔한 달리아가 아닌 척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봐 온 만큼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고 있는 아이작이었다. 아이작은 나른한 얼굴로 달리아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 사실… 갖고 싶은 거 있어. 달리아만 선물할 수 있는 거. 이번 생일에는 그거 선물해 줘.”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내려 달리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마를 간지르는 입술의 감촉이 선뜩해, 달리아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게 뭔데요?”
“너.”
“네?”
“달리아, 널 갖고 싶다고.”
낮게 울리는 둔중한 목소리가 감미로운 어조로 고막을 울렸다. 반쯤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야릇한 분위기로 달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를 갖고 싶다.
짧은 침묵 아래에서 서로의 이해가 엇갈렸다.
그녀의 미래를 사고 싶다는 아이작의 의도는 그녀의 몸을 함부로 취하겠다는 뜻으로 변질되어 달리아의 눈을 경악으로 물들게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달리아가 가슴을 누르며 창가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당혹과 수치,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기대감에 젖어 달리아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지금 도련님이 소공작님처럼 나를…
나를 제멋대로 취하고 싶다는.
“그런, 그런 건…!”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데.
그가 자신을 이성으로 여기고 있었다니. 그처럼 예쁘고 고결한 사람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이 불쾌하면서도 오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달리아는 혼곤에 휩싸인 채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아무리 도련님께서 제게 소중한 분이라고 하셔도 그렇게 쉽게 몸을 내어드릴 수는 없어요. 주, 주인의 명에 따라야 하는 게 아랫사람의 본분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화를 내고는 있는데, 이것이 완전한 분노인지 혹은 당황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목소리가 떨렸다. 씩씩대며 말하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완전히 아닌 건 아니지만. 아니… 꼭 그게 전부는 아니고.”
허겁지겁 말을 내뱉던 아이작은 이게 아님을 깨닫고 실수를 무마하려는 듯 작게 헛기침을 뱉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물론 야한 짓 하기 싫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우리 관계가 지금처럼 모호하지 않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했으면 해서.”
아이작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목덜미를 쓸며 머쓱한 얼굴로 말을 삼켰다.
내 연인이 되어 줘.
혹은, 나와 결혼해 줘.
마음속에 담아둔 채 내내 묵혀두었던 황홀한 문장. 그녀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당당한 선포가 크게 울렁이며 목 언저리를 배회했다.
당장이라도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오래도록 너만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영원히 함께하자고.
그러나 난처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문장이 본연의 빛을 잃고 곡해되어 전해질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말을 꺼낼까 말까.
“도련님. 여기 계십니까?”
때마침 비서가 노크와 함께 문을 밀고 들어와 아이작을 찾았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한다는 전언에 달리아는 감정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아이작의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그의 짐을 챙긴 달리아가 시종에게 가방을 건네주고서 아이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도련님.”
달리아는 아직 잔열이 남은 살굿빛 뺨을 슬슬 쓸어내리며 시선을 외면한 채 아이작 앞에 섰다.
머릿속에 막스와 에디나, 못된 제안을 한 도련님이 엉망진창으로 섞였다.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던 달리아는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쳐들고 아이작과 시선을 맞췄다.
“아까 하셨던 말씀… 실수하셨다 믿을게요. 무, 물론 너무…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혈기왕성할 때에는 저도 도와드릴 테니까요.”
“……응?”
“도련님이라면, 괜찮아요. 받아들일 수 있어요. 참아 볼게요.”
결연한 얼굴로 말하며 달리아가 조금 더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가리는 모습에서 내키지 않는다는 본심이 드러났지만 달리아는 괜찮다는 듯 ‘어쩔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죠’ 하며 쾌활하게 말을 매듭지었다.
“참기는, 무슨…”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갔다. 아이작은 입가를 가린 채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곤혹스러운 상태로 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이런 흐름이 된 거지.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각오가 귀엽고 기쁘긴 하지만, 그보다 아쉬운 마음이 컸다. 제대로 고백했다면 이런 이상한 상황이 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다고 쫓기듯 진심을 내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아이작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쉰 다음 씁쓸한 웃음을 띄워 다음을 기약했다.
“각오는 좋은데 답을 잘못 짚었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다녀와서 제대로 고백할 테니까… 좋아해, 달리아.”
아이작은 달리아의 뺨에 스치듯 입을 맞춘 후 ‘갔다 올게’, 작은 속삭임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갔다.
“…다녀오세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인 뒤, 달리아는 뒤늦게 혼자 남은 걸 깨닫고서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렸다.
작별 인사 바로 직전, 좋아한다는 말이 이명처럼 귓가에 남아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 * *
역을 출발해 복잡한 시가지를 지나자 드넓은 평야가 차창을 가득 채웠다.
회담이 있는 빌파슨까지는 기차로 여섯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아이작은 회담지로 곧장 가지 않고 중간에 다른 곳에 들를 예정이었다.
지루한 눈으로 서류를 훑고 있으니 마침 차장이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미스터 유프겐슐트. 곧 말씀하셨던 간이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슬슬 채비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속한 철도 회사의 최대 주주를 향해 차장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의사를 물었다. 아이작은 눈을 깜빡여 알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비서진들을 향해 고갯짓으로 펼쳐둔 서류를 정리하라 일렀다.
비서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와중에도 예정에 없던 일에 의아함을 표했다.
“아이작 님. 곧장 회담 장소로 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중간에 커닝햄에 잠시 들렀다 갈 겁니다. 오브릭 자작께 용건이 있습니다.”
“예?”
오브릭 자작이라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작의 오른팔이었지만 딸이 죽은 후 폐인이 되어 더 이상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은거 덕분에 늙은 가신들의 세력이 주춤했고, 뉴엣 백작이 구세대들을 밀어내고 공작의 옆을 차지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자작을 만나려 하십니까?”
뉴엣 백작의 힘을 등에 업고서 날아오른 아이작에게는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는 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브릭 자작은 전부터 공작의 사생아인 아이작을 영 탐탁지 않게 여겨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아이작과는 적대 관계에 가까운 인물을 왜 만나려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작은 아이작님을 마뜩잖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방문을 거절할 겁니다.”
“걱정 감사합니다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아이작은 다 이해한다는 듯 모호한 웃음을 띤 채 말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