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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시 낭떠러지 아래를 굽어보던 아이작이 배회하듯 주변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낭떠러지 바로 직전에 덤불이 우거져있어 까딱 잘못하다가는 떨어지기 십상인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주변에는 추모의 상징인 하얀 리본이 나뭇가지에 묶여 똑, 똑, 빗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아이작은 비에 젖은 잎새를 손으로 쓸다가 낭떠러지 옆에 세워진 추모비로 시선을 돌렸다. 까만 대리석 묘비 위에 새겨진 이름이 비에 젖어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죽으면 어떤 기분이야, 레이디 오브릭?”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손으로 더듬으며 아이작이 물었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적막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은 아이작이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거지 같겠지. 나도 죽을 용기까지 내지는 못하겠더라.”
자조 섞인 속삭임이 빗소리에 묻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축축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새카만 속눈썹 끝에 떨어질 듯 말듯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투둑, 망막을 스쳐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어떻게 할까.
……무너뜨릴까.
망가지기 전에 망가트려 버릴까.
“너도 만족스러울 거야.”
비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그럴 거라며 속삭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음각된 글자를 손에 새길 듯 하나하나 세심히 더듬어가던 아이작은 피로한 눈으로 비석을 힐긋 쳐다본 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먼저 공격을 감행한 사람은 막스였다. 역린을 건드린 건, 막스였다.
생각만 해도 애달파서 감히 함부로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제 것을 천박한 말로 매도하고 협박을 일삼은 것도 그였다.
“…어쩔 수 없어.”
여태 뉴엣 백작에게 그렇게 공들였는데…
아쉽지만 오브릭 자작으로 방향을 선회해야겠어.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웃음이 피어났다. 숲을 울리는 빗소리 틈새로, 희미한 웃음소리가 섞여 낭떠러지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 * *
저택에 펼쳐진 기이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건, 늘 그렇듯 사용인들이었다.
방에 처박혀 술과 여자에 취해 있던 막스가 어느 순간부터 위세 좋게 주인 행세를 하며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막스를 위축시켰던 아이작이 그늘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보필에 힘썼다.
경쟁 구도로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저택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이상하다 여길 틈이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우익관에서 은거 중이던 공작 부인이 번지르르한 얼굴로 나와 저택을 호령하고, 사용인들은 변덕이 죽 끓는 모자의 명을 이행하느라 밤낮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달리아만은 분위기를 느낄 새도 없이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전담 시녀의 직무는 하녀와 격이 달랐다. 외부 일에 정신없어 늘 자리를 비우는 아이작을 대신해 서재에 오도카니 앉아 그를 기다리는 게 달리아의 유일한 일거리였다.
책을 읽고, 바느질감을 갖고 와 동료들과 동생에게 보낼 옷을 잣는.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가 여섯 시 무렵이 되면 사용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기숙사에서 쉬는 게 그녀의 일과였다.
혼자만 한가하니 기숙사에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괜히 눈치가 보여 식당 일을 돕거나 다른 하녀들이 쌓아 둔 빨래를 대신 해 주기도 했다.
오늘도 그렇게 일찍 기숙사에 들어와 요하나와 엘라의 앞치마를 꿰매는 중이었다.
“에디나. 이제 일 끝난 거야?”
추욱 늘어진 어깨로 방에 들어선 에디나를 보고 달리아가 밝은 어조로 말을 걸었다. 에디나는 앞치마와 헤드 캡을 침대에 던진 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아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너무 힘드네.”
웅얼대는 목소리가 피로에 가득 절어 있었다. 달리아는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디나를 바라보았다.
“요즘 계속 속 안 좋다더니, 그것 때문에 그래?”
“응. 엊그제 감자 먹고 체한 이후부터 계속 이러네. 속에 뭐가 들어가면 울렁거려서 도저히 못 먹겠어.”
“그래도 뭘 좀 먹어야 힘을 내지. 수프라도 받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니, 달리아! 괜찮아!”
일어서려는 달리아를 만류하며 에디나가 몸을 일으켰다.
“뭐 갖고 와도 어차피 못 먹어. 그냥 잠이나 잘래.”
“너 요새 얼굴이 얼마나 안 좋은 줄 알아? 이렇게 까칠해져서는…”
달리아가 에디나의 곁에 앉아 까슬해진 뺨을 어루만졌다.
주근깨가 소복이 내려앉은 뺨에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가만히 달리아를 올려다보던 에디나가 홱 고개를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잠이나 자자.”
“벌써 자려고?”
“……응. 피곤해. 달리아, 너도 일찍 자.”
작업용 드레스도 벗지 않은 채 에디나가 이불을 들춰 올려 몸을 감쌌다. 에디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벽에 시선을 둔 채 ‘잘 자’, 흘리듯 인사를 내뱉고 눈을 감았다.
망연히 서 있던 달리아가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바느질감을 치우고 램프를 껐다. 바스락거리며 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너도 잘자’, 상냥한 인사가 에디나의 귓가를 스쳤다. 에디나는 감은 눈에 질끈 힘을 주어 빨리 잠이 들기를 온 힘을 다해 기원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새근대는 숨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평소에도 쉽게 잠드는 만큼, 달리아는 오늘도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달리아. 자?”
“…….”
“…진짜 자는 거지?”
규칙적인 숨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에디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이불을 아래로 밀어냈다.
달리아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었다. 이불 아래 빼꼼 튀어나와 있는 발이 썩 쓸쓸해 보여, 에디나는 손을 뻗어 이불을 쭈욱 끌어당겨 발을 덮어 주었다. 얼마나 곤히 잠든 건지 달리아는 찡그리는 것 하나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색색 숨만 뱉었다.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에디나가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움직여 웅크려있던 달리아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따스한 체온이 찬기가 서린 손을 미지근하게 데워주었다. 동시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고백이 목구멍 언저리를 빙빙 맴돌았다.
에디나는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달싹여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미안해, 달리아.”
나 있잖아. 소공작님께 너를 팔았어.
친구인데도. 가장 친한 친구인데도 그거 하나 못 견뎌서 너를 팔았어.
죽을 것 같아서… 정말로. 나를 죽일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너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분명 너도……
“……아니, 아니야…”
달리아는 안 그랬겠지.
늘 자신보다 남을 위하는 아이였다. 아픈 동생에게 매년 새 코트를 사서 보내면서 자신은 닳고 닳은 외투에 소매만 수선해 입고 다니는. 시가지에서 들꽃을 파는 아이들에게 꼭 1빌링짜리 동전을 꼬옥 쥐여 주는.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면 그 사람 몫까지 대신 일 하고, 슬픈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동정보다는 그 사람의 부담을 대신 맡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남 탓하며 투덜대기 바쁜 자신과 달리 늘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는, 달리아 벨로흐는 그런 사람이었다.
또다시 눈물이 났다. 에디나는 종아리를 끌어당겨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모든 게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안다. 아무리 변명한들 자신이 달리아를 팔아넘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변태 같은 소공작 놈이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친구를 팔아넘겼다. 달리아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이 끊임없이 날을 갈아 에디나의 심장을 찔렀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고개를 들어 흘깃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순진무구하게 잠든 얼굴을 보니 또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에디나는 소리죽여 흐느끼며 메슥거리는 속을 달랬다. 텅 빈 속 안으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 * *
달리아가 비보를 들은 건 그로부터 보름 후였다.
“에디나가 일을 관뒀다고요?”
사무실 안으로 쩌렁쩌렁한 외침이 퍼졌다. 평소라면 교양있게 행동하라고 잔소리했을 델마 또한 놀란 얼굴로 하녀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미시즈 프라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달리아에게 씁쓸한 눈으로 유감을 표했다.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오늘 새벽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갔단다.”
“어떻게 그런… 저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는걸요?”
몸이 안 좋다던 에디나는 뭐가 못마땅했는지 내내 달리아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먹하게 굴었다. 어제는 일도 안 하고 온종일 기숙사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휴가철도 아닌데 여행 가방이 나와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에 뭐 찾을 게 있나 보다 하고 가볍게 넘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사라질 수가…
“여기 이거, 네게 전해 주라고 부탁한 편지란다.”
미시즈 프라다가 품속에서 하얀 편지 봉투 한 장을 꺼내 달리아에게 내밀었다.
달리아는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옆에 서 있던 델마의 눈총을 받고 슬그머니 봉투를 받아들었다.
“요즘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이상하긴 했는데… 부지런하고 싹싹한 아이라서 평이 좋았잖니. 갑자기 관둔 이유가 뭔지 나도 궁금하구나. 소개장을 써 줄 테니까 이유를 말해 달라고 했는데, 한사코 말할 수 없다고 거부해서…”
다른 저택에 재취업을 위해서는 전 직장의 소개장이 필수였다. 그런데 소개장도 거부하고 나가다니, 다시는 하녀로 취업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혹시 결혼하려고 관둔 걸까?
만나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무슨 정신으로 사무실을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달리아의 뇌리에는 ‘대체 왜?’라는 물음만이 가득 차 있었다.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 멍하니 복도 앞의 창문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관두기 얼마 전부터 몸이 안 좋다고 했잖아.”
텅 빈 복도에 낮은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여태 혼자 있었다고 생각한 달리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사무실에서부터 함께 따라 나온 건지 델마가 바짝 붙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델마는 찌푸린 눈매로 복도를 스윽 둘러보더니 한층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에디나가 최근에 몇 번… 소공작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던데.”
“시중이요?”
무슨 시중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무언가 꺼림칙한 것을 떠올리는 듯 잔뜩 일그러진 델마의 미간을 보고서 달리아는 시중의 뜻이 뭔지 알아챘다.
야간 근무일도 아닌데 내내 기다려도 방에 돌아오지 않은 적이 종종 있었다. 새벽 무렵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끙끙대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만 여겨왔던 것들이 전부 밤 시중의 증거였다면.
“…어떻게. 제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는데요.”
“그런 걸 누구에게 말하겠어. 게다가 친구한테는 더더욱 말하기 힘들었을 테고.”
델마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쩐지… 나한테 이상한 걸 구해달라고 하더라. 블루로제트라고, 약초인데 평소에 먹을 일이 거의 없는 거거든.”
블루로제트라는 말에 달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