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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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대하며 던진 말인데, 아쉽게도 아이작은 요란한 반응 없이 굳게 입을 닫은 채로 막스를 쏘아보기만 했다. 

그러나 막스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평소에는 별별 욕을 지껄여도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던 놈이 지금은 저렇게 자신을 씹어먹을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병신 같은 놈.

똑똑한 척 온갖 거만은 다 떨더니, 고작 하녀 따위에 정신을 팔아?

저러니 핏줄은 못 속이는 거지.

쐐기를 박듯이 막스가 강한 어조로 재차 말을 읊었다.

“들었어? 달리아 벨로흐의 주인은 나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이작이 시선을 돌리며 말을 흘렸다. 굳어 있던 얼굴 위로 은은한 미소가 번져가고 정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듯, 무척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천적에 유달리 예민한 짐승처럼 막스는 날카로운 눈썰미로 그의 미소가 가식이라는 걸 파악해냈다. 기울어져 있던 천칭이 단박에 자신에게로 기우는 걸 느끼며 막스는 승리자의 기쁨을 얼굴 가득 끌어올렸다.

“모른 척하려거든 티 내지를 말던가.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는 아냐?”

“…근거는 하나도 없는데 자기 말이 맞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걸 망상이라고 해. 정신 차려, 막스.”

“망상이든 뭐든 네 맘대로 생각해라. 계속 나불거려 봐. 그 계집년이 내 밑에 깔려 우는 꼴을 보고 싶다면.”

굳게 다물려 있던 아이작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막스는 손을 들어 하얗게 질린 그의 뺨을 툭툭 쳤다. 이복동생의 도발은 더 이상 아무런 상처가 되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니 어지간히 괜찮은 계집애인가 본데. 남이 먹다 버린 건 내 취향 아닌데… 조금 끌리네.”

“……그만해.”

“말버릇이 험한 걸 보니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구나.”

느긋하게 웃으며 막스가 아이작의 뺨을 조금 더 세게 쳤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묵묵히 눈을 내리깔고만 있을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나도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어. 이 자리에서 평생 나한테 충성하겠다 맹세하면 일단은 넘어가 주지.”

“…….”

“왜. 못하겠어?”

아이작은 반쯤 감고 있던 눈꺼풀을 완전히 덮어 시야를 차단했다.

저 능글맞은 표정이 오늘만큼 거슬린 적 있을까.

달리아를 조롱하는 입을 찢고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뜨려버리고 싶었다. 마침 이 넓은 별채에 단둘만 있으니, 죽여서 낭떠러지에 내다 버린 뒤 실족사로 처리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할까.

죽일까.

망막에 깃든 어둠 속으로 처참하게 죽은 막스의 시신이 떠올랐다. 상상만으로도 퍽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나날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이었으니 막스의 죽음은 사고가 아닌 살인으로 비춰질 것이다. 결국 아이작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도주 혹은 붙잡혀 처벌받는 것 두 가지뿐이고, 아이작은 둘 다 싫었다.

달리아를 만날 수 없는 게 싫었다. 그녀가 슬퍼하는 것도 싫었다. 달리아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녀가 함께 도망쳐 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헤른이 방패막이 되어주었을 때가 편했는데.

지금 와서야 아버지의 부재가 아쉽게 느껴졌다. 당장 일어나 이 짜증 나는 상황을 타개해 달라 외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의식이 없는 사람을 살리는 건 신의 영역이었다.

아이작은 티 나지 않게 입 안을 씹으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소중한 것, 달리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금으로서는 굴종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충성한다고… 맹세할게.”

지루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막스가 입가에 조소를 피워올렸다. 바짝 붙어 협박을 일삼을 때는 언제고, 막스는 유쾌한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 바닥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이런 것도 내가 가르쳐야 하냐? 무릎 꿇고 제대로 해야지.”

아이작은 주저 없이 무릎 꿇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쓰린 얼굴로 그를 한 번 본 다음, 침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이복동생의 동작 하나하나가 푸른 눈동자에 또렷이 자취를 남겼다. 비참한 모습이 이어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눈매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엇갈린 희비 속에서, 아이작이 괴로운 숨을 내뱉었다.

“시키는 대로 할게. 뭐든… 거역하지 않을 테니까. 그 애는 건드리지 마.”

바닥을 짚고 있던 손등 위로 그림자가 졌다. 차마 피할 새도 없이 더러운 구둣발이 아이작의 손등을 짓밟기 시작했다.

묵직한 체중이 짓이겨버릴 것처럼 손등을 압박했다. 손을 빼려 하자 내리박듯이 콱, 더욱 세게 손등을 짓밟았다.

신음이 비져나오려던 찰나 소리 내지 말라는 나직한 협박이 이어지고, 아이작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부탁을 하려거든 조금 더 정중해야지, 아이작.”

손을 유린하던 발끝이 아이작의 옆구리를 퍽, 걷어찼다. 아이작은 쓰러지려는 몸에 힘을 줘 간신히 자세를 지탱했다.

“……제발. 건드리지 말아 줘.”

서글픈 호소에 막스가 선처하듯 발을 뗐다. 엎드린 동생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더 이상 비굴한 그늘 따윈 없이 오만한 빛이 가득했다.

“너 하는 거 봐서 참아 주지. 대신 예전처럼 고개 쳐들고 다닐 생각하지 마. 말대꾸했다가는 그 계집애를 안크시에 팔아버릴 줄 알아.”

안크시라는 단어에 아이작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르네의 집이 있던 곳. 과거를 묻었던 그곳. 매음굴로 악명이 자자한 그곳을 떠올리자마자 목구멍 근처로 시큼한 맛이 감돌았다.

토기를 억누르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막스에게 당황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명심할게. 거스르지 않을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한 순간, 막스가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쳐들게 한 뒤 짜악, 뺨을 후려쳤다.

화끈한 감각과 함께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퍼져나갔다. 아이작은 처연한 눈빛으로 용서를 갈구했다. 막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고 이내 다른 쪽 뺨에 짜악, 불이 붙었다.

“착하네, 아이작.”

“…….”

“지금처럼만 하자. 알겠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막스가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을 놨다.

막스는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불쾌한 눈으로 손을 툭툭 털더니, 미련없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탕, 문소리와 함께 드디어 고요가 찾아왔다. 발자취가 사라진 후에도 아이작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이작이 웅크린 몸을 일으켰다. 차게 굳은 팔다리가 작게 경련을 일으켰지만 아이작은 표정 없는 얼굴로 멍하니 서서 막스가 사라진 방문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시 몸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 놓인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누이며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벽에 걸려있던 램프가 까만 눈동자를 노오란 빛으로 물들였다.

노란색.

…아니. 회색……?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모든 사물이 어그러진 모습으로 흐릿한 동공을 비춘다. 신경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마다 느끼는 기묘한 환각.

르네의 집에 버리고 온, 이제는 잊었다 생각한 그 환각이 다시 아이작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안 돼……”

또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아.

제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 온 걸 그가 건드린다 생각하니 손끝이 차게 식었다. 오감이 둔화되는 이 느낌, 색이 색으로 보이지 않고 손에 닿은 것들이 모두 무기물처럼 느껴지는… 이 감각.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모든 소리와 빛을 차단한 채 한없이 작게 몸을 웅크렸다.

봄이 도래한 계절은 추울 리 만무했지만 아이작은 때아닌 추위를 느끼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래도 한기가 가시지 않아 차가워진 손으로 상체를 끌어안았다. 잘게 떨리는 몸뚱이가 제 것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푸른 여명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아이작의 주의를 환기했다. 뜬 눈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비.”

새벽 비가 토독토독 소리를 내며 창을 두드렸다. 옅게 부유하는 빛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시선을 앗아갔다.

언제부터 비가 온 거지.

익숙한 풍경에 천천히 안식이 찾아왔다.

잔뜩 엉겨 있던 마음이 천천히 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내, 탁하게 바래있던 사물들이 제 색을 띠고 아이작의 시야를 비추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가 어스름이 물러나 주변이 완전히 밝아질 때가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별채를 나서자마자 차가운 봄비가 그의 뺨을 두드렸다. 케이프 안으로 스며드는 빗방울이 응축된 감각을 일깨우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박거리는 발소리가 경쾌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우울한 상념을 밝은 추억으로 휘감아 희석시킨다. 점차 나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이작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재생했다.

‘제가 본 달팽이 중에 가장 큰 녀석이에요. 빠르기도 엄청 빨라요. 이렇게 빠른 달팽이는 도련님도 처음 보실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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