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비 온 뒤의 숲이 특유의 싱그러운 풋내로 계절을 알렸다. 아이작은 느리게 깜박거리던 눈에 힘을 줘 지그시 앞을 바라보았다.
사용인 기숙사 1층, 달리아가 있는 방의 창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던 아이작은 관목 아래에 웅크려있다가 불이 꺼진 걸 확인하고서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갔다.
위층에서 내려온 은은한 불빛이 방을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반쯤 가려진 커튼 너머, 침대에 웅크려있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불 밖으로 빼꼼 튀어나와 있던 하얀 발이 두어 번 꼼지락거리더니 이불 안으로 쏙 숨어들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실루엣이 고치처럼 작게 웅크려 들고 몇 번 엎치락뒤치락 하던 몸이 이내 잠잠해졌다.
아이작은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그녀를 훑었다.
“벌써 자네.”
곱게 눈을 감은 얼굴이 유독 평화로워 보였다. 잠든 달리아의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아이작은 쌓여있던 피로가 노곤하게 풀어지는 걸 느끼고 입매를 끌어올렸다.
달리아는 성인이 지났음에도 술도 연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만 열심히 했다. 그 때문인 건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완전히 몸에 배어서, 평소에는 여덟 시만 되어도 피곤한 듯 연신 하품을 해댔다.
지금도 다른 방에는 불이 훤히 켜져 있지만 달리아의 방만 불이 꺼져 있었다. 새삼스레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도 아니고. 아무튼… 귀엽다니까.”
동그란 이마와 섬섬하게 내려앉은 속눈썹, 앙증맞은 코와 살짝 벌린 입술을 차례차례 훑었다. 홀린 듯 예쁜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가녀린 목덜미, 슈미즈 밖으로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작은 쇄골. 그 아래는 이불에 감싸여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멀어지던 시선이 작게 튀어나온 손에서 문득 멈춰 섰다.
이불을 꼬옥 붙든 손등 위에 긴 생채기가 나 있었다. 재작년, 청소를 하다가 넘어져 찢긴 상처였다.
하필이면 아이작이 공작과 함께 자리를 비웠을 때 난 사고였기에 제대로 된 처치를 할 수 없었다. 저택에 돌아와 상처를 발견한 순간, 아이작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무력감을 느꼈다.
내가 좀 더 힘이 있었더라면.
달리아에게 이런 궂은일을 시킬 필요가 없었을 텐데…
“저 흉터는 평생 없어지지 않는 건가.”
시무룩한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가 같지 않았다. 기운차게 찾아온 게 무색하게도 아이작은 울적한 기분으로 창문에서 떨어졌다.
내가 좀 더 힘이 있었더라면…
“…아니. 아니지.”
힘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다.
게헤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사랑하는 여자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패배자였다. 권력을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고 부인 눈치만 보다가 때를 놓쳐버린, 사랑에 빠진 자신에게 자아도취된 망상 병자일 뿐이었다.
아직도 르네가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는. 그러면서 사랑하던 여자의 흔적을 자식에게서 필사적으로 찾기 바쁜.
비참한 제 아비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비웃음이 떠올랐다.
“난 그 인간하고 다르니까.”
정말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다가 잃고 나서 후회하는 삶.
얼마나 바보 같으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걸까. 그런 건 게헤른같은 멍청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었다.
아이작은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았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손에 쥔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었다. 아이작은 잠든 달리아의 손등 위에 아로새겨진 흉터를 힐끗 쳐다본 뒤, 천천히 뒷걸음질해 다시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기숙사의 불빛이 모두 꺼지고 다들 꿈속으로 떠날 때까지.
그때까지만 창가의 문지기가 될게.
“부디 좋은 꿈을 꾸기를, 달리아.”
꿈속에서는 아픈 상처 없이 깨끗한 손으로 꽃을 딸 수 있기를.
꿈속의 세상은 현실보다 더 상냥하기를.
* * *
아이작이 별채에 도착한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잠깐 기숙사에 들른다는 게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늦어 봤자 열 시쯤 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정원을 지키고 있던 위병에게 자정이라는 말을 듣고서 내심 놀랐다.
어쩐지 다리가 저리더라니.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숲길을 가로질렀다.
별채의 은은한 불빛이 그를 반겼다. 좌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별채의 관리를 소홀히 하지 말라 지시했는데, 하녀장이 제 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흐뭇한 심정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 이제 기어들어 와.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인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아이작은 표정 없는 얼굴로 상대를 응시하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막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잘나신 영주 대리께 할 말이 있어서 왔지. 좌익관으로 갔더니 별채로 갔다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실실 웃으며 말을 거는 모양새가 영 꺼림칙했다.
불과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막스는 눈에 거슬리는 건 모두 찢어발겨 버리겠다는 듯한 얼굴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렇게 화가 나면 적어도 사나흘은 패악을 부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막스는 지나치게 여유롭고 유쾌해 보였다.
“둘만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 봐. 너 대체 이러는 저의가 뭐야?”
막스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무감한 얼굴 위로 언뜻 불쾌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서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고 시선에 응수했다.
“무슨 저의?”
“얌전히 별채에 처박혀 살 것이지 왜 갑자기 나서서 집안 분위기 흐리냐고. 보좌는 무슨… 몇 번 의견 내놓은 게 채택됐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아버지 아니었으면 네 의견 따위 귀담아듣는 사람 아무도 없어.”
“덕분에 가당찮게 보좌까지 됐지. 각하께는 감사드리고 있어.”
막스의 눈매가 한층 사나운 빛으로 번뜩였다. 숨결이 서로 엉키고, 아이작은 미간을 좁힌 채 창가로 다가가 거침없이 창문을 열었다.
쓸데없는 기 싸움은 이제 관두고 싶었다. 하루 종일 가신들 앞에서 내숭 떤 것만으로도 정신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기껏 잠든 달리아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는데, 막스의 면상을 마주하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봤자 보좌야. 영주 대리도 내가 하겠다고 말 꺼낸 적 없어. 아무리 내가 애써도 네게 위협이 되는 일은 없어. 소공작은 너야.”
“그걸 내가 몰라서 그래? 널 위협으로 느낀 적 한 번도 없어.”
쉭쉭 대는 목소리로 시비를 걸며 막스가 아이작의 옆으로 손을 뻗었다. 벽을 짚고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듯 협박을 이어갔다.
“난 너 같은 보좌 필요 없어. 가신들이야 배다른 형제가 사이좋게 영지 경영하는 모습에 무슨 환상을 느끼나 본데, 그게 가능하면 사생아를 사생아라고 욕하고 멸시하겠냐. 안 그래? 너 같이 더러운 핏줄을 옆에 둬 본 적이 없으니 환상만 쫒는 거야.”
“……내가 더러워?”
“알면서 물어?”
아이작은 화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 온몸으로 자신을 꺼리는 모습에서 익히 느껴왔는데, 말로 확인사살 하니 기분 나쁘기보다는 역시나 싶어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막스는 표정을 구긴 채 까득 이를 갈았다. 아이작의 웃음이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 느낀 탓이었다.
“너도 곧 성인이지. 성인이 되면 가문에서 너를 책임질 필요도 없어. 원하는 대로 챙겨줄 테니 성인이 되는 즉시 저택을 떠나. 보좌인지 대리인지 개소리 그만하고 내 눈앞에서 꺼져.”
“내가 얼마를 원하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텐데.”
아이작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 경멸이 서렸다.
“……뻔뻔한 새끼. 내 알 바야? 그렇게 돈이 필요하면 네 어미처럼 몸이라도 팔지 그랬냐.”
아이작이 고개를 돌린 채 헛웃음을 터트렸다. 화내라고 한 말에 여유작작한 태도를 이어가는 꼴이, 계속 막스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막스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퍽, 소리 나게 벽을 때렸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계속해보라는 듯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결국, 참다못한 막스가 욕을 읊으며 아이작의 멱살을 낚아챘다.
“개 같은 새끼. 내가 말하는 게 웃겨?”
“당연히 웃기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나가라 마라 해. 소공작, 소공작하고 떠받들어 주니까 진짜 저택의 주인이라도 된 줄 아나 보네.”
“…뭐.”
“정말 머리가 나쁘구나, 막스. 가신들 앞에서 계속 굽실거리니 내가 그냥 시종 나부랭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영주 대리라는 게 뭘 뜻하는 줄 알아?”
꼴같잖은 비아냥이 날아올 줄 알았건만, 귓가를 스친 건 뜬금없이 영주 대리라는 단어였다.
막스의 눈동자가 급히 요동쳤다. 아이작은 그 눈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웃었다.
“지금 헬만은 계엄령이 선포된 거야. 통치자의 부재로 모든 군사권, 사법권, 행정권이 전부 내게 이양된 상태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주도 아레츠헬만. 지금 여기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해?”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붙잡혀 있던 멱살을 확 빼낸 뒤 아이작이 어깨로 막스를 밀쳤다.
구겨진 옷자락을 품위 있는 손길로 툭툭 털어내며, 아이작은 고개를 숙여 막스의 귓가에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반쯤 양보해서 저택의 주인은 너일지 몰라도 땅 주인은 나라고. 쉽게 말하자면, 꺼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란 소리야.”
착 가라앉은 저음이 귓가에 맴돌다 부드럽게 흩어졌다. 협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 말투. 이 조곤조곤한 목소리.
차라리 화를 내며 악다구니를 썼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 속에 담긴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고아한 어조가 꾹꾹 눌러놨던 인내심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막스는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내려보다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협상 따위는 내밀지 않겠다 다짐하며, 사나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땅 주인 행세를 하려거든 마음대로 해 봐. 다만, 그만큼 너도 각오해야 할 거다.”
“설마 정말로 쫓아내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겠어? 막스 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나도…”
“땅은 네 거라 해도 저택의 사용인은 다르지. 사용인들의 고용주는 어디까지나 유프겐슐트거든.”
무슨 소리냐는 듯 아이작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표정 없는 그 얼굴에 파문이 일기를 기도하며, 막스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달리아 벨로흐의 주인은 나라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