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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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커다란 강으로 합류해 이내 대양에 다다르듯, 욕심도 한없이 덩치를 불리며 커져 갔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무한한 재능이 결부해 아이작을 끝없는 성취감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어디에서 멈춰야 할까.

어디에서 만족해야 할까.

누군가 답을 알려주면 좋을 텐데.

“도련님?”

상념에 잠겨 있던 아이작을 현실로 끌어올린 건 후버였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후버는 텅 빈 회의실에 홀로 남아 있는 아이작의 모습을 보고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창가에 기대 멍하니 있는 모습이 영 처량 맞아 보인 건지, 답지 않게 측은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도련님. 목욕 준비를 일러두었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좌익관으로 돌아가시죠.”

아이작은 물끄러미 후버를 쳐다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교차로 인한 물안개가 별채의 작은 빛을 부옇게 가리고 있었다.

“오늘은 별채로 갈게.”

“관리가 미흡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어차피 내일 일찌감치 본관으로 와야 하니까 잠만 자고 올 거야. 나 혼자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후버도 쉬어.”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언뜻 단호함이 느껴졌다. 후버는 망설이다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까만 케이프를 아이작의 어깨에 걸쳐주고서 조용히 밖으로 물러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은 모양이지.

횃불을 든 채 정원을 순찰하는 위병들이 서로 교대하며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어둠에 물든 정원과 별채, 까만 밤하늘을 순서대로 쳐다본 아이작은 마지막으로 사용인 기숙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뭘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봄 내음이 느껴지는 초록 눈동자를 떠올린 순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휘었다. 아이작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고 복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으음…”

노을빛에 눈을 뜬 막스가 발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깨닫고 눈매를 찡그렸다. 천장을 노려보는 눈 속에 짜증이 가득 섞여들었다.

“……뭐야, 이건.”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 우익관으로 뛰어 들어온 것까지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대로 술을 찾았고, 파괴적인 욕구에 취해 술을 들고 온 하녀를 침대에 엎어트린 것도 희미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어땠더라.

생긴 것도 촌스러운 하녀는 머리마저 나쁜지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질질 짜기만 했다. 저택에서는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해서 몇 번 침실로 부른 적 있는 하녀였는데, 할 때마다 머저리처럼 구는 게 속 터져 조금 손찌검을 했던 것도 같았다.

밤 시중도 똑바로 못 드는 게 눈치도 없군.

……주인이 잠들었으면 알아서 후딱후딱 기어나가야지, 감히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니.

“이봐.”

쳐다보지도 않고 발을 툭툭 치자 꾸물거리며 하녀가 몸을 일으켰다.

옅게 그을린 얼굴, 뺨을 가득 메우고 있는 주근깨와 칙칙한 빨강 머리까지 예쁜 구석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하녀였다. 멍하니 시트를 내려다보던 하녀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지금 바로 나가보겠습니다.”

헐벗은 몸을 가릴 새도 없이 연신 굽신대던 하녀가 옷을 주워들고 구석으로 갔다. 옷감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막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녀는 속옷과 페티코트, 검은 드레스만 재빨리 걸치고서 앞치마와 헤드캡 따위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푸석한 머리카락을 그대로 풀어헤친 채 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서두르는 건 그간 축적된 경험으로 인한 본능이었다. 꾸물거리다가 소공작의 진노를 뒤집어쓴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유독 언짢아 보였다. 아까 잠자리에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던 걸 떠올리니 가신 회의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이런 날 소공작을 건드리면, 뺨 맞는 것보다 훨씬 모진 일을 당할 게 분명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기다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막스는 하녀가 문고리를 잡기 전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세웠다.

“너, 이리 좀 와 봐.”

문고리를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녀는 꿀꺽 침을 삼킨 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몸을 돌려 그의 앞에 섰다.

“이름이 뭐지.”

“에디나… 에디나 작스 입니다, 소공작님.”

막스는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에디나의 이름을 작게 읊었다.

갑자기 이름은 왜 묻는 건지, 혹시 또 벌을 주거나 쫓아내려는 건 아닌지 겁먹은 에디나가 끌어안고 있던 옷 뭉치를 쉴 새 없이 조물거렸다.

하녀의 불편한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막스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정신을 차리는 데 집중했다.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렇게 벌벌 떠는 꼴을 보니 곧장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지나가다가 희한한 소리를 들었거든.”

“예? 무슨…”

“아이작이 유독 편애하는 하녀가 한 명 있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말미를 끝맺기도 전에 에디나가 어깨를 흠칫하며 옷 뭉치를 끌어안은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아하.

막스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떠올랐다. 막스는 옷감에 파묻혀있는 에디나의 손을 잡아 빼 자신에게로 잡아끌었다.

“그 하녀 이름이 뭐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소공작은 사용인들에게 관심 없었다. 그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하녀장인 미시즈 프라다나 집사인 마이어 경 정도일 터였다. 에디나 자신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 그와 몸을 섞었지만 이름을 묻는 건 처음이었다.

막스와 아이작이 물과 기름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용인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작이 정식 보좌로 발탁된 최근에는 더더욱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총애하는 하녀를 찾는다는 건, 그 하녀를 못살게 굴 거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니까.”

막스가 한결 사나워진 목소리로 그녀를 채근했다.

하지만 아무리 소공작이 무섭다 한들 친구를 팔 수는 없었다. 에디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소공작님. 송구하지만 저택은 하녀 숫자만 칠십 명이 넘습니다. 제가 그들 전부를 알지는 못해요.”

“꼴랑 칠십 명밖에 안 되는데 그 계집애들이 어디서 일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멍청해?”

“……죄송합니다.”

“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막스가 손목을 붙들던 손을 올려 거침없이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불씨처럼 이리저리 출렁였다.

“소, 아윽! 소, 소공작님!”

“하다 하다 이제 네까짓 년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모른다는 계집애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렇게 티 나게 움찔거려? 넌 내 눈이 병신으로 보여?”

“놔주세… 아악! 소공작님! 소공작님!”

“시끄러워!”

크게 몸이 휘청거린다고 느낀 순간, 막스가 머리채를 붙잡은 그대로 에디나를 침대로 내팽개쳤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투두둑, 소리와 함께 드레스 윗단의 단추가 튕겨 나갔다.

사색이 된 에디나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막스는 욕을 짓씹으며 침대 밖으로 도망가려는 하녀의 머리채를 다시 붙들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그림자가 하나로 뒤엉켜 침대를 장식했다.

붉은 노을이 서린 벽 위에 검은 실루엣이 괴악스러운 움직임을 투영했다. 노을보다 더 붉은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어지러이 펼쳐졌다.

모른다는 외침이 조금씩 힘을 잃고 무너져내렸다. 누군가는 애정의 마지막 단계라 생각하는 다정한 행위가 폭력적으로 변태해 에디나의 몸과 정신을 갉아먹었다.

쾌감인지 아픔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의 끝에서 컥, 숨이 막혀왔다. 목을 옥죄는 손길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제는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이 눈앞을 어른거리던 순간, 에디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알, 알아요. 이름… 알아요…! 놔주, 헉, 놔주세…!”

대답 대신 짜악, 뺨이 옆으로 돌아갔다. 에디나는 아픔도 상관없이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또다시 손이 얼굴을 후려치려는 찰나 에디나가 울먹이며 이름을 토했다.

“달리아… 다, 달리아예요…!”

“달리아?”

“네, 네! 달리아 벨로흐라는 하녀입니다! 소공작님이 오시기 한참 전부터, 혼자서 작은 도련님의 시중을 들었던 아이예요! 지금은 도련님 전담 시녀로 일하고 있어요!”

끅끅거리면서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친구의 이름을 읊었다.

죽을 것 같은 공포 앞에서는 알량한 양심 따위 아무 가치가 없었다. 이런 지옥 같은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달리아의 이름 따위 백 번이고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막스는 사납게 얼굴을 찡그린 채 들쳐 올렸던 손을 아래로 떨궜다. 떨군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제 밑에 깔려있던 하녀를 옆으로 밀쳐냈다.

“거짓말이면 죽을 줄 알아.”

“절대 아니에요! 절대 거짓말 아니에요! 미, 미시즈 프라다께 확인해 보시면 바로 아실 거예요!”

“그 여자도 잘 모르겠다고 잡아떼길래 너한테 묻는 거 아니야. 뭐… 확인해 보면 알겠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뱉고서 막스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막상 에디나를 다그치면서도 헛소문에 불과할 거라 예상했다. 아이작 놈은 자신보다 더 사용인에게 관심 없는 놈이었으니까. 낯선 사람을 보면 무조건 경계하기 바쁜 놈이 하녀를 끼고 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녀장에게 물어봐도 딱히 그런 건 모르겠다 하고 집사도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래서 그냥 헛소문이구나 생각하며 잊고 있었다. 시종 대신 시녀를 쓴다는 말에도 시중들 놈이 없어 계집애를 갖다 붙였구나 하고 가벼이 넘겼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하하. 진짜로 아끼는 계집애가 있었단 말이야?”

생각해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작 또한 사내놈이었다. 여자에 관심 있어도 사교계에는 얼굴을 내밀 수 없는 놈이니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날 수도 없었을 테고, 기껏 정 붙인 계집 이래 봤자 저택의 하녀 정도가 최선이었을 터였다.

뭐, 잘된 거지.

괜찮은 집안의 계집애였다면 괴롭힐 수도 없었을 텐데. 하녀라면 상관없지.

어차피 하녀라는 건 기물이나 마찬가지다. 갈아치우고 갈아치워도 늘 새로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그런 거라면 괴롭히고 망가트려도 후환이 없었다.

천박한 사생아 새끼.

가신들 앞에서 그따위로 모욕을 주다니. 내가 얌전히 당할 줄 알았나?

너도 한 번 똑같이 당해 봐라.

아이작이 아끼는 걸 망가트린다 생각하니 짜릿한 흥분이 일었다. 막스는 자신의 중심을 향해 고개를 떨궜다.

“야, 에디나.”

목적은 달성했지만 아직 흥분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막스는 서늘한 눈길로 에디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아래를 힐끗 가리켰다. 훌쩍거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던 에디나가 그의 눈빛을 이해하고 우는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 막스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거친 언행과 달리 그녀의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길이 몹시 부드러웠다. 막스는 솟아오르는 환희에 몸을 맡긴 채로 달리아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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