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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소집된 가신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해 회의실을 메웠다. 휘황하게 빛을 드리운 샹들리에 아래에 그와 어울리지 않는 침울한 얼굴들이 서로 마주 보며 상황의 위급함을 은연히 드러냈다.
그럼에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화두를 꺼낸 순간 분위기가 더욱 어두워질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괴괴한 침묵 속에서 한숨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만이 인기척을 알렸다.
“대체 어쩌다 쓰러지신 건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디테른 자작이었다.
성성한 수염을 연신 잡아당기는 손짓이 평소에 비해 유독 신경질적이었다. 피로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뉴엣 백작이 눈가를 어루만지며 대답을 흘렸다.
“벽난로로 다가가시던 중 발을 삐끗해서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부딪치셨다 합니다.”
“누가 그러더이까?”
“소공작께서 그리 이르셨습니다. 다행히 곁에 있었기에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 하더군요.”
하아, 터져 나온 한숨들이 테이블 위로 흩뿌려졌다. 전대미문의 상황에 가신들은 어떤 식으로 화제를 이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쓰러진 지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공작은 여전히 의식불명이었다. 워낙 건강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자리보전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주치의는 뇌진탕이라는 소견을 남긴 뒤 언제 일어날 수 있을지는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 말했다.
참담한 분위기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쓰린 적막을 뚫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신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조금 늦었군.”
막스가 수척한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침통한 표정과 달리 옷매무새가 몹시 화려했다. 막스는 입가를 쓸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연스레 가장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공작.”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뉴엣 백작이 기가 찬 한숨을 흘리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막스는 개의치 않고 공작의 자리에 착석했다.
질린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디테른이 헛기침으로 그를 무시했다. 부정적인 반응에도 막스는 태연한 얼굴로 제 할 말을 읊었다.
“경들도 알겠지만 현재 각하께서 위중하신 상태요. 다시 이 자리에 앉으실 때까지, 후계자로서 본인이 공작가를 대변할 것이오.”
불만을 토로하는 자는 없었다. 다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막스의 발언이 이것으로 끝났다 생각한 가신들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당면한 일들을 떠올렸다.
“재가해야 할 안건이 한둘이 아닌데 어찌 진행해야 할지 걱정이구먼.”
이마를 짚고 있던 디테른 자작이 신음처럼 흘리듯 말했다. 그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당장 다음 주만 해도 공식 행사가 여섯 개가 넘소. 자잘한 건 우리 선에서 어물쩍 넘긴다 해도 중요한 행사들은…”
“관개 수로 공사는 이대로 실행해도 괜찮은 겁니까? 아직 최종 검토가 남은 걸로 아는데.”
“항만 확충에 대한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결된 안건이지만 아직 정확한 설계나 부지도 나오지 않았는데 저희 시에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뉴엣 백작이 손을 들어 가신들의 시선을 모았다.
“내부 일은 우리끼리 알아서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각하의 부재가 추밀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몹시 우려됩니다.”
다소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탁한 울림으로 허공을 울렸다. 추밀원이라는 단어에 가신들의 얼굴 위로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 안 그래도 추밀원에서 외압이 심하다고 들었소. 하필 이럴 때 몸져누우실 줄이야…”
“하필이면 현 의장이 지락탈이잖소. 어떤 식으로 걸고넘어질지 걱정되는구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동부와 맞닿은 지역에 분쟁이 잦습니다. 지역감정도 문제지만 그쪽에서 새어 나온 밀수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먼저 문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오. 지락탈이 얼마나 여우 같은 작자인지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잘 알지 않소.”
22명의 대영주들이 속한 추밀원은 중앙 정부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는 지엄한 기관이었다. 고귀한 분들이 모여 화합을 다질 것만 같은 우아한 모습과 달리 실상은 질투와 시기, 암약과 모략이 오고 가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사이가 좋지 않은 가문이 지락탈 후작가와 유프겐슐트 공작가였다.
동부 오클란트와 그 위에 위치한 헬만은 오랜 지역감정으로 인해 빈말로라도 서로 사이가 좋다 말할 수 없었다. 그를 대변하듯 오클란트의 영주인 지락탈 후작가와 헬만을 다스리는 유프겐슐트 공작가는 추밀원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앙숙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앙숙인 지락탈이 의장을 맡고 있는 이때, 공작의 부재가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미간에 깊이 파인 주름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디테른 자작이 입을 열었다.
“밀수품 얘기를 꺼내면 토지 침해 문제로 반격해올 테지. 호락호락 넘어갈 인간이 아니니까. 당분간 각하의 부재는 함구하도록 하세.”
“자작님, 외람되오나 덮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각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이미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보좌진도 알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지락탈의 도발이야 흘려 넘긴다 쳐도 추밀원의 이름으로 공문이 내려온다면 누가 각하를 대변할 것이오? 가신에 불과할 뿐인 우리가?”
“……자작님과 백작님이시라면.”
“어림없는 소리! 우리는 그저 유프겐슐트의 미명하에 속한 미천한 몸일 뿐이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지락탈을 옆집 개 이름으로 생각하고 계시나 보오.”
쯧, 혀를 차며 디테른 자작이 말을 매듭지었다.
그 말대로, 만만하게 여기고 있지만 지락탈은 공화국에서 단 22명뿐인 위대한 핏줄이었다. 지금 앉아 있는 이곳. 가신들 모두가 숭배하듯이 모시고 있는 유프겐슐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문인 것이다.
게다가 추밀원의 다른 영주들 또한 일반 귀족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인물들이었다. 감히 가신들이 대등하게 대화를 운운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신들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회의적인 시선이 가득한 자리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내보인 사람은 공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막스였다.
“나를 앞에 두고 별소리를 다 하는군. 엄연히 후계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경들께서는 걱정도 많소.”
다리를 꼰 채 자신만만하게 말을 읊었지만 가신들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시선을 되돌릴 뿐이었다. 호응을 기대했던 막스는 입매를 일그러트린 채 재차 말을 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뭘 그리 걱정하시오. 그리고, 앙숙이라는 말도 다 옛말이지. 내가 퍼블릭 스쿨에서도 지락탈 공자와 얼마나…”
“소공작. 지역감정이라는 게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각하께서도 진즉 해결하셨을 겁니다. 외람되오나 소공작께서는 실무에 대해 전혀 모르십니다.”
뉴엣 백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막스의 말을 끊어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막스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막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모욕으로 인해 눈가에 서슬 퍼런 분노가 일렁였다. 퍼블릭 스쿨에서 내내 황제 대접을 받아오던 막스에게 이런 치욕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백작을 하대하다가는 후계자로서 위엄을 잃을 것이란 본능이 남아 겨우 막스를 저지했다.
막스는 속으로 울분을 삼키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인내를 한껏 발휘하여 자연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려던 찰나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아이작이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셔츠와 바지뿐인 간결한 차림, 급하게 뛰어온 듯 상기된 표정과 흐트러진 숨이 화려한 옷차림의 막스와 대비되어 그를 더욱 처량 맞아 보이게 했다. 막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사그라들던 분노를 의붓동생에게 쏟아냈다.
“이름뿐이라 해도 넌 각하의 보좌다. 긴급한 회의라고 분명 알렸을 텐데, 무슨 헛짓거리를 하다가 이리 늦은 거야.”
“…그게. 대외비라 말씀드리기가 송구합니다.”
막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테이블을 툭, 쳤다.
대외비는 무슨 대외비. 게다가 기밀이라면 자신에게 먼저 재깍재깍 보고해야지, 감히 누구 면전에서 대외비를 들먹이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대외에 내가 포함된다는 뜻인가? 나는 소공작이자 소영주다. 내가 우스운 거냐?”
“…….”
“아니면 가신 회의가 우스운가?”
“소공작님.”
“말 돌릴 생각하지 말고 왜 늦었나 설명해, 서전트 나리.”
막스가 비아냥거리자 가신들이 먼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무감한 얼굴로 막스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막스의 인내심이 길지 않음을 깨닫고서 실토하듯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쓰러지셨다는 비보를 듣자마자 처리해야 할 안건들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했습니다. 대리인으로서 가능한 것들 먼저 처리했고, 이후 최중요 안건들의 목록을 선별해 갖고 왔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아이작이 유려한 걸음걸이로 옆으로 비켜섰다. 그를 신호로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와 가신들 앞에 서류 묶음을 차례차례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감한 얼굴로 시선 둘 곳을 찾는 막스와 달리 가신들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서류에 몰두했다. 방금 전까지 논쟁이 오가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회의실 위로는 팔락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헛기침하는 소리만 간간이 울려 퍼졌다.
이까짓 서류가 뭐라고 다들 심각한 척은.
……아니. 방금 아이작이 뭐라고 했지? 최중요 안건들의 목록이라고 했나?
멍하니 가신들의 모습을 좇던 막스가 뒤늦게 아이작의 말을 이해하고서 서둘러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첫 페이지부터 당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쓰여 있는 건 분명 하이드벤어인데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자와 숫자의 홍수 속에서 막스가 건져 올릴 수 있는 건 단락의 제목과 몇 가지 쉬운 문장들뿐이었다.
어지러운 나머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멀찍이 서 있던 아이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늘 똑같이 무표정해서 지루함마저 느껴지는 단정한 얼굴이 막스를 마주한 순간 작은 미소를 피워 올렸다.
“궁금한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 하문하십시오, 소공작님.”
다정하게 어르는 듯한 그 말투가 자신을 향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막스는 욕을 읊조리며 앞에 펼쳐져 있던 서류를 와작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