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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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 이쪽으로 좀 와 볼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이작이 펜 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보조 의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구석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달리아가 머뭇거리며 다가와 명령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하녀들이 들이닥쳤다. 아이작은 책상에 널브러져 있던 사무용품들과 책더미를 옆으로 치운 다음 하녀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쪽으로 준비해 줘.”

트레이를 끌고 온 하녀가 능숙한 손길로 책상 위에 접시들을 늘어놓았다. 커트러리와 냅킨, 작은 화병까지 내려놓더니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녀가 기계적인 손길로 차를 따른다.

달리아는 앉은 상태 그대로 굳어 멍하니 하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차를 따르는 하녀가 익숙한 사람이었던 탓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상관이었던 델마가 앞에서 차를 따른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만을 위한 게 아닌, 서전트 유프겐슐트 보좌의 전담 시녀를 위한 예절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하녀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밖으로 물러났다. 달리아는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작은 늘어놓은 접시들을 달리아 앞으로 옮기며 냅킨에 쌓여있던 포크를 달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윽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검은 눈이 슬쩍 위를 향하더니 달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었다.

미려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주할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잘생긴 얼굴에 이미 익숙할 만치 익숙해진 달리아는 눈을 내려 시선을 외면한 채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도련님. 차 심부름시키실 거면 저한테 시키세요. 어차피 하는 일도 하나도 없는걸요.”

“달리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더 불편해요. 자질구레한 일은 하녀들 말고 저한테 시키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달리아.”

“매일 방에 앉아서 책이나 읽고 도련님하고 놀고… 이렇게 나태한 걸 들키면 미시즈 프라다께 호되게 야단맞을 거예요.”

“고개 좀 들어 봐, 달리아.”

나직한 목소리에서 재촉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아이작이 케이크를 포크로 집어 달리아의 눈앞에 내밀었다.

“아 해.”

“……도련님. 제 이야기 하나도 안 듣고 계셨죠?”

“빨리. 이거 좋아하잖아.”

해맑게 웃으며 케이크를 들이미는 모습에 달리아는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흘깃 아래를 내려다보니 흑빛 책상 위에 늘어선 색색의 디저트들이 자태를 뽐내며 침샘을 자극했다.

에이, 모르겠다.

아 하고 입을 벌리자 아이작이 냉큼 케이크를 입에 밀어 넣었다. 묵묵히 케이크를 씹자 까만 눈동자에 생기가 반짝이며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맛있어?”

“네에.”

“이것도 먹어 봐.”

오렌지 향이 물씬 풍기는 촉촉한 무스 케이크가 입 안을 황홀한 색채로 물들였다. 이어서 보드라운 시폰 케이크와 바삭바삭한 초콜릿 파이가 번갈아 입속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비싸고 맛있는 디저트였다. 열심히 받아먹던 달리아는 어제도, 그제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아이작의 손을 붙들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도련님 드세요.”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 달리아가 도와줘야지.”

턱을 괸 채 차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반듯하게 떨어지는 얼굴선, 다소 짙은 눈썹과 깊게 음영 진 눈매가 더 이상 소년이라고 지칭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청년의 모습으로 거듭나 있었다. 굵은 목선과 넓게 자리한 어깨, 그 밑으로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두꺼운 가슴까지.

우습게도 어른이 되어버린 도련님은 징그럽다기보다는 예전보다 더욱 수려한 외모로 달리아를 주눅 들게 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속눈썹 아래, 칠흑빛 눈 속에 담긴 다정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마주 보고 있으니 괜히 부끄러움이 일어 달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요즘 어쩐지… 도련님이 좀 이상하신 것 같아.

시녀로 일하게 된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시중을 들어야 하나 잔뜩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달리아는 하릴없이 매일을 보냈다.

하는 일이라고는 오늘처럼 곁에서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 적당히 말 상대를 하거나, 가끔 답답하다며 산책을 가자고 할 때 함께 정원을 도는 게 전부였다.

아이작이 별채에서 좌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로는 좌익관을 담당하던 하녀들이 나서서 청소나 착장 따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전부 도맡아서 하고 있다. 달리아는 먼지떨이를 내려놓은 지 며칠이 되었나 세다가 한숨을 내쉬며 셈을 포기했다.

원래 시녀들이 다 이렇게 한가한 건가…

일하고 싶어.

매일 바쁘게 살던 달리아에게 지나치리만치 평화로운 일상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태 노동에 길들어 있던 몸으로서는 휴식이 곤혹스럽기만 했다.

“내일모레는 같이 시내에 좀 나갔다 올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달리아가 찻잔을 지분거리던 손을 재빨리 무릎 위로 모았다.

“내일모레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응.”

“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요즘 계속 바쁘신데 굳이 직접 가실 필요 없이…”

“데이트하러 가는 건데 어떻게 혼자 가? 같이 가야지.”

흘리듯 말을 뱉고서 아이작이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여상한 어조였기에 달리아는 그 데이트가 자신이 아는 단어가 맞는지 혼란에 빠졌다. 달칵,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도련님. 지금 설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예요?”

“응.”

아이작의 입매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미소를 띠었다. 깍지 낀 양 손가락 위에 턱을 괸 채로 아이작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세웠다. 그리고 늘 그렇듯, 처연한 표정을 떠올린 채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떠보듯 물었다.

“왜? 가기 싫어?”

두어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달리아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니 그녀의 동요를 알 만했다.

“도련님. 그렇게 저 놀리면 재미있으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우리, 작년 겨울 몰래 나갔다 온 거 외에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데이트한 적 없는걸.”

“그런 건 데이트라고 안 해요. 델마 씨 심부름 때문에 나가려는 걸 도련님께서 같이 가자고 하신 거지요.”

“나한테는 데이트였어.”

반쯤 감은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눈썹을 살짝 추어올린 채 다시 달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한테는 데이트였어. 지금도 그렇고.”

테이블 끄트머리를 배회하던 손이 자연스레 달리아의 턱을 쓸고 뺨으로 올라왔다. 팔을 쭉 뻗어 달리아의 뺨을 어루만지던 아이작이 상체를 깊이 내밀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도련님. 또… 장난치시려고…”

초록 눈동자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 아이작이 농담을 건넨 적은 종종 있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살을 만지작거리며 한 적은 처음이었다.

도련님 손이 이렇게 컸던가?

뺨을 감싸는 손바닥의 온기가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주책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성은 여전히 그를 어린 남동생으로 인지했지만 본능만은 그를 남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스스로 깨달은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와 달리아는 서둘러 찻잔을 들어 올리며 뒤로 몸을 물렸다.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최대한 평연한 어조를 가장했다.

“데, 데이트든 뭐든 도련님께서 가고 싶으시다면 뜻에 따라야지요. 알겠습니다.”

“데이트든 뭐든이 아니라 데이트라니까. 우리 같이 손잡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카페에서 차 마시고. 좋아하는 것 둘러보면서 계속 이야기 나눴잖아. 그게 데이트야.”

그냥 나들이 삼아 놀러 다닌 걸 데이트라는 단어로 축약하니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다. 달리아는 손을 파닥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부정했다.

“그런, 그런 건 데이트라고 하지 않아요….”

“그럼 뭐를 데이트라고 하는데?”

“데이트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손도 잡고, 함께 좋은 시간 보내고….”

“우리도 그랬는걸.”

달리아가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포옹… 아니다. 입, 입맞춤을 한다던가.”

“……입맞춤?”

덜컹, 소리 나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아이작이 긴 다리를 뻗어 순식간에 달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바로 옆에 서서 달리아를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보일 듯 말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달리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소매를 걷어 올려 얼핏 드러난 팔목에 핏줄이 불거졌다. 억지로 자신을 올려다보게끔 턱을 치켜올린 아이작이 아주 느리게 몸을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남성적인 우드 향과 그의 체취인지 또 다른 향수 냄새인지 알 수 없는 겨울바람 내음이 훅 밀려 들어왔다.

“입 맞추면 데이트야?”

코끝이 스칠만한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아이작이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지금 입 맞추면 이것도 데이트?”

뜨거운 숨결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묘한 울림이 느껴지는 말미에서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눈 감아.”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거절할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농담이 아닌 건지, 아이작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지그시 달리아를 쏘아보았다.

새카만 눈동자는 동공과 홍채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창밖으로 새어 들어온 붉은 노을이 그의 옆얼굴을 잠식하고 있었음에도, 검은 눈만큼은 어떤 색도 담지 못한 채 침침한 빛으로 달리아를 투영했다.

말간 어둠 너머로 달리아만이, 오직 달리아만이 흐릿하게 잔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달리아가 꿀꺽 침을 삼켰다.

만약… 눈을 감으면.

지금 이 분위기가 장난이 아닌 것만 같아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릴 것만 같아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을 뒤로 빼려 했지만 또 다른 손이 그녀의 머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그의 숨결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 바짝 치켜뜬 눈이 어느새 가늘어져 야릇한 빛을 자아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았다 느낀 찰나 달리아가 질끈 눈을 감았다. 보드라운 살이 눌리는 감촉이 썩 나쁘지 않다 느낀 순간이었다.

“도, 도도련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훅, 떠진 눈꺼풀 안으로 표정이 씻겨나가 무감한 얼굴의 아이작이 비쳐 보였다.

왜 하필 이럴 때.

아쉬운지 다행인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생각이, 후버의 다음 말로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지금 공작 각하께서! 의, 의식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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