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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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곁에서 직접 시중을 드는 시종과 시녀들은 주인의 가장 사적인 장소까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 여자들은 시녀를, 남자들은 시종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작 저 또한 공작 부인과 카를라는 여자 시녀를 부리고 공작과 막스는 남자 시종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께 전담 시녀라니. 시종도 아닌 자신을 지명하다니.

시녀는 아니었지만 이미 자질구레한 일들은 달리아와 델마가 함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의 부가적인 일들은 원래부터 시중을 들던 후버가 알아서 해오고 있었다.

굳이 그런 게 필요한가 의문이 들었다. 난감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생각을 읽은 것처럼 미시즈 프라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 달리아. 너도 소문으로 들었겠지만 작은 도련님께서 각하의 보좌로써 입장을 공고히 하셨잖니?”

“네.”

“예전보다 일손이 필요할 일이 더 많아지겠지? 원래 시종이었던 후버는 잔심부름하느라 자리를 비울 때가 많고 말이야.”

미시즈 프라다가 주름진 입매를 만지작거리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만큼 일을 잘해 주는 아이가 드무니까 그냥 원래대로 상급 하녀로 진급하기를 바랐다. 그래도 어쩌겠니. 주인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단다.”

“그런가요…”

공작이 직접 지시한 일이라면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달리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울적한 분위기에 미시즈 프라다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델마를 힐끗거렸다. 그러자 델마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달리아. 동생이 아프다고 했지?”

“네.”

“지금보다 훨씬 대우가 좋아질 거야. 월급도 상급 하녀보다 많이 줄 거고.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달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하는 태도와 달리 입을 꾹 닫은 채 눈썹을 추어올린 모습에서 서운함이 물씬 묻어났다.

조건은 좋았지만 달리아의 목표는 상급 하녀였다. 델마처럼 무뚝뚝하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다른 이들을 바짝 긴장시킬 수 있는.

어른스러운 그 모습을 내내 동경해왔던 달리아였기에 아무리 시녀직이 조건이 좋다 한들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명하시면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툭 내민다. 늘 애 어른 같은 태도를 고수하던 달리아답지 않은, 아이 같은 태도였다.

델마는 속으로 혀를 차며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다독였다.

“달리아. 네가 진급을 오래도록 기다려온 건 알아. 비슷한 또래 중에서 너만큼 일 잘하는 아이가 없다는 것도 알고.”

“…….”

“그러니까 네가 적격인 거야. 작은 도련님께서는 안 그래도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니까 야무진 사람이 붙어서 시중들어야 해. 마침 도련님께서도 너를 지명하셨고.”

“도련님께서 직접 저를 지명하신 건가요?”

델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맥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지명하다니. 도련님은 그렇게까지 나를 편하게 생각해 주셨던 걸까.

그의 곁에서 전담 시녀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상급 하녀로 일하는 걸 훨씬 기대해왔기에 떨떠름한 표정이 떠오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리아는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미시즈 프라다는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어조로 시녀의 장점을 읊으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다.

내일부터 전담 시녀로 일하라는 명을 귀에 담고서 달리아가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이런저런 고민을 담고 아무 생각 없이 발길을 옮겼다.

정원을 지나 풀숲을 스쳐 멍하니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눈을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별채 앞에 다다라 있었다.

“허,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걸걸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후버가 구부정한 허리를 두드리며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책과 두루마리 따위를 한가득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서재를 정리 중이거나 아이작의 명으로 저택 도서관을 다녀오는 길인 듯싶었다.

“잘됐네. 마침 도련님께서 널 찾고 계셨거든. 들어가 봐.”

“후버 씨. 소식 들으셨어요?”

후버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으로 달리아를 쳐다보던 후버가 아하, 하며 코웃음을 쳤다.

“잡역 하녀에서 단숨에 전담 시녀라니 이게 웬 횡재야. 나도 나지만 너도 너다.”

“…알고 계셨네요.”

“잘된 거 아니야? 어차피 돈 벌고 싶어서 저택에 온 거잖아. 하녀랑 시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툴툴거리는 말투가 괜히 눈치를 살피며 다정하게 구는 말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달리아는 푹 한숨을 내쉬고 별채 앞에 놓여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진급할 것만 기대했지 시녀 같은 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단 말이에요. 시녀는 뭘 하는 거예요?”

“저택에서 일하는 주제에 시녀가 뭘 하는지도 몰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후버 씨도 잘 모르죠?”

“내가 왜 몰라. 내가 너인 줄 알아?”

후버가 한쪽 눈썹을 꿈틀하더니 들고 있던 책더미를 벤치에 털썩 내려놓았다.

“앤지 로들랑. 저택에서 자주 마주칠 거 아니야.”

“…아. 카를라 아가씨의 시녀님이요?”

“그래. 그냥 그 여자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하면 돼.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시중들고, 명령하는 대로 하녀들한테 고스란히 읊기만 하면 끝.”

지나치게 생략된 설명이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후버를 흘겨보던 달리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도련님은 주인님이 부르실 때 외에는 거의 별채에만 계시잖아요. 게다가 힘든 건 후버 씨가 대부분 다 하시는데. 제가 굳이 따라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횡재라는 거지. 궂은일은 내가 다 하고 자질구레한 것만 네가 하는데, 지금 하는 일에서 더 바빠질 것도 없는데 월급은 네 배를 넘게 받는다니. 이게 횡재 아니면 뭐야.”

“네?”

“응?”

“월급을… 네 배를 넘게 받는다고요?”

초록색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다. 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을 눌렀다.

매번 바삐 움직이는 하녀들과 달리 시녀는 그리 담당하는 일이 많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월급이 올라 봤자 반절 정도밖에 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 배라는 소리에 모든 아쉬움이 사라졌다.

입을 벙긋거리며 놀라움을 표출하던 달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시녀가 그렇게 돈을 많이 받아요? 왜요? 어떻게?”

흥분한 달리아를 보고서 후버가 헛웃음을 흘렸다.

“급여 얘기 제대로 안 해 줬나 보네. 당연히 다르지.”

“우와, 우와!”

“그나마 그것도 예의상 받는 돈이겠지. 시녀나 시종은 대부분 가신 집안에서 차출되잖냐. 귀족이니까 돈이 아쉬워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닐 거야. 뭐 너야 평민이니 다른 시녀들보다야 적게 받겠지만.”

진지하게 말을 경청하던 달리아가 손가락을 구부려 셈을 하기 시작했다.

달리아는 여태껏 후버가 봐 온 얼굴 중 가장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여태껏 봐 온 얼굴 중 가장 환한 표정을 떠올리고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꿈이 아니야!”

“무슨, 웬… 꿈?”

“올해 안에 5골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어요!”

달리아가 후버의 손을 붙잡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녀에게 장단을 맞추던 후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홱 손을 뿌리쳤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정신 차리고 도련님께나 가! 아까부터 찾으셨다니까!”

달리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순순히 후버의 말에 따랐다. 그렇게 나는 듯한 걸음으로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 순식간에 방에 도착했다.

똑똑, 노크한 뒤에 방에 들어서자 책장 앞에 서서 책을 읽고 있던 아이작이 고개를 들어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우수에 차 있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그때, 달리아가 후다닥 뛰어가 아이작을 끌어안았다.

“도련님!”

난데없는 포옹에 아이작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가슴이 제 명치에 눌려 뭉클한 감각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깨달은 순간 자신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얼굴이 화끈거려왔다.

아이작은 힘겹게 입술을 움직여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다, 달리아. 왜… 왜 갑자기, 이런.”

“소식 들었어요! 제가 전담 시녀가 된다고요!”

“……아. 아아… 응.”

“고맙습니다! 전담 시녀, 열심히 할게요!”

팔을 들어 올린 채 난감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서 쑥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무구한 미소와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눈 속에 끈적끈적한 정염이 느릿하게 퍼져나갔다.

“…응. 나야말로 잘 부탁해.”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달리아의 등을 감싸고 또 다른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과 포근한 체온이 저절로 봄을 느끼게 했다. 아이작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닿을 듯 말듯 조심스레 정수리에 키스를 퍼부으며 손끝을 맴돌던 작은 새를 떠올렸다.

붙잡으려 했지만, 혹여 죽여버릴까 무서워 떠나보냈던.

다갈색 깃털이 아름다웠던 그 작은 새를.

* * *

드레스 자락 너머로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온몸으로 짜증을 표출하던 카를라가 막스의 방문 앞에 다다라 깊게 심호흡을 했다.

화내지 말자. 나는 지금 말 못 하는 짐승을 달래는 거다.

속으로 되뇌며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방문을 열자마자 카를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저녁노을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저녁임에도 방 안은 술 냄새가 진동했다. 굴러다니는 술병을 발끝으로 툭 밀어내며 카를라가 차분한 걸음으로 막스에게 다가갔다.

“그만 좀 마셔, 막스.”

창가 앞 소파에 늘어져 술을 홀짝이고 있던 막스가 눈동자만 움직여 카를라를 힐긋거렸다. 단추가 모두 풀려 있는 셔츠 안으로 지난 밤의 방탕한 흔적들이 울긋불긋하게 남아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카를라는 내키지 않는 손길로 셔츠를 여민 뒤 와인 잔을 빼앗았다.

“그만 마시라고.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야.”

“또 무슨 참견을 하시려고 여기까지 납셨어.”

“…어머니께서 네 걱정에 잠도 못 주무셔. 집안 분위기가 얼마나 엉망인 줄 아니?”

가신 회의가 끝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저택은 아직도 그날의 여파가 남아 싸늘하기만 했다. 공작 부인과 공작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된 탓이었다.

위병들에게 끌려 나온 막스는 반성은커녕 별채를 불사르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공작 부인이 그를 추궁하는 사이, 회의를 끝내고 나온 공작이 다짜고짜 막스의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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