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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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붉어진 뺨을 감싼 채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신분을 망각하고 주제넘게 자리에 섰습니다. 소공작님께서 화내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아둔한 본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떨림과 진심이 섞인 목소리가 경악의 그림자가 남은 테이블 위로 잔잔히 퍼져나갔다. 그를 바라보는 가신들의 얼굴 위로 당혹 대신 측은함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전트 유프겐슐트, 고개를 들도록.”

게헤른을 부축하고 있던 뉴엣 백작이 가신들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그대가 비난받아야 할 일은 없다. 그대가 사심으로 일을 도운 적은 여태까지 단 한 순간도 없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러니 사과할 필요 없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제 핏줄이 용인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만.”

“아이작.”

게헤른이 백작의 손을 떨쳐내며 아이작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작과 비슷하지만 주름이 가득 잡힌 눈매 속, 새파란 눈동자가 애환을 가득 담은 채로 아들을 투영했다.

“폭거를 저지른 건 막스인데 왜 네가 사과하느냐. 백작의 말이 맞다. 네가 비난받아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각하.”

“어디, 경들도 나와 같은 뜻이지 않나.”

게헤른이 쓰게 웃으며 답을 종용하는 듯한 태도로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뉴엣 백작이 나서서 격려에 힘을 보탰다.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 우리의 뜻이다. 아이작, 그대는 헬만을 위해, 또 차기 후계자를 위해 수없이 많은 조언을 전해왔다. 본인은 그대가 가신들 앞에서 부디 당당히 보좌역을 감내하기를 바란다.”

뉴엣 백작이 차분한 눈빛으로 가신들의 면면을 훑었다. 과연 젊은 나이에 오브릭 자작을 제치고 공작의 오른팔을 차지한 이답게, 품격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그보다 더 느린 속도로 다시 눈을 떴다.

터진 입속에서 비릿하게 퍼져나가는 쇠 맛이 저절로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불행한 추억을 온몸으로 재연하며, 아이작은 가련한 사생아의 가면을 쓰고 이다음은 어떤 수를 놓을까 골몰했다.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던 오브릭 자작과 달리 뉴엣 백작은 직위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신흥 귀족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이작의 능력을 높이 사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다녔다.

막스라는 방해물이 없는 상태에서 공작의 환심과 가신의 지원을 얻어 아이작은 높이, 한없이 높이 날아올랐다. 어설프게나마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지금, 아이작의 고민은 한가지였다.

어디까지 욕심내면 좋을까.

3월에 있을 가신 회의를 굳이 막스가 졸업한 후인 4월로 미룬 건 아이작의 계획이었다.

목적은 세 가지.

하나는 이런 식으로 막스를 도발해 불쌍한 차남을 연기함으로써 가신들의 호감을 얻어낼 것. 막스의 성격상 작은 도발에도 쉬이 넘어올 거라 짐작했고, 결국 뜻대로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생아 주제에 감히 공작위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가신들의 의혹을 사그라트리는 것과 마지막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슬쩍 눈을 들어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훑었다.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측은한 눈빛은 그의 의도대로였지만, 뭔가 아쉽게 느껴졌다.

아이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부풀어 오른뺨에 손을 올렸다.

“이 미천한 몸이 가문의 영광에 한 줄기 빛을 보탤 수 있다면 어떤 치욕이든 감내할 것입니다.”

서글픈 목소리와 달리 바닥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 속에는 반짝이는 이채가 서렸다.

“소공작님께서는 저를 저어하시지만 제 속에 흐르는 유프겐슐트의 피는 주군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가 되었든 소공작님께 충정이 닿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담담히 말을 맺으며 붉어진 눈시울로 게헤른과 뉴엣 백작, 디테른 자작에게 차례대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나. 세 명도,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가신들도 한껏 감격한 얼굴로 아이작에게 시선을 쏟아내고 있었다. 먹먹함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백작이 침음을 흘리며 좌중을 향해 무겁게 말문을 뗐다.

“여러분. 서전트 유프겐슐트가 그간 각하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모두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히 제안 드리건대, 그에게 늑대의 송곳니를 부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나친 발언에 움찔한 건 가신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작이 먼저 고개를 저으며 절박한 얼굴로 그를 거부했다.

“아닙니다. 그런 과분한 걸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는 유프겐슐트로서 의사 결정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본다.”

“아닙니다. 제가 수락한다면 소공작님께서 제 충정을 의심하실 겁니다. 그럴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늑대의 송곳니. 그건 아이작을 유프겐슐트의 핏줄로서 인정함과 동시에 가문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뜻이었다. 별것 없는 허례허식이지만 그 상징성은 결코 가볍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작이 원한 건 그런 허울뿐인 의사 결정권 따위가 아니었다.

기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놨는데, 멍청한 백작 놈 때문에 가신들의 눈빛에 재차 의심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저어 단호히 거절의 뜻을 밝혔다.

“부디 제안을 거둬 주십시오. 큰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작은 것들?”

꺼질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자 게헤른이 아이작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작은 고개를 들어 꿈꾸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언젠가… 저택을 떠날 때까지. 수발을 들어줄 전담 시녀 한 명 정도는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택 안에 작은 책상 하나 정도만 놓을 수 있다면… 그 외에는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전담 시녀도, 저택 내에서의 사무실도 스스로 귀찮다고 거절했으면서 아이작은 모순된 말을 하며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가여운 얼굴로 웃어 보였다.

웅성거림이 사그라들고 침묵 사이로 서로의 시선이 오고 갔다. 누군가가 혀를 차며 흘리듯 말했다.

“아무리 서전트 유프겐슐트가 적자가 아니라지만 수발들 시종 하나 내어주지 않았다니… 공작가의 체면이 있지.”

“저택 출입을 질색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소공작의 태도를 보니 알 만합니다. 그게 단순한 소문이 아닌…”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럼 그간 모든 일을 별채에 갇혀 혼자서…”

타박하는 목소리가 돌림 노래처럼 퍼져나갔다. 모멸 찬 시선들이 게헤른을 비난하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게헤른이 짧은 침음을 흘리며 그만, 하고 위엄이 서린 어조로 가신들의 말을 끊어냈다.

“여태 싫어서 거절한 줄 알았는데, 눈치 때문에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거냐.”

“…….”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더는 눈치 볼 것 없다. 막스에게도… 더 이상 네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 이르겠다.”

깊은 눈동자가 진심을 담고 아이작을 투영했다.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게헤른이 한숨처럼 말을 매듭지었다.

“앞으로는 당당해지거라.”

게헤른이 씁쓸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이작은 가신들을 주욱 훑어본 다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게헤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가신들은 벅찬 얼굴로 두 부자의 정감 어린 모습을 감상하기 바빴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들의 심금을 울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스스로 제 살길을 개척한 가여운 어린 양의 가면을 유지한 채 체스판의 전황을 뇌리에 펼쳐나갔다.

* * *

저택의 응접실 위로 삭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하녀들은 늘 청소가 끝난 뒤 해당 구역을 상급 하녀들에게 검사받고는 했다. 다시 하라는 명이 종종 있을 때도 있지만 달리아의 경우는 예외였다. 청소에 있어서, 그녀는 자타 공인 엘리트였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나쁘지는 않은데… 음. 끝나는 대로 잠깐 나 좀 보자.”

델마가 청소 상태를 눈으로 훑은 뒤 성큼 복도로 나가 팔짱을 꼈다. 어딘가 심각한 분위기에, 달리아는 걸레를 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눈치를 살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소파 커버를 정리하고 있던 에디나가 슬그머니 목을 빼 델마를 쳐다보았다. ‘심각해 보이는데’, 에디나의 말에 달리아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저었다.

저택에 온 초반에야 익숙하지 못해 실수를 연발했지만, 그 이후로 실수라고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만큼 일에 있어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달리아였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영 떠오르는 게 없어서 달리아는 찝찝한 마음으로 하는 둥 마는 둥 나머지 청소를 마쳤다.

마무리는 자신이 하겠다며 에디나가 등을 떠밀었다. 달리아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복도 끝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던 델마에게 다가갔다.

“청소 끝났는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별건 아닌데… 일단 같이 좀 가자.”

아무런 설명 없이 델마가 본관을 향해 몸을 틀었다.

청소에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긴, 델마는 한 번에 몰아서 화를 냈으면 냈지 일일이 트집 잡는 성격은 아니었다.

본관에 할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며 뒤를 따르던 달리아는 본관을 지나 사무실로 이어지는 회랑에 다다라서야 델마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오랜만이구나.”

도착한 곳은 하녀장인 미시즈 프라다의 사무실이었다.

아침조회마다 근엄한 얼굴로 훈계를 이어가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미시즈 프라다는 자애로운 얼굴로 달리아를 맞이했다.

달리아는 난처한 심정으로 델마와 미시즈 프라다를 연신 돌아보았다. 미시즈 프라다가 직접 전달할 만큼 중요한 사항은 지금으로서는 한 가지뿐이었다.

상급 하녀로의 진급 건.

가신 회의가 끝나는 대로 진급할 거라는 말과 달리 사흘이 넘도록 미시즈 프라다도, 델마도 진급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있었다. 바빠서 미뤄진 거라 생각하며 좋게 넘어갔지만, 미시즈 프라다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저기, 저를 부르신 이유가 혹시… 진급을 취소하려고 부르신 건가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러자 미시즈 프라다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진급… 진급…?”

“왜, 그… 상급 하녀로 진급시켜 주신다는 말씀이 있었는데요.”

“아아. 그렇지. 그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취소는 아니고.”

미시즈 프라다가 델마를 힐끗 쳐다보며 본인 대신 말을 이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무던한 얼굴로 곁에 서 있던 델마가 짤막한 한숨과 함께 답을 내뱉었다.

“상급 하녀로 진급은 취소야.”

달리아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삽시간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취소라는 말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깨달은 델마가 드물게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상급 하녀 대신! 작은 도련님께서 네게 전담 시녀 직을 내리셨거든. 달리아, 너는 이제부터 도련님 직속의 전담 시녀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달리아가 눈만 깜빡이며 델마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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