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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 제안을 받았을 때,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기쁨도 컸지만 무엇보다 월급이 인상된다는 사실에 달리아는 두말할 것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열아홉. 이제 곧 스물.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이쯤이면 4골드를 모았어야 했다. 그러나 달리아는 목표했던 저금액을 달성할 수 없었다.
지난겨울, 여동생의 병환으로 모아뒀던 돈의 대부분을 써 버린 탓이었다.
3골드 50실버까지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순식간에 2골드로 줄어 버렸다. 로렐의 발작이 멎은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5골드를 모아 꽃가게를 차린다던 그녀의 꿈은 성큼 멀어져 버렸다. 그런 와중에 진급 제안이 왔으니, 달리아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지금보다는 바쁘겠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필요할 때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올게요. 그러니 도련님,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달래듯 말하자 잔뜩 주름져 있던 아이작의 미간이 슬쩍 느슨해졌다. 그래도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은 여전했다.
몸은 이렇게 커서 하는 짓은 예전과 별다른 게 없으니,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아는 가벼운 포옹으로 그를 달랜 뒤 웃는 얼굴로 방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홀에 다다른 찰나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보며 아는 척 눈짓을 건네왔다. 달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여 반가움을 표했다.
“후버 씨. 요즘 바쁘신가 봐요. 별채에서도 자주 못 뵙네요.”
아이작이 바빠서 덩달아 바빠진 후버는 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느새 달리아와 친해져서 매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바쁘냐는 말에 후버가 휴,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바쁜 모양이다.
“도련님 뒤치다꺼리를 너만 하는 게 아니잖아. 주제에 맞지 않는 정보원 일을 하려니 바빠죽겠다. 뭐 아무튼, 이리 좀 와 봐.”
늘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모습과 달리 후버가 다소 지친 기색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하얀 레이스 장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달리아에게 건넸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지? 이거 카를라 아가씨께서 두고 가신 건데 네가 좀 전해드려.”
“아가씨 거에요? 이게 왜 후버 씨한테 있어요?”
“깜박 잊으셨나 보지.”
담백한 답변이 의혹에 불을 지폈다.
물건을 훔칠 만큼 쩨쩨한 사람은 아닌데. 혹시 아가씨를 연모하는 건가? 몰래 빼놓고 가지고 다니다가 마음에 걸려서 지금 되돌려 주는 거라든가…
달리아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후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됐고 전해드리기나 해.”
던지듯 달리아의 손에 장갑을 떠넘기고서 후버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덥수룩한 붉은 머리카락이 잔불처럼 시야에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 * *
상징성 때문인지 아니면 인구 밀도가 가장 높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공화국민들은 수도를 가장 큰 영지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넓은 영지는 서북부의 종주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인 헬만이다.
가장 광대한 영지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아무리 유프겐슐트 공작가가 대단하다 한들 혼자 힘으로 이 넓은 영지를 다스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때문에 공작가는 서른 개로 구획을 나눠 가신들에게 시장직을 부여해 효율적으로 영지를 운영했다.
오늘은 1년에 단 두 번, 가신들이 전부 모여 회담을 나누는 상반기 회의였다. 그리고 소공작인 막스와 배다른 자식인 아이작이 각각 후계자와 영주 보좌로서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첫 회의이기도 했다.
그를 의식하듯 막스는 아침부터 신경질적인 태도로 하녀들을 닦달하더니 긴장을 떨쳐내지 못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와 달리, 게헤른 좌측에 자리한 아이작은 늘 그렇듯 초연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흑색 정장과 고급스러운 장신구로 치장한 이복동생은 어느덧 성숙한 청년의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얀 셔츠차림으로 털래털래 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무척이나 의젓한 자태였다.
웃기지도 않는군.
사생아가 버젓이 보좌랍시고 앉아 있음에도 호의적이기만 한 시선들, 그와 달리 서먹하게 자신에게 농을 건네는 노인들의 목소리, 감히 영주의 좌측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꼬락서니까지 모든 것들이 막스를 못 견디게 했다.
막스는 손톱 깨물지 않기 위해서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해당 구간 시운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열흘 뒤 철로 개통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로써 서쪽 구간까지 노선이 완료되었으니, 유통에 대대적인 개선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는 중입니다.”
마지막 보고가 끝나자마자 원로인 디테른 자작이 흐뭇한 얼굴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빨리 노선을 확장하다니, 전부 보좌 덕분이야. 레일을 교체한 덕에 안정성도 높아지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얼마 전 골머리를 앓았던 운하 문제도 그대의 자문 덕에 해결했다 들었네. 과연, 피는 못 속이는구먼. 각하께서 자랑하실 만도 해.”
디테른 자작이 말을 덧붙이자 게헤른이 아이작은 자신과 다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곁에 있던 가신들이 맞장구를 치고, 웃음과 농담이 테이블 위로 오고 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는 막스 뿐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기 위해 얼굴을 내보인 자리였다. 오늘 이 자리는 막스로서는 숙녀들의 데뷔탕트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주목은커녕 지긋지긋한 사생아 동생 놈이 모든 이목을 앗아가 버렸다.
자신이 저택을 비운 사이, 아이작이 슬금슬금 세를 키웠다는 사실은 막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가신들을 회유해놨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머저리들뿐이구나.
철로? 운하 문제?
그딴 게 다 무슨 필요가 있다고. 저놈이 똑똑해봤자 창부의 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려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저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잇새로 욕을 짓씹으며 아버지를 향해 사나운 눈초리를 쏘아 보낸 찰나, 게헤른의 우측에 앉아 있던 뉴엣 백작이 싱긋 웃으며 막스의 눈길을 받아쳤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 오늘이 우리 소공작께서 정식으로 가신 회의에 참석한 자리가 아닙니까.”
뉴엣 백작이 막스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모든 가신들이 막스를 향해 관심을 던졌다.
바짝 굳어 있던 막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분위기, 이 관심. 이를 위해 공작 저로 돌아온 것이었다. 마뜩잖은 기분은 여전했지만 굴종이 섞인 가신들의 시선으로 단단히 엉겨 있던 마음이 슬쩍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학교를 마치고 제 자리로 돌아오셨군. 배움은 충분하셨소?”
디테른 자작이 기다렸다는 듯 인자한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의례상 던진 질문이었겠지만, 최악의 성적표로 졸업한 막스로서는 허를 찌르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씁쓸한 기색을 알아챈 디테른 자작이 한결 너그러운 어조로 자문자답했다.
“퍼블릭 스쿨의 교육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지. 졸업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오.”
“……감사합니다.”
“소공작과 동문이라니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럽구먼.”
동의를 구하듯 디테른 자작이 뉴엣 백작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뉴엣 백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간 배우셨던 것들이 소공작의 초석이 되어 영지를 꾸리는 데에 유용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마침 소공작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서전트 유프겐슐트가 후계의 보좌를 위해 지식을 가다듬으며 소공작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전트는 작위가 없는 평민 가신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유프겐슐트는 이 자리에서 가장 고결한 귀족의 성이었다.
서전트 유프겐슐트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어리둥절해 하던 막스는 뉴엣 백작의 눈길이 이복동생을 향해 있는 걸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프겐슐트. 서전트 유프겐슐트?
가지가지 하는군. 대체 무슨 묘수를 부렸길래 가신들을 이따위로 홀려 놓은 거지?
하도 황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입속으로 욕을 굴리던 막스가 비아냥 섞인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서전트 유프겐슐트라니. 설마 아이작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대가 학업에 전념하는 동안, 공작 각하 곁에서 보좌의 기초를 배우고 있었지요.”
빠득, 막스가 이를 갈며 뉴엣 백작을 노려보았다. 이르미나를 빼다 박은 파란 눈동자 속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갖다 붙일 게 따로 있지, 저 사생아 새끼에게 감히 서전트와 유프겐슐트를 갖다 붙입니까?”
온화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서늘한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경악하며 막스를 쳐다보던 디테른 자작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공작. 가신들 앞에서 단어를 유의하는 게 좋을 것이오.”
“디테른 자작, 진심으로 하는 말이시오? 진짜 유프겐슐트 앞에서 저런 반쪽짜리 핏줄을 유프겐슐트라고? 노망나셨소?”
“소공작!”
“지금 가신 회의 중이오! 말조심을…!”
“닥쳐!!”
쾅, 탁자를 내려치는 소음에 모든 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들을 막기 위해 게헤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보다 더 빨리 막스가 걸음을 옮겨 아이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타는 듯한 눈으로 이복동생을 쳐다보는 막스와 달리 아이작은 무감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감내하기만 했다. 뚫어져라 검은 눈동자를 직시하던 막스가 뒤늦게 아이작의 속내를 파악했다.
때릴 테면 때려보든가.
난 잃을 게 없거든.
몰라보게 성장한 외양과 다르게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저 검은 눈동자는 어린 시절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하찮은 미물을 내려다보는 듯한 저 눈. 저 눈…!
지금 아이작을 때리면 자신에게 이득 될 일이 없다는 걸 막스 또한 잘 알았다. 이득은커녕 철부지 후계자라는 비난과 함께 이 빌어먹을 사생아 새끼에게 동정이 쏠릴 터였다.
때리면 안 돼.
잘 알지. 그래. 아는데, 안 되는데.
그러나 본능은 그의 이성을 거부하고 주먹을 허공에 치켜올리는 쪽을 택했다.
“발칙한 새끼…!”
거센 타격음과 함께 아이작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가신들에게서 탄식과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이작!”
“무슨 짓이오, 소공작!”
뒤늦게 게헤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스는 분노에 취해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아쉽게도 감정이 잔뜩 실린 주먹은 가신들의 저지로 인해 애꿎은 허공만 때려댈 뿐이었다.
“읏….”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작이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터진 입술에서 점점이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게헤른이 버럭 화를 내며 시종을 불렀다.
“당장 막시밀리언을 끌어내라! 당장!”
“감쌀 게 따로 있지, 저런 창부의 자식을 감싸? 당신들 전부 미친 거 아니야? 감히 유프겐슐트의 이름을 저런 놈한테 들먹여!”
악다구니를 쓰며 막스가 저주를 퍼부었다. 거친 목소리와 함께 그를 말리는 가신들의 외침과 노기 섞인 게헤른의 호통이 혼재되어 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위병 둘이 그를 끌어낸 후에야 회의실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괴악스러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아이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