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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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엣 백작이라는 단어에 달리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에디나는 너무 좋아하는 티 내지 말라며 구박하더니 정작 달리아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마 백작님이 나서서 분위기를 이끌었으니 망정이지 그분도 안 계셨다면 엄청 삭막했을 거야.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예민할 거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백작님이 설명하시니 다른 가신들도 그러려니 하더라고.”

뉴엣 백작이라면 공작의 오른팔이라는 오브릭 자작을 제치고 가장 촉망받는 가신으로 떠오른 자였다. 또한, 아이작을 비호하는 대표적인 가신이기도 했다.

서글서글하고 매너 있는 태도는 모두의 호감을 사기 충분했다. 달리아 또한 아이작을 아끼는 그의 모습에 호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보지 않았음에도 백작이 어떤 식으로 상황을 무마했는지 충분히 알 것만 같았다.

하긴, 옛날과는 다르니까.

막스의 귀환 소식을 듣고 혹여 아이작이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달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티끌 하나 없는 창문 너머, 초록으로 둘러싸인 별채의 지붕이 보였다. 봄의 잔양이 내리쬐는 푸른 지붕이 오늘따라 유독 평화로워 보였다.

* * *

막스가 없는 동안 저택은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카를라의 약혼, 가신들의 세대교체. 여러 일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이작의 위치였다.

사생아로 배척받던 아이작은 불과 삼 년 만에 가문의 조력자로 새로이 거듭났다. 그가 막스에게 맞설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공작의 후원과 뉴엣 백작의 지원이 있었다.

달리아의 응원 덕분인지 다른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이작은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작 곁에서 수행 비서로 따라다니던 아이작은 이제 공작의 보좌로서 위치를 굳건히 한 상태였다.

“도련님. 이것 좀 봐 주세요.”

달리아가 품 안의 상자들을 갈무리하며 아이작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막상 달리아를 맞이한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아이작은 아버지가 불러서 본관에 갔어. 무슨 일이야?”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카를라가 금박을 입힌 책갈피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회용 드레스 차림인 걸 보니 약혼자를 만났다가 곧장 별채로 온 것 같았다.

언제봐도 우아한 자태였다. 달리아는 장미 덩굴무늬가 수 놓인 드레스 자락을 홀린 듯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별건 아니고요. 그냥 마음에 드시나 확인하고 오라고 하셔서.”

층층이 쌓인 상자를 쳐다보던 카를라가 대신 확인해 주겠다며 상자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뭐야. 커프스단추… 브로치? 타이에 시계 줄까지 있네. 이게 다 뭐니?”

“그게… 도련님께서 조만간 있을 가신 회의에 정식 보좌로 참석하신다고 해서요. 주인님께서 주문하신 물건들이에요.”

가문 문장이 상감되어 있는 커프스단추, 백금 시곗줄에 에메랄드와 백금으로 이루어진 브로치까지.

가격을 가늠할 수 없는 호화로운 장신구들이 티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모두 게헤른이 아이작을 위해 맞춘 것들이었다.

아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생각에 달리아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카를라는 눈매를 찡그린 채 추잡스럽다는 시선으로 장신구들을 내려다보았다.

“하여간 아버지도 참. 여전히 아이작을 그 여자 대신으로 보고 있는 건가.”

흘리듯 중얼거린 말에 달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음이 나오기 전에 문이 열리며 기다리던 당사자가 등장했다.

“달리아. 오늘은 일찍 왔네.”

변성기를 지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반가움을 담고 자신의 하녀를 불렀다.

환한 얼굴로 방에 들어선 아이작이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카를라를 보고 미소를 꺼트렸다. 그를 빤히 보고 있던 카를라가 냉소적인 미소로 그에 화답했다.

“온도 차가 아주 극심하시네.”

“여기 있을 줄은 몰라서. 어쩐 일이야?”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거야. 됐고, 여기 아버지께서 손수 준비한 뇌물이나 확인하시지 그래.

카를라가 브로치를 들어 아이작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어리둥절한 동생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녀는 도도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브로치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달리아에게 향했다. 시곗줄을 만지작거리던 달리아가 냉큼 달려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주인님께서 갖다드리라고 해서 갖고 왔어요. 며칠 후에 가신 회의가 있다면서요. 옷은 있지만 장신구는 거의 없을 거라고…”

“…굳이 필요 없는데.”

“마음에 안 드세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요란한 건 보기 안 좋을 것 같아서.”

달리아가 아이작이 들고 있던 브로치를 들어 올렸다. 달리아는 그의 목에 장식된 까만 크라바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서툰 손길로 브로치를 크라바트에 꿰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달리아를 좇던 아이작이 턱 밑으로 다가온 다갈색 정수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수리 아래 느리게 깜박이는 갈색 속눈썹, 그 아래 브로치를 들고 바르작거리는 가느다란 손가락, 코끝을 스치는 그녀의 체향까지.

모든 게 지나치게 가까웠다.

아이작은 초조한 기분으로 느릿하게 침을 삼켰다.

“요란하기는요. 도련님께서는 평소에 너무 수수하게 다니시니까 조금 화려해도 괜찮아요. 브로치가 까만색이라서 더 잘 어울리시네요.”

쾌활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달리아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덕분에 목울대가 일렁이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작은 속으로 안도하며 은은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달리아가 괜찮다면 나도 좋아.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전해 줄래?”

“네. 주인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달리아가 테이블 위에 늘어선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곗줄, 단추, 행커치프 다음으로 넥타이에 손을 뻗은 순간,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작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넥타이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이거 마음에 드는데… 한 번 매어 보고 싶어. 달리아가 좀 매 줄래?”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리니 달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작의 크라바트를 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정수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시간의 흐름은 아이작에게도 여과 없이 적용되어, 이제 두 사람은 엇비슷한 시선을 공유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더는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라버렸다.

아이작은 기뻤다. 그녀를 내려다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오랫동안 사회에 시달려왔기 때문인지, 달리아는 순진한 듯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늘 기민하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는 종종 아이작도 몰랐던 그의 내면을 손쉽게 파악해냈다. 때문에 눈높이가 비슷할 때는 늘 표정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괜찮은 척, 불쌍한 척, 태연한 척. 그리고 욕정하지 않는 척.

다른 감정은 숨기기 쉽지만 마지막은 숨기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낯선 것도 그렇거니와 애초에 그런 감정이 드는 상대가 달리아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고 있으면 끌어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버려진 개가 주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그녀에게 하염없이 달라붙고 싶은 욕망은 참는다 해서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몸도 커져서 흥분을 쉬이 제어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아이작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겉으로는 태연한 미소를 떠올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참 좋았다. 높은 시선으로 그녀의 모습을 관조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녀가 눈길을 들어 올릴 때 외에는 굶주린 짐승 같은 표정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정말 편했다.

아이작은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달리아의 허리에 슬쩍 손을 둘렀다.

“달리아, 넥타이 매 본 적 거의 없지? 손길이 서툴러.”

“그야 도련님께 해드릴 때 외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도련님은 목에 뭐 매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자주 해드려야 숙달될 텐데 영 익숙해지지 않네요.”

말을 들은 순간 아이작의 뇌리에 르네의 손길이 스쳐 지나갔다.

뾰족하게 다듬은 손톱이 목을 스쳐 강하게 움켜쥐는.

지금 와서는 같잖은 악력이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충분히 위협적인 힘이었다.

“조금…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

그 곱고 가냘픈 손과 지금 자신의 목 주변을 배회하는 작고 투박한 손은 전혀 다르다. 아이작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싱긋 웃고서 허리를 붙든 손을 조금 더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서툴러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오늘은 시간 많거든.”

“오후에 주인님과 외출하기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조금은 늦어도 괜찮아.”

어차피 급한 건 내가 아니니까.

말을 삼키며 싱긋 미소지으니 달리아가 안도한 표정으로 다시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정수리에 바짝 코를 갖다 대고서 그녀의 체향을 조심스레 음미했다.

이후로는 평소와 비슷했다. 달리아는 흐뭇한 얼굴로 아이작의 매무새를 살피고, 익숙한 손길로 방과 옷들을 정리했다.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문 앞에 섰을 때였다.

“달리아. 곧 상급 하녀로 진급한다면서?”

몰래 숨겨왔던 소식을 아이작의 입으로 들은 순간,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어떻게 아셨어요?”

“델마가 알려 줬어. 연차도 오래됐으니 이번에 가신 회의가 끝나면 달리아를 상급 하녀로 진급시킬 거라고 하던데.”

“아, 진급하고 나서 직접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말씀하시니까 맥이 빠지네요.”

“왜? 깜짝 놀래켜 주려고 한 거야?”

아이작이 웃으며 물었다. 달리아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아이작은 웃음을 거두고 서운한 표정으로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진급하는 건 축하할 일이지만 상급 하녀가 되면 지금보다 훨씬 바빠질 텐데. 이래서야 자주 볼 수 있겠어?”

“요즘은 도련님도 바쁘시잖아요. 이틀에 한 번은 고사하고 사흘에 한 번 뵐까 싶은걸요.”

“…그래도.”

시무룩한 반응에 달리아가 난처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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