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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의 주변을 맴돌던 여유로움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경계 서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이를 마주한 채 아이작이 느슨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걱정 마. 그렇다고 해서 이 집안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그냥… 적어도 성년이 돼서 저택을 떠날 때까지 가신 자리 하나쯤 차지할 여력은 갖춰야지.”
“…답지 않은 짓을 하네, 아이작.”
지저귀듯 낭랑하게 울리던 그녀의 어조에 차갑게 날이 섰다.
“죽을 때까지 별채에 처박혀서 살 생각 아니었어? 저택에 올 때 나한테 그랬던 것 같은데.”
“5년 전 얘기를 지금까지 끌고 오는 건 반칙이지. 사람은 변화하는 동물이잖아.”
“막스한테도, 어머니한테도 정면으로 반박하겠다는 거야? 지금 아버지와 붙어 있는 걸로도 어머니께서 칼을 갈고 계시는데?”
“그건 나도 알아.”
“네가 설치면 나한테도 피해가 온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잊어버린 거야?”
카를라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아이작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네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그런데 무슨… 너. 그 하녀가 어떻게 될지 감당할 수 있겠어?”
“카를라.”
늘어져 있던 손이 카를라의 팔을 스쳐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하얀 진주 목걸이 위로 그보다 더 하얀 손이 닿을 듯 말듯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주변을 배회했다.
팔을 향해 시선을 떨구고 있던 카를라가 천천히 눈길을 들어 올렸다. 나른하게 뜬 까만 눈동자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과 비등할 정도로 키가 큰 이복동생에게서 음습한 박력이 느껴졌다.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야.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네가 제일 먼저 가르친 게 이거잖아. 그래서, 그 하녀를? 어떻게 하려고?”
“…….”
“제발, 바보 같이 곧이곧대로 듣고 감정에 휩쓸리지 말란 말이야. 나라고 네게 해를 끼치고 싶겠어?”
목걸이를 스친 손길이 카를라의 턱선을 부드럽게 쓸었다. 차마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카를라는 천장으로 시선을 둔 채 빳빳하게 굳은 턱을 힘겹게 움직여 말을 뱉었다.
“뭘 어쩌려는 거야.”
“방금 말한 대로. 적당히 네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다가 준 남작위 하나쯤 얻어서 저택을 떠날 거야. 날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두 인간들이야 사생아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난리 치겠지만, 이 정도는 얻을 만한 자격 있잖아?”
“…정말로 그게 전부라고?”
“그럼 뭐. 설마 공작위라도 노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이작이 실소를 흘리며 카를라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아냐.”
빈정대는 어투와 달리 몸짓 하나하나마다 기품이 넘쳐흘렀다.
“성인이 되는 즉시 네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 애정 문제도 계속 함구할 거고. 대신, 그 전까지는 너도 날 도와야 해. 조용히 살고 싶으면 내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명령하는 거야?”
“아니. 나 따위가 어떻게 감히 유프겐슐트 영애께 명령을 내리겠어.”
“…….”
“그냥 서로 협력하자는 것뿐이야.”
손을 거둔 아이작이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카를라 앞으로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제스쳐에 카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아이작의 손을 쳐냈다.
“나한테 선택권이 없는데 협력은 무슨 협력이야. 치워.”
“매정하네, 누님.”
누님이라는 말에 카를라가 질색하며 아이작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불쾌해하기는커녕 웃는 낯으로 ‘왜 그래, 무섭게’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대로 살아 본다고?
너 같이 뒤틀린 인간이 그렇게 애써 본들,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시큰둥한 얼굴로 있는 둥 마는 둥 살던 인간이 생기 가득한 모습을 보이니 소름이 끼쳤다. 속으로 중얼거린 카를라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굵어진 눈발이 숲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 * *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봄이 찾아와 헬만을 연둣빛으로 물들였다. 연둣빛 녹음이 진초록으로 바뀌며 여름이 지나가고 초록 잎새가 붉게 물들어 가을을 알린다.
봄,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이 교차하고 그렇게 세 번의 겨울이 지났다.
생명이 사그라든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싹을 틔웠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자라나는 건 식물뿐만이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저택을 둘러싼 나무들이 한 겹, 한 겹 나이테를 둘러갈수록 막내 하녀의 외양도 성숙해져 갔다. 제 키보다 큰 대걸레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다니던 소녀 대신 부드러운 굴곡이 돋보이는 아가씨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저택을 바삐 쓸고 닦았다. 움직일 때마다 굽이치는 갈색 머리카락이 날씬한 허리 주변을 살랑거렸다.
“달리아. 점심 먹었어?”
먼저 청소를 끝마친 에디나가 밝은 얼굴로 달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성인이 되면서 훌쩍 키가 큰 달리아와 다르게 에디나는 여전히 작고 앙증맞은 체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달리아는 들고 있던 걸레를 접고서 웃는 얼굴로 에디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까 먹었어. 오늘 식단이 엄청 화려하던데.”
“그렇지? 오전에 소공작님 졸업 기념 연회가 있었잖아. 그 덕분이지.”
“초대 손님이 그렇게 많았는데 우리 몫까지 음식을 했어?”
“마님께서 아주 정성 들여서 연회를 준비했잖아? 음식이 엄청 남아서 우리한테까지 온 거래. 초콜릿 케이크가 후식으로 나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지.”
활짝 핀 얼굴의 에디나와 달리 달리아는 씁쓸한 얼굴로 마지못해 웃었다. 막스를 떠올린 순간, 어제의 일이 함께 떠오른 탓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집에 오지 않을 거라는 선포와 함께 막스는 졸업 때까지 내내 기숙사에만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저택의 모두가 평화로운 나날을 구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온이 유독 달콤했던 이유는 이 유예기간이 머지않아 끝난다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헬만으로 돌아온 막스는 그간의 평화가 무색할 만치 사나운 태도로 저택을 파란으로 몰고 갔다.
물론, 파란의 중심에는 그가 가장 증오하던 이복동생이 있었다.
피로에 젖어 짜증스러운 얼굴로 저택에 들어선 막스는 본관에서 아이작을 마주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흉흉한 어조로 시비를 걸었다.
‘나 없는 사이에 후계자가 바뀌었나? 별채가 아니라 본관에서 네 낯짝을 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