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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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봉투에는 익숙한 글씨로 ‘로렐 벨로흐 보냄’이라고 쓰여 있었다. 에디나는 입술을 삐쭉 내민 채 부럽다는 얼굴로 달리아의 옆에 풀썩 드러누웠다. 

“너랑 로렐은 우애도 참 좋다. 열흘에 한 번은 꼭 편지를 보내잖아. 내 동생들은 지들 학비 대는 사람이 나인 줄도 모를 텐데.”

“무슨. 너희 형제들은 우리보다 더하잖아. 편지마다 누나 보고 싶다는 말이 열 번은 쓰여 있던 걸?”

“…그랬나?”

“저번 휴가 때 막냇동생이 가지 말라며 치맛자락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면서. 로렐은 나한테 응석 부리는 일이 없는데, 그런 거 보면 조금 부러워.”

머쓱한 얼굴로 침대를 뒹굴거리던 에디나가 이불을 들어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괄괄한 성격과 달리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은 같은 여자가 봐도 귀엽기 그지없었지만, 웃으면 또 왜 웃냐며 타박할 게 뻔하기에 달리아는 웃음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휴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달리아. 이번 연말에도 구빈원으로 가?”

“별일 없으면? 그런데 휴가 가려면 아직 멀었잖아.”

“멀기는. 내일모레면 12월인데.”

벌써 그렇게 됐나. 놀란 달리아가 편지 봉투에 찍힌 소인을 확인해 보았다.

11월 28일, 주도 아레츠헬만의 도장이 찍힌 소인을 본 후에야 뒤늦게 날짜가 실감이 났다.

“시간 빠르네… 그런데 휴가는 왜 물어봐?”

“혹시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에 같이 갈래? 동생들이 너 보고 싶다고 꼭 한번 데리고 오라고 했거든. 괜찮으면 로렐도 같이 초대하고 싶어. 집이 좁아서 그렇게 편하지는 않겠지만…”

가족애로 똘똘 뭉친 에디나의 집은 그간 들어온 이야기로 봐서 무척 시끌벅적하고 화목한 곳인 것 같았다.

가면 즐거울 텐데. 달리아는 미간을 추어올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겨울에는 로렐의 천식이 심해지니까 늘 조심해야 하거든. 게다가 요즘 계속 미열이 있다고 해서, 이번에 간 김에 의원에 한 번 데려가 볼까 봐.”

“저런… 열 있다고 한 게 추수절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 넘지 않았어?”

“응. 이번엔 유난히 오래가네.”

“그럼 어쩔 수 없네… 휴가 전까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에디나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울한 분위기가 싫어 달리아는 애써 입매에 힘을 줘 싱긋 웃어 보였다.

겨울은 늘 이랬다. 온화한 공기를 몰고 와 만물에 꽃을 피워 생명을 북돋는 봄도, 봄의 잔재를 끌어올려 활기를 띠게 만드는 여름도, 응축된 활기로 성장의 증거를 남기는 선선한 가을도 모두 로렐을 성장시키는 밑거름 중 하나였지만 겨울만은 달랐다.

삭풍으로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겨울은 들판의 생명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로렐의 건강까지 야금야금 앗아갔다.

이제는 지겨울 만치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지는 것과 걱정하는 마음은 별개였다. 달리아는 편지 봉투를 움켜쥔 채 속으로 기원했다.

그저 올해도 별일 없기를.

로렐이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기를.

* * *

“달리아. 올해도 구빈원에 가?”

책을 필사하고 있던 아이작이 문득 고개를 들며 질문을 던졌다.

똑같은 질문만 다섯 번째였다. 그러나 달리아는 싫은 내색 없이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갈 곳도 없고, 동생도 보고 싶고 해서요. 올해는 작년보다 하루빨리 출발할 것 같아요.”

“나도 가고 싶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말도 안 된다며 타박하는 대신 달리아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상관없지만, 도련님은 주인님과 함께 국경 시찰 가신다면서요.”

아이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손에 들고 있던 펜에서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달리아가 기함하며 걸레를 집어 들었다.

“각하와 함께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이작이 미간을 찡그린 채 펜 끝에 고인 잉크를 벨벳 천으로 닦았다. 달리아는 얼룩이 남지 않았나 확인한 뒤 읏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또 약한 소리 하신다. 저번에 사냥 대회도 함께 가시고 철교 시찰도 함께 다녀오셨잖아요. 아직도 주인님이 불편하세요?”

“난 달리아 외에는 다 불편해.”

아이작으로서는 꽤 진심 어린 말이었지만 달리아는 아하하, 하고 싱겁게 웃기만 했다.

“도련님은 불편하시겠지만 주인님께서는 얼굴이 아주 좋으세요. 도련님과 함께 여가를 보내는 게 즐거우신가 봐요.”

“그야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말벗을 찾았으니 노인 입장에서는 데리고 다니는 게 즐겁겠지.”

시큰둥한 말투에도 달리아는 에이, 작게 타박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주인님의 반응만 좋은 게 아니에요. 요즘은 저택에서도 도련님 얘기가 많이 들리거든요? 작은 도련님께서 이렇게 미남이셨느냐, 매너가 너무 훌륭하시다, 어린 나이인데도 무척 다부지시다!”

“어린 나이는 빼 줘.”

“…무척 다부지시다! 전부 칭찬이에요. 괜히 저까지 어깨가 으쓱 하더라구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달리아를 쳐다보던 아이작은 다시 책과 서류로 시선을 옮겨왔다.

“공작 부인은 안색이 점점 더 나빠지던걸. 각하께서 나를 치켜세우려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괜히 화를 돋을까 봐 걱정이야. 특히… 막스가 저택에 오면 어떨지.”

“에이, 소공작님은 졸업 때까지 학교에만 계실 거라면서요. 그리고 부인께서는 요즘 다른 일로 정신없으시니까 도련님께 해코지 할 일 없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 달리아에게 해코지 할까 봐 걱정되어서 한 말인데 되레 격려를 받고 말았다. 아이작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볍게 날숨을 뱉었다.

“무슨 일로 정신없는데?”

“도련님은 못 들으셨어요? 카를라 아가씨의 약혼 날짜가 드디어 잡혔대요.”

“카를라가…? 그게 언제야?”

“내년 3월 중순이라고 들었어요.”

곧게 펴져 있던 미간에 설핏 주름이 졌다. 아이작은 달리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미간을 누른 채 단단히 입매를 굳혔다.

아군도 적군도 아닌 방관자의 위치를 고수하던 카를라는 쓸데없는 짓 말라며 겁박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달리아를 이용해 아이작에게 호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얄팍한 수를 읽지 못할 아이작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저의가 명백히 긍정적인 쪽이라는 걸 파악한 이후로는 최대한 카를라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그녀의 밤 소풍 또한 적당히 눈감아 주고 있었다.

……카를라가 약혼이라.

좋아하는 이가 있음에도 내키지 않는 상대와 약혼할 생각이 들다니. 대단한 듯싶으면서도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눈앞의 하녀를 보고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약혼. 결혼…

결혼.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약속.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과.

“벌써 두 달 전부터 약혼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대요. 그래도 시간이 촉박하다나… 아가씨께서 시착하시는 거 옆에서 도와드렸는데, 드레스가 얼마나 화려한지 몰라요.”

“…그래?”

“네. 레이스를 몇 개를 썼는지 일일이 셀 수가 없어요. 게다가 진주 장식이 프릴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하나도 과하지 않고 예쁘기만 하더라고요.”

달리아가 꿈꾸는 듯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드레스를 회상했다.

상급 하녀의 말로는 그 약혼식 드레스가 달리아의 목표인 5골드는 가뿐히 상회하는, 아니 두 배는 넘는 가격일 거라 했다. 가격을 들은 순간 손이 달달 떨려와 달리아는 곁에서 함께 옷 시중을 들던 시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집값만큼 비싼 드레스를 걸치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상상해도 정말…”

“부러워?”

“당연히 부럽지요! 그런 드레스를 입고 좋아하는 사람과 약혼이라니. 모든 여자의 로망일 거예요.”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아이작의 손이 펼쳐진 책 모서리를 슬슬 쓸었다.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참 허황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달리아가 한 말이 꼭 자신에게 내뱉는 프러포즈처럼 들렸다. 그런 드레스를 입고 좋아하는 사람과 약혼. 여자들의 꿈.

그게 과연 여자들만의 꿈일까.

턱시도를 갖춘 채 웃고 있는 네 옆에서 영원을 맹세하는 것. 지금 내가 꾸는 꿈은 여자라서 꾸는 게 아닌데.

자조 섞인 미소가 스치듯 입가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아이작은 눈동자만 움직여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럼 달리아는.”

“네?”

“그런 드레스 입혀 준다고 하면. 나랑 약혼할 거야?”

아이작은 담담한 얼굴을 애써 가장한 채 흘리듯 물었다.

완벽한 가식의 유일한 오점이라면 책 모서리를 쓸어내리는 검지가 살짝 떨리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약혼이요?”

깜박깜박, 빠르게 움직이는 초록 눈동자 속에 무감정한 얼굴의 자신이 비친다. 생기 넘치는 눈동자 속에 음침하게 담겨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아이작은 설핏 한 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어떨까.

농담 같은 분위기에서, 농담처럼 이야기했고.

너는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테지. 웃으면서 그럴까요, 하거나 무슨 장난이냐며 웃어넘기고 말 테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난이더라도 만약 네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

그러면…

“상대가 도련님이라면, 그런 드레스 안 입혀 주셔도 약혼할 수 있어요.”

달리아가 가늘게 휜 눈매로 아이작을 마주 보며 살짝 깨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위로 끌어올렸다.

순수한 미소에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어조. 책상에 양손을 얹은 채 개구진 표정으로 아이작을 올려다보는 저 얼굴.

“도련님처럼 잘 생기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빈손으로 청혼하더라도 어떤 여자든 다 넘어올걸요.”

산뜻하게 울려 퍼지는 미성이 귓가를 간질이다 그대로 가슴에 파고들어 왔다.

모서리를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눈으로 보일 만큼 크게 떨려왔다. 아이작은 조심스레 손을 내려 허벅지 부근을 꽉 움켜쥐었다.

분수처럼 치솟는 감정을 힘겹게 목 안으로 끌어내리며 필사적으로 가식을 유지했다.

“그런 말… 영광이네.”

간신히, 목소리가 떨리는 걸 참아냈다.

그러나 자신을 억제하는 데에 슬슬 한계가 느껴졌다. 그냥 농담일 뿐이라고, 웃으며 넘어가면 그만이라고 이성이 외치고 있었지만 본능은 달콤한 말을 더 듣고 싶다며 아이작을 충동질해댔다.

“…그럼.”

얼마나 오래 깨물고 있었는지 어금니가 저릿했다. 결국 아이작은 본능에 손을 들었다.

“그럼… 드레스 입혀 줄 테니까. 반드시 그것보다 화려한 걸로 해 줄 테니까… 달리아. 나랑 약혼해 줘.”

흔들리던 눈동자에 힘을 줘 달리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새카만 눈동자 속에, 동그랗게 눈을 키운 달리아의 얼굴이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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