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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었지만 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카를라의 드레스 룸에 수북이 쌓여 있던 철 지난 드레스들, 그중에 하나라도 한 번쯤 입어 봤으면. 

그런 걸 입고 아이작처럼 잘생긴 소년과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춤을 추는,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꿈꾸는 낭만을 달리아도 품고 있었다.

어차피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이니까 이렇게 농담처럼 말할 수 있는 거였지만.

웃고 있는 달리아와 달리 아이작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말 그런 걸 원해?”

“네. 이렇게 풍성한 드레스를 걸치고, 도련님 손을 붙잡고 대리석 계단을 오르는 거예요.”

아이작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흥미진진해진 달리아가 눈을 감은 채 본격적으로 망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풀나풀한 드레스에 하얀 리본을 겹겹이 겹쳐서 최대한 풍성해 보이게. 그리고 벨벳으로 덧댄 구두에… 아이참, 높은 구두를 신어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키가 커질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춤은… 음. 귀족분들의 무도회에서는 폴카처럼 발랄한 춤은 추지 않겠죠? 이렇게, 손을 잡고. 일어나 보세요, 도련님.”

히히, 조금은 경박스럽게 웃으며 달리아가 아이작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작이 달리아의 손길에 따라 방 중앙에 섰다.

“얼마 전에 저택에서 야유회가 있었잖아요. 그때 카를라 아가씨께서 이렇게 춤을 추셨었는데… 여기, 허리에 손 둘러 보세요. 그리고 한 발자국 옆으로, 또 옆으로.”

달리아가 아이작의 손을 붙잡고 어설프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덤덤한 얼굴로 적당히 그녀에게 장단을 맞추던 아이작은 계속 발이 밟히자 웃음을 터트리며 달리아의 손을 고쳐잡았다.

“달리아. 움직이지 말고 발을 내 발 위에 올려 봐.”

“네? 발을…? 이, 이렇게요?”

“응. 그대로 힘 빼. 그리고 이렇게…”

아이작은 한 손은 달리아의 손을,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련님! 신발이 더러워지겠어요…!”

“또 있으니까 괜찮아.”

“그건 저도 알아요!”

“신발 걱정은 말고 스텝에 집중해 봐. 하나둘, 하나둘 셋. 이게 왈츠의 기본 스텝이야. 쉽지?”

“아니, 그게! 그… 쉽긴 한데요.”

허공에 뜬 한쪽 손을 쥐락펴락하던 달리아가 못 이기는 척 아이작의 어깨를 붙잡았다. 까슬한 손바닥 너머로 탄탄히 솟아오른 어깨 근육이 만져졌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달리아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춤은 언제 배우셨어요? 도련님은 재주도 참 좋으세요. 못 하는 게 없으시네요…”

“저택에 왔을 때 기본 예법을 배워야 한다면서 억지로 배운 거야. 그때 배울 만한 건 다 배워서 더는 레슨이니 뭐니 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조용히 발을 옮기던 아이작이 허리를 붙든 손에 힘을 줘 달리아와 밀착했다. 동그랗게 뜬 초록빛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작이 작은 속삭임을 흘렸다.

“…달리아가 원한다면, 레슨 받을게. 가문 내에 꼭 필요한 사람이 돼서… 반드시 달리아를 무도회에 데려다줄게.”

“…정말요?”

아이작은 나른한 미소로 긍정을 표했다.

“그러려면 달리아도 미리 왈츠 연습해 둬야겠네. 그렇지?”

달리아는 말을 자아내는 대신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그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이다가 이내 박자에 맞춰 직접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도련님. 제 꿈이 뭔지 아세요?”

하나둘, 하나둘 셋. 박자를 읊던 달리아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화제를 던졌다. 아이작은 맞잡고 있던 달리아의 손에 깍지를 끼우며 의아한 눈빛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 고향이 남부라고 말씀드렸죠?”

“응. 내전이 있던…”

“네, 우브랑이에요. 정확히는 우브랑에서도 제일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해변 마을이거든요.”

내전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우브랑은 남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각광받던 곳이었다. 달리아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우브랑의 정경을 머릿속에 펼쳐갔다.

“헬만은 꽃이 비싸잖아요. 꽃가게도 많고요. 그런데 우브랑은 꽃가게가 거의 없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남부라서?”

“맞아요. 늘 날씨가 따뜻해서 사방에 꽃이 널려 있어요. 어딜 가도 꽃과 나무가 늘어서 있으니까 꽃을 팔아도 돈이 안 돼요. 그래서 대부분의 화훼농가는 상단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꽃을 팔아버리거든요.”

진지한 표정으로 달리아의 말을 경청하던 아이작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수입하는 꽃들이 전부 남부에서 오는 거였구나. 꽃이 흔하니까 가격도 저렴할 테고… 화려한 꽃도 많지. 그렇구나. 북부는 추우니까 꽃 개화 시기도 엄청 짧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핵심을 꿰뚫는 도련님의 발언에 달리아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가 살던 곳은 숙박업소나 비싼 별장이 많아서 수요가 좀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는 새벽같이 꽃을 꺾어서 광장이나 시장 입구에서 팔았거든요.”

“잘 팔렸어?”

“그다지요. 손이 작아서 기껏해야 한 바구니 팔고 돌아오는 식이었어요. 그래도 용돈 벌이나 빵값에 보탤 정도는 됐어요.”

그 시절을 회상하니 코끝에 바다 냄새와 꽃향기가 솔솔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반쯤 감은 눈으로 아이작을 올려다보며 느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 꿈은… 우브랑에 돌아가서 꽃가게를 차리는 거예요. 내전도 끝난 지 오래됐으니 이제 우브랑도 예전 모습을 되찾았겠지요. 원래 살던 집 근처에 집을 짓고… 부모님의 묘비를 만들어 아침마다 성묘하고… 물론 시신은 이제 못 찾겠지만 비석 정도는 놔도 괜찮을 거예요.”

반쯤 내려온 눈꺼풀이 이내 스르르 내려와 완전히 감겼다. 다시 뜬 눈동자 속에는 꿈꾸는 자 특유의 반짝반짝한 빛이 가득 머물러 있었다.

“로렐이 커서 건강해지면 같이 우브랑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보통 가게를 차리는 데에 5골드 정도 든다던데, 지금 1골드 22실버를 모았거든요. 빠듯하게 모으면 1년에 1골드는 모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4년만 열심히 일하면 다 모을 수 있어요.”

말이 이어질수록 아이작의 표정도 점차 굳어갔다. 아이작은 발걸음을 멈추고 깍지낀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설마 5년 있다가 일을 그만둘 셈이야? 나는? 나는 어떻게 하려고?”

“……앗.”

“여기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면서. 무도회 같이 갈 거라고 방금 말해놓고서… 이렇게 꼬드겨놓고 혼자 떠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당황한 달리아가 아이작의 어깨를 붙잡고서 눈을 맞췄다.

“도련님, 끝까지 들어 보세요.”

“배신자…”

“아니! 4년은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에요. 그리고 별일이 없다는 가정하에 4년이라는 거고요. 넉넉잡아서 5년에서 6년은 걸리겠지요. 그동안 도련님께서는 성년이 되실 테고, 그럼 혼자서 자립할 수 있으실 테니까.”

“……그래서?”

“그 이후로 원하신다면, 도련님도 같이 우브랑으로 가요. 도련님께도 지분이 있으니까요.”

“지분?”

“여태껏 모은 1골드 22실버 중에 1골드는 도련님께서 주신 거예요. 도련님은 D&R 꽃가게의 20% 지분을 갖고 계신 거죠.”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던 아이작이 허, 탄식 같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옆으로 세웠다. 달리아는 입을 다문 채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듯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는 떠는 달리아의 귓가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나쁘지 않네, 그거. D&R이면 달리아와 로렐이야?”

“별로예요? …D&R&A로 할까요?”

“길어지니까 별로 안 예쁜 것 같아. 나는 빼 줘.”

아이작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달리아의 귀 언저리에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달리아의 꿈은 꽃가게 주인이었구나. 난 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따라가도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모르겠네.”

“도련님은 투자자니까 아무것도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설마, 도련님 한 분 먹여 살리는 게 힘들까요.”

저만 믿으세요, 결연하게 외치며 달리아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제 딴에는 다부진 모습을 보이려고 한 행동인 듯싶었지만 아이작의 눈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주먹을 짤짤 흔들어대던 달리아가 멋쩍은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초록빛 눈동자에 그보다 연한 색의 녹음이 곱게 일렁였다.

숲을 응축해 놓은 듯한 눈이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아이작이 손을 뻗은 순간, 달리아가 창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라일락 향기가 나요.”

창밖으로 손을 뻗은 달리아가 보랏빛 꽃송이가 맺힌 나뭇가지를 코로 끌어당겼다.

스치는 바람결에 라일락 꽃향기가 물씬 스며들었다. 달리아는 꽃송이에 시선을 둔 채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났네요. 2골드 만들려면 아직 한참 더 모아야 할 텐데… 분발해야겠어요.”

흔들리는 다갈색 머리카락, 그 위로 펄럭이는 헤드캡.

바람을 느끼려는 듯 곱게 감은 눈매 사이로 갈색 속눈썹이 살짝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이파리를 뚫고 내려온 옅은 햇살이 하얀 얼굴 위에 점점이 밝은 빛을 뿌렸다. 강한 빛에 눈이 시릴 만한데도 달리아는 개의치 않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꼈다.

진한 숲 내음, 라일락 향기. 묻힐 듯 흔적을 감췄다가 다시 부드럽게 향기의 주변을 맴도는 그녀의 체취.

그런 달리아의 모습이 길을 헤매다 우연히 창가에 내려앉은 봄의 요정 같아서 아이작은 입을 벌린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완연한 봄이었다.

* * *

연둣빛 물결을 이루던 헬만의 산맥들이 이윽고 진한 초록에 물들어 여름을 반겼다. 여름이 지나고, 단풍과 함께 찾아온 가을이 일몰처럼 잠시 머물렀다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시 찾아온 헬만의 겨울은 비가 자주 내린 탓인지 작년보다 춥지 않았다. 겨울나기로 바쁜 건 여전했지만 추위에 손이 곱아드는 일이 줄어 저택의 사용인 모두가 평년보다 훨씬 안색이 좋았다.

“달리아. 동생 편지야.”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온 에디나가 편지 봉투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침대 위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달리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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