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분명 집안 식구들 전체가 아이작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공작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자신이 오해하고 있나 싶어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하녀의 당돌한 질문에도 공작은 개의치 않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똑똑한 아이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저택에 데리고 왔을 때는 그렇게 백치 같았던 녀석이 1년도 되지 않아 로열 그래머 과정을 넘어서는데, 과연 천재는 이렇구나 싶어 깜짝 놀랐다. 공작가의 가신을 전부 합쳐도 저 녀석의 발끝도 못 미칠 게다.”
굵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드러났다. 공작은 나무 둥치에 앉아 가늘어진 눈으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이작이 장자로 태어났다면 참 좋았을 것을… 아니, 적어도 막스 곁에서 그를 보좌할 만큼 우애가 좋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기설기 엮인 나뭇가지들 사이로 노을이 내려와 공작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다. 말하는 것에 심취한 것처럼, 공작은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을 이어갔다.
“처음부터 저택에 놓고 키웠다면 조금 더 나아졌을까. 그렇다면 그 녀석의 어미도 아들만 놓고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르네가 있었다면 그 녀석도 조금쯤 살 만한 의욕이 있을지도 모르지.”
“도련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게 아니었나요?”
“그래. 아이작을 먼저 데려간 다음 집안이 안정되면 별채로 들이려고 했는데… 애를 낳고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하더구나.”
미간을 짚고 있던 공작이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공작이니 뭐니 떠들어대면 뭐 해. 제 자식 잉태한 여자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팔푼이인 것을. 어미 없이 아이작 혼자서 그 시궁창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르네에게도… 아이를 가진 걸 알고서 꼭 데리러 갈 거라 약속했는데. 두 사람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고해는 달리아 같은 사용인이 듣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예민한 화제로 점철되어 있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나, 아니면 답을 해야 하나.
난처한 얼굴로 서 있던 달리아가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게… 주인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셨던 거잖아요. 그렇다면 도련님께서도 다 이해하고 계실 거예요. 이해하니까, 아버지가 좋아도 내색하지 않고 이렇게 얌전히 별채에 머물러계신 거겠죠.”
“과연 그럴까….”
“그럼요. 도련님께서 얼마나 속이 깊으신데요. 게다가 다른 가족분들에 대해 유감스러운 말씀을 하신 적은 종종 있지만 주인님에 대해서는 늘 말씀을 아끼세요.”
다정한 위로에도 공작은 씁쓸한 얼굴로 바람 빠진 웃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허, 그럴 리가. 굳이 화제에 올릴 만큼 관심이 없는 거겠지.”
“아니에요. 주인님께서는 아버지시잖아요. 저도 부모님과 썩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두 분을 사랑해요. 낳아주고 길러주셨으니까요.”
젖은 눈으로 달리아를 올려다보던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눈가를 쓸어내렸다.
“하녀장에게 듣기로는 전쟁통에 부모를 여의었다고 하던데. 정말이냐?”
그렇다고 대답하면 편견 어린 시선이 날아올까 잠시 고민하던 달리아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에둘러 얘기해 봤자 먹힐 상대도 아니니.
난처함을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인 건지 공작의 눈매가 살짝 갸름해졌다.
“네가 그리 말하니 설득력이 있구나. 가족도 잃고 혼자서 살아왔으니… 아이작이 너를 가까이하는 이유도 같은 동류여서가 아닐까 싶다.”
공작은 깊이 한숨을 내쉰 다음 차분한 눈으로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목을 움츠린 채 담담히 시선을 감내했다.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에 살짝 위화감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얘야.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느냐.”
부탁이라고는 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감정적인 모습이 씻은 듯 사라지고, 가주의 권위가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달리아는 자세를 공손히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 뭐든 말씀하세요.”
“나는 그 아이에게 속죄하고 싶다. 그 아이가… 작위를 이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입지를 쌓아 가문 내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길 바란다. 그러길 위해서라면.”
숱 많은 눈썹이 서로 닿을 듯 미간을 좁혔다. 공작은 날카롭게 치뜬 눈으로 숲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곁에서 그 아이를 격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작에게는 마음을 의탁할 만한 사람이 필요해.”
무슨 대단한 부탁을 하나 싶었더니, 막상 흘러나온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달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라면 주인님께서 더 어울리십니다. 저 같은 사람이 도련님께 무슨 격려를 할 수 있겠어요.”
“델마와 후버에게 전해 들었다. 아이작이 유일하게 부르는 하녀가 너라고. 책을 빌려주거나 같이 차를 마시거나, 자주 시간을 보낸다면서.”
“그건… 그냥 도련님께서 심심풀이로.”
“얼마 전에는 함께 시내도 나갔다지. 사람 많은 곳은 질색하는 아이작이 어떻게… 허 참, 비서에게 전해 들으면서도 놀라서 말이 나오지를 않더구나.”
달리아는 입술을 오므린 채 말을 아꼈다. 아이작과 함께 할 때는 최대한 조심해서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저택의 모든 이를 눈과 귀로 활용하는 주인 앞에서는 무슨 변명을 하든 의미가 없었다.
“너는 아이작을 보필하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느냐?”
이상한 점?
갑자기 튄 화제에 달리아가 의아한 눈빛을 되돌렸다. 공작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다음 먼 곳을 응시하며 흘리듯 답을 뱉었다.
“그 아이는 삶에 의욕이 없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달리아가 작게 입을 벌려 탄성을 내뱉었다.
아이작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상관없이 늘 감정 표현에 둔했다.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늘 창가 한편에 앉아 조용한 일상을 보내는 그 모습. 막스가 화를 내도, 공작 부인이 매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하고 마는 그 모습.
어딘가 이상하지만 꼬집어 말할 수 없던 그 모습들이 빠르게 달리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태껏 아이작에게 느껴왔던 위화감이 한 문장으로 통일된 순간이었다.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달리 애정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도 모르지. 어미도 없이 그 창부촌에서 살아왔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만. 어쨌든 아이작은 저택에 와서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단다. 너를 제외하고서는.”
“…….”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늘 별채에 갇혀 살던 아이가 어쩐 일로 부탁이 있다며 우익관을 찾아왔단다. 무슨 부탁일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무슨 부탁이었나요?”
“이르미나가 네게 해를 가할 수 없도록 너를 비호해 달라 하더구나.”
이르미나?
어딘가 들어 본 이름에 기억을 더듬던 것도 잠시, 달리아는 이름이 가리키는 이가 누군지를 깨닫고서 홉뜬 눈으로 공작을 응시했다.
이르미나 유프겐슐트. 아이작이라면 질색하는 저택의 마님, 유프겐슐트 공작 부인이었다.
“외출한 걸 들켜서 이르미나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전해 들었다만, 그날 꾸중을 들으면서도 네게도 해가 미칠까 봐 전전긍긍했던 모양이다. 네 존재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만은 그 부탁을 듣고 깨달았다. 드디어 그 녀석의 껍질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구나 하고 말이야.”
공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달리아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작을 닮은 눈매에 간절한 빛이 서렸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그 아이를 유프겐슐트의 인간으로 만들어다오.”
“그렇게 말씀하셔도…”
뭘 하라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듣지 않아도 뒷말을 알겠다는 듯 공작이 손바닥을 펴 달리아의 말을 끊었다.
“나아가야 할 길은 내가 알려줄 테니 넌 그저 곁에서 가끔 격려해주고 북돋아 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냥, 그 녀석의 친구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요는,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되어 달라는 소리였다.
아까 전 공작과 대화를 나누던 아이작을 떠올렸다. 늘 흐릿한 표정으로 체스 말을 갖고 놀던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른,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품위를 갖춘 아이작의 모습은 달리아에게 무척이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련님이 범상치 않은 사람일 거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영문모를 외국어와 이론을 읊는 모습은 정말 똑똑하고 멋져 보였다. 그런 재능을 누군가에게 내보일 수 있다면… 아주 근사할 것이다.
재능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썩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공부에 욕심이 났지만 처지가 이 모양이라 뜻을 펼쳐 볼 생각도 못 하게 된 달리아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아니. 재능을 떠나 아이작이 가문의 사생아를 벗어나 공작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아이작처럼 힘들게 커온 아이는 조금 더 행복해질 자격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애써보겠습니다.”
주먹을 다잡은 채 결연히 말하자 공작의 입매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건 가주로서가 아닌, 나이 든 아버지 특유의 푸근한 미소였다.
* * *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가 괴괴한 정적을 깨트렸다. 공작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 앞에 내려놓고서 와인 잔 너머의 불빛을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림자가 덧씌워졌다. 그림자가 비추는 허상은 늘 그렇듯 르네, 그녀였다.
게헤른 유프겐슐트가 르네를 만난 건 이십여 년 전, 수도의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그때 당시 게헤른은 공작위 계승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상태였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들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는 가문의 지정 좌석에 생판 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당혹은 찰나였다.
게헤른은 여자의 얼굴과 고혹적인 자태에 매료되어 순식간에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게, 뒷골목에서 몸을 팔던 르네는 공화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남자의 정부가 되었다.
그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게 진짜 사랑이기는 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사랑이 유프겐슐트의 차기 공작 부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던 이르미나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는 것만은 자명했다.
‘작위 계승식이 코앞인데 하필이면 그런 싸구려 창부를 코르티잔으로 삼을 생각을 해요? 당신, 미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