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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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달리아가 허겁지겁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이작이 손을 낚아채 자신의 뒤로 달리아를 숨겼다. 

굵게 울려 퍼지는 중후한 목소리, 그리고 후버의 허락 없이 함부로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달리아를 제외하면 단 한 명뿐이었다. 아이작은 흐트러진 숨을 재빨리 정돈하고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아이작의 모습에 달리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확인하고서, 달리아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수도에서 온 의궤에 희한한 서류가 있더구나. 네게 의견을 묻고 싶어서 말이지.”

헬만의 주인이자 저택의 주인인 게헤른 유프겐슐트. 양피지를 들고 방에 들어선 공작이 자연스레 체스 테이블에 앉았다. 시선은 방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달리아에게 고정한 채였다.

흥미, 혹은 색욕. 눈 속에 담긴 감정이 어느 쪽인지 향방을 쫓던 아이작이 허리 뒤춤에 교차해두었던 손을 움직여 달리아를 향해 문을 가리켰다. 의도를 눈치챈 달리아가 예를 표한 뒤 방문을 향해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아이작이 하녀를 가까이 두는 건 처음 보는구나. 거기 너. 이름이 뭐지?”

지그시 달리아를 쳐다보던 공작이 양피지를 만지작거리며 달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세웠다.

“예, 주인님. 저, 저는 본관을 담당하는.”

“달리아 벨로흐라고 저와 비슷한 또래의 하녀입니다. 최근에 상급 하녀인 델마를 대신해 심부름을 해 주고 있습니다.”

앞을 막아선 아이작이 유창한 소개와 함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시린 눈으로 달리아를 돌아보며 재차 문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나가 봐.”

차갑게 선을 긋는 태도를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던 공작이 손을 내저으며 아이작을 만류했다.

“아니.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차를 준비해오는 게 좋겠구나. 어디… 달리아? 후버가 담배를 가지러 갔으니 그것도 같이 준비해주려무나.”

“아, 네.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공손히 고개 숙여 대답한 달리아가 잰걸음으로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의식의 저편에서 아이작과 공작의 대화가 웅웅 울렸다가 순식간에 흔적을 지웠다.

“앗, 후버 씨!”

홀에 다다르자 때마침 트레이를 밀고 들어선 후버와 눈이 마주쳤다.

후버는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못마땅한 눈으로 달리아를 쳐다보더니 들고 온 트레이로 시선을 떨궜다. 트레이 위에는 티 세트와 시가 케이스가 담겨 있었다.

“뭔데. 이거 갖다 드려야 하니까 좀 비켜 봐.”

“저한테 준비해 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갈게요.”

후버의 눈매가 조금 더 일그러졌다. 쯧, 혀를 차는 모습이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허 참. 주인님께서 왜 방에 안 들어가고 멍하니 서 계신가 했더니 너를 보러 오신 거였나 보다.”

“저를요? 주인님이 저를 왜요?”

“내가 알아? 도련님께 꼬리칠 때는 언제고 주인님까지. 풋내나는 꼬맹이 주제에 속물이 따로 없다니까.”

“뭐라고요?”

“귀족들 꼬셔서 팔자 펼 생각일랑 일찍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매일 마뜩잖은 얼굴로 틱틱 거리더니 오늘은 시비의 농도가 한층 더 깊어졌다. 미간을 찡그린 채 후버의 시선을 맞받아치던 달리아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매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그리고, 제가 왜 도련님께 꼬리를 쳐요. 저한테 먼저 꼬리친 건 도련님이세요.”

“뭐?”

“이거 이대로 들고 가면 되는 거죠? 차 시중은 제가 들 테니 후버 씨는 쉬고 계세요.”

새된 눈초리로 후버를 쏘아본 달리아가 트레이를 뺏어 들고 다시 2층으로 향했다. 뒤편에서 버릇없다느니 건방지다느니 하는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왜 저렇게 볼 때마다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후버는 마주칠 때마다 늘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이틀에 한 번꼴로 마주치니 하루걸러 하루는 꼭 저 마뜩잖은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자기가 뭐 잘못했나 싶어 전전긍긍했지만 여자 사용인들 전부에게 틱틱거린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되었다.

“여자를 싫어하나?”

뭐, 사람마다 취향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래도 방금 전의 발언은 선을 넘었다. 또 그러면 더 세게 한마디 해야지, 생각을 정리하며 달리아가 방문을 열었다.

“…쓰여 있는 대로 정리하면 공화국령 내에서만 해당 관세를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대영주들에게는 추가로 2.12%를 추가 징세한다는 말이지요. 하기에 쓰인 철광석 면세 요율을 적용하게 되면…”

두 사람은 체스판 위에 양피지를 펼쳐놓고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양피지에 적혀 있는 게 뭘까 궁금해 차를 따르던 중 슬쩍 훔쳐보았지만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아이작이 달리아에게 눈길을 못 박은 채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신성어를 보니 저도 헷갈립니다만 개요는 단순합니다. 종이 대신 양피지에, 게다가 굳이 신성어를 쓴 걸 보면 격식을 위해 대영주들에게만 전달한 문서인 것 같습니다.”

저 꼬부랑 글씨가 신성어였구나.

입을 가린 채 들리지 않는 감탄을 내뱉고 있으니 아이작이 미미하게 눈시울을 접었다. 그는 찻잔과 바닥, 공작을 차례로 훑어보며 달리아를 쳐다본 적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설명을 계속했다.

“의궤에 담아 보낸 것도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조만간 있을 봄의 제전에 대한 축하 표시인 것 같고요. 다만… 여태껏 단순히 적용하던 세율을 굳이 세분화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복잡하긴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중앙 정부의 말대로 따르는 게 옳지 않겠느냐.”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아이작이 책장에서 책 하나를 빼 들었다.

‘복수요율에 따른 관세율체계 변화 연구’. 분명 하이드벤 어로 적혀 있었지만 달리아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변화’와 ‘연구’뿐이었다.

책을 훑어보던 아이작의 눈이 어떤 단락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아이작은 책 모서리를 검지로 문지르며 의아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세제를 개편하는 건 분명 추가 이익을 환수하려고 할 때뿐이라 들었습니다. 보좌진들에게 복수요율이 적용되는 구간이 있나 검토하라 이르심이 어떨까요. 그리고 내부자를 써서 다른 영지에도 같은 요율이 적용되는지 확인하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작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이작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이후로도 내부자를 어떻게 쓸 건지, 세율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 이의를 제기할지 따위의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달리아는 테이블 뒤편에 서서 조용히 두 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가 마무리된 건 이미 찻잔에 따라놓은 차가 차갑게 식은 뒤였다. 홀가분한 얼굴로 일어난 공작이 달리아에게 손을 까딱였다.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겠구나. 얘야. 이 책들과 양피지 좀 들고 따라와 주련.”

“네, 주인님.”

멍하니 서 있던 달리아가 체스 테이블에 널려있던 책과 양피지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서 아이작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무감한 얼굴로 서 있던 아이작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조심히 가라는 말에, 달리아는 환한 웃음을 답으로 남긴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작의 뒤를 따랐다.

* * *

하늘 위로 노란 일몰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숲의 적막을 깨우는 건 공작과 달리아 두 사람의 발소리뿐이었다.

공작은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불현듯 숲이 끝나갈 어귀쯤에서 달리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즈음 아이작이 아낀다는 하녀가 너였구나. 그래, 곁에서 보기에 좀 어떤 것 같으냐.”

자신을 향한 물음이라고 생각지 못한 달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다정하시고 현명하시고. 외모는 물론이고 태도도 무척 교양 있으셔서 정말 나무랄 곳 없는 주인이십니다.”

공작이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에서, 공작이 원한 답변은 이런 겉치레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달리아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게… 솔직히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달리아는 공작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주인님께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사용인들 사이에서 도련님에 관한 소문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뵈러 갈 때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별채의 유령. 불결한 사생아. 이름보다 오명으로 널리 알려진 작은 도련님은 달리아에게도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 본 도련님은 그런 소문과 정반대로 무척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이었다.

“막상 곁에서 지켜본 도련님은 다정하시고 배려심이 넘치시는 분이었어요. 저 같은 사용인에게도 기꺼이 옆을 내어주시고, 안부를 물어봐 주시고… 정말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분이세요.”

“배울 점이 많다… 그렇군. 나 같은 늙은이도 그 녀석에게 배울 때가 많은데, 너 같은 아이는 더 할 테지.”

공작은 나뭇가지 틈새에 걸려 있던 마른 낙엽을 손으로 부스러트리며 싱긋 웃었다.

“유프겐슐트의 핏줄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아이작은 정말 적장자가 아닌 게 아쉬울 만큼 뛰어난 아이지. 그 녀석이 첫째로 태어났더라면 집안이 이렇게 엉망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참, 씁쓸한 일이지 않느냐.”

흘리듯 내뱉은 말에서 공작의 진심이 드러났다. 달리아는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물었다.

“…주인님. 작은 도련님을 많이 아끼시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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