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지랑이처럼 어룽거리던 실루엣이 점차 또렷하게 형체를 잡아 갔다. 눈앞의 뜬 아버지의 형태를 더듬으며 달리아가 차분히 아버지를 회상했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입버릇이 험한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달리아와 엄마를 서슴없이 때리던, 빈말로라도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달리아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아버지를 잃고 난 뒤에는 ‘살아 계실 때 잘해드릴걸’ 하는 산 자의 후회가 그녀를 괴롭혔다.
살아남은 자 특유의 오지랖일까, 아니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책일까. 답은 알 수 없으나 달리아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이상한 일이죠. 나쁜 사람은 죽어서 변하지 않는데 미안한 마음은 남으니까요. 그건 결국 자기 마음에 남은 오점 때문이에요.”
“오점?”
“그 사람을 대했던 시절, 내 태도에 대한 반성인 거죠.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오점을 남겨두지 마세요.”
아이작이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되물었다.
“당당해지기 위해서?”
“네. 도련님 스스로를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아이작은 마지막 말을 입속으로 작게 굴려보았다.
혹자는 가식이라 매도할지언정 아이작은 늘 예의 바른 태도로 공작가 일원들을 대했다.
그걸 그들이 원하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니 달리아의 말이 옳았다.
여태껏 최대한 예의를 갖춘 만큼, 아이작은 그들이 죽더라도 어떠한 유감도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당장 르네만 해도 그랬다. 어미가 죽은 뒤 그의 마음속에 남은 건 스스로에 대한 연민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부채 의식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점을 남겨두지 않았으니까. 살아 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췄으니까.
아이작은 싱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 예의를 택했을 뿐인데, 달리아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삶이 고결한 무언가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순간까지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그녀가 대단하면서도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달리아는 아무튼, 하며 태연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도련님과 나들이 가는 건 좋은데… 마님께 들키지 않을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정문으로 나가면 사병 아저씨들한테 들킬 텐데. 다른 길은 없을까요?”
“길이 하나 있긴 해. 북쪽 숲에서 우측으로 쭈욱 직진하면 시내로 나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어.”
“그래요?”
“응. 돌아서 가야 하니까 좀 걸릴 텐데… 말을 타고 나가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 대신 길이 험해서 조심해야 해. 낭떠러지도 있고 내리막이 가팔라서…”
낭떠러지라는 말에 달리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북쪽 숲의 낭떠러지. 아까 전 하녀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곳에서 마야 오브릭이 죽었다고 했는데.
고민하던 달리아는 속으로 끙끙 앓기보다 직접적으로 묻는 쪽을 선택했다.
“도련님. 그, 제가 묘한 소문을 들었는데요.”
“무슨 소문?”
“혹시 마야 오브릭이라는 분… 아세요?”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응. 공작 부인의 시녀로 일하던 사람이야. 성격은 깐깐하지만 센스가 좋다고 공작 부인이 꽤나 아끼던 사람이었는데… 작년에 숲에서 화를 당했어.”
“…그래요?”
“장마철이라 지반이 약해진 걸 몰랐나 봐. 하필이면 낭떠러지에서… 안타깝게 됐지. 게다가 오브릭 자작은 가신 중에서도 가장 명망 있는 사람이었거든. 사건이 워낙 충격이었는지 그 이후로 가신 회의에도 나오지 않고 내내 은거 중이라고 들었어.”
울적한 얼굴로 시녀의 일을 읊는 아이작의 모습은 어딜 봐도 사건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측은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던 아이작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달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그 얘기는 왜?”
“그게… 조금 황당한 말을 들었거든요. 도련님께서…”
“내가 떠밀어서 사고 난 거 아니냐고?”
가감 없는 말에 달리아가 입술을 말아 물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간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아이작이 스르르 눈시울을 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도 아니지. 별채에 사는 사람은 나뿐이었던 데다 레이디 오브릭은 평소에 산책을 즐기던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이 근처에서 죽었으니… 나라도 의심할 거야.”
“…속상하셨겠어요.”
“오해받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괜찮아. 그리고 달리아는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럼 됐어.”
아이작은 책장에 몸을 기댄 채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반쯤 감은 눈매에서 나이답지 않은 원숙한 관능미가 흘러넘쳤다. 늘 자신보다 어리다는 생각에 동생처럼 어르고 달래다가도, 이렇듯 가끔 보이는 어른스러운 모습에 생경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홀린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아이작이 긴 팔을 뻗어 달리아의 뺨을 톡, 두드렸다. 그리고는 짓궂은 표정으로 조금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자연스러움에 취해 있던 달리아는 한 박자 늦게 부끄러움을 깨닫고 뺨에 닿아있던 아이작의 손을 팩 쳐냈다. 꽤 거친 행동이었음에도 아이작은 당황하기는커녕 몸을 살짝 숙인 채 웃음을 터트렸다.
“까, 깜짝 놀랐잖아요. 꼭 이렇게 갑자기 장난치신다니까.”
“달리아는 반응이 격해서, 자꾸 장난치게 돼.”
“…하지 마세요. 부끄럽다고요.”
바지춤을 톡톡 두드리던 아이작이 갑자기 성큼 다가와 달리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놀란 달리아가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빼자 조금 더 세게 어깨를 붙들어 자신과 밀착했다.
단단한 상체가 짓눌러 오자 가슴에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코앞까지 다다른 얼굴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엉겨 묘한 긴장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하는 사람은 달리아뿐인 건지 아이작은 마냥 태연하기만 했다.
“도련님. 잠깐 좀 떨어지셔서…”
싱그럽게 웃고 있는 아이작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어깨를 밀어내려던 순간, 아이작이 그보다 빨리 상박에 힘을 주어 더욱 강하게 달리아를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도, 도련님!”
평소의 유약한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한 힘이 달리아를 억압했다.
팔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붙들린 상체 위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있잖아. 그 소문 듣고 무슨 생각 했어? 달리아도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어?”
관자놀이 근처에 머물러있던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와 달리아의 귓가에 뜨거운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아니면, 모함받는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빈틈없이 달라붙은 상체에 정신이 팔려 말의 맥락을 짚기가 힘들었다. 달리아는 뒤늦게 더듬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야, 당연히…”
“당연히?”
“…도련님이 가엽다고 생각했지요.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맞닿은 뺨으로부터 아이작의 입매가 위로 당겨지는 느낌이 미미하게 전해져왔다.
자신이 의심할까 봐 걱정했던 걸까. 달리아는 허벅지 근처에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아이작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마음 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도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말하는 거지, 진심으로 도련님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다독이는 손길이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와 맞물려 포근한 평온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달리아는 참, 순진하기도 하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참새가 짹짹거리는 걸 듣고 누가 화를 내겠는가. 그저 눈앞의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가여이 여겨 주면 기쁠 것 같아 불쌍한 척한 것뿐이었다.
착한 달리아는 속내도 모르고 불쌍한 도련님을 달래느라 전전긍긍했다. 그게 정말로 기쁘고 기뻐서.
“괜찮아. 그런 험담 익숙하니까. 달리아만 좋게 생각해 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계속, 계속.
“어차피 나 같은 거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푹 잠들었다가 그대로 녹아 없어졌으면 좋겠어.”
불쌍한 척을 하게 돼.
“그렇게 죽으면. 드디어 별채의 유령이 사라졌다고 다들 기뻐하지 않을까.”
처연한 목소리가 달리아의 심상을 어지럽혔다. 그의 얼굴을 붙잡아 표정을 확인한 달리아가 침울한 표정을 확인하고서 인상을 썼다.
“도련님.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거 봐.
또 이렇게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보잖아.
속으로 중얼거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달리아는 가볍게 등을 토닥이던 손에 힘을 줘 자신의 품으로 아이작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자신보다 커다란 도련님을 억세게 끌어안고서 절박한 어투로 진심을 전했다.
“그런 말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좋아해요. 저는 도련님 좋아요.”
좋아해요.
상기할 때마다 미칠듯한 희열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아이작의 귓가를 은밀히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런 다정한 밀어도 뇌리를 스쳐 사라질 뿐이었다. 실상,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말도 귓속까지 닿을 수 없었다.
모든 오감이 그녀의 몸을 훑기 바빴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과 살결에 전율이 일었다. 아이작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허공에 뜬 손을 쥐락펴락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죽는다느니 없어진다느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셨죠?”
작은 어깨, 뺨에 닿는 숨결, 맞닿은 가슴과…
달리아의 냄새.
이마와 볼을 간지럽히는 갈색 머리카락이 진한 체취를 흩뿌리며 이성을 뒤흔들었다.
뺨을 스친 목덜미가 갓 구운 흰 빵처럼 보들보들했다. 핥으면, 깨물면 어떤 느낌일까.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체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도련님?”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살이 맞닿은 부근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분신이 스물거리며 부피를 키우기 시작했다.
낯선 감각에 아이작이 잘게 진저리를 쳤다. 잠결에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몽정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 흥분한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왜 하필이면 달리아가 앞에 있을 때… 더럽게.
……아니, 아니야.
달리아가 있어서… 눈앞에 있으니까 그런 거지.
나 지금. 달리아에게 욕정한 거야?
비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더러운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가 한데 뒤섞여 아이작을 괴롭혔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필사적으로 욕정을 삼켰다.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감미로운 체취와 여전히 가슴에 닿아 있는 말랑한 촉감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잘게 토막 냈다.
안고 싶어.
…입 맞추고 싶어.
가파른 흥분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아이작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끼고 퍼뜩 눈을 떴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고민은 찰나였다. 이윽고 닿을 듯 말듯 얄팍한 어깨 주변을 배회하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느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가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숨이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닿았다.
“……도련님?”
이변을 눈치챈 달리아가 의아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열기를 품은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다다랐을 때에.
“아이작.”
노크 소리와 함께, 중후한 목소리가 문을 뚫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