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21/97)


 

21

상급 하녀인 델마가 마른걸레 여러 장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샹들리에를 훑어보는 눈이 평소보다 매섭게 느껴졌다. 크리스탈 사이 사이를 노려보던 델마가 청소하지 않은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경고를 읊었다.

“수다 떠는 건 뭐라고 안 하겠지만 다들 손이 멈췄어. 이거 오후 티타임까지 끝내라고 했는데, 이래서 오늘 안에 끝나겠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레이디 오브릭 얘기는 저택에서 삼가도록 해. 마님께서 아셨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거야.”

당찬 모습은 어디로 가고 에디나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풀죽은 모습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의 까탈스러운 성미를 잘 아는 하녀들도 델마의 잔소리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 너는 이리 와 봐.”

방문 쪽으로 물러난 델마가 달리아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재빨리 앞에 서자 델마가 문 앞에 놔둔 트레이에서 서너 권의 책을 꺼내 달리아에게 건넸다.

“작은 도련님께서 부탁하신 책이야.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다녀와.”

알겠다 대꾸하며 몸을 돌린 찰나, 델마가 달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참견으로 들릴 것 같아서 말을 조심했는데… 달리아.”

올려다본 델마의 얼굴 위로 무던한 표정 대신 복잡다단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오랜 세월 쌓아온 눈치 덕분에 달리아는 그녀가 자신을 염려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작은 도련님과 너무 친밀해지지 않도록 조심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강조할 줄 알았더니, 튀어나온 말은 아이작에 대한 음해였다. 망설이는 달리아에게 델마가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 언뜻 보기에 상냥해 보일지 몰라도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야. 게다가 얼마 전에 도련님과 외출했다가 마님께서 엄청 화내셨던 거, 기억하지?”

“……네.”

“그리고 아까 애들이 말하던 레이디 오브릭 일도 그렇고.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작은 도련님과 얽히면 좋은 꼴을 못 봐. 그러니까.”

“알아요. 여러 번 말씀하셨으니까요.”

달리아는 목소리가 차갑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을 잘랐다.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을 이으려던 델마는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뒤돌아선 달리아가 주저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뒤통수에 닿는 그녀의 시선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계단을 내려와 저택을 빠져나온 뒤에야, 달리아는 쓰린 얼굴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계단 난간 위쪽에서 씁쓸한 시선이 계속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 * *

쏜살같이 저택을 빠져나올 때와 달리 숲을 걷는 발길이 한없이 무거웠다. 달리아는 아래로 고개를 떨군 채 관성에 의지해 터벅터벅 걸었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머릿속에는 채 온전한 문장도 이루지 못한 모호한 의문이 가득했다.

마야 오브릭과 작은 도련님…

별채가 있는 북쪽 숲, 낭떠러지에서 사고를 당한 시녀. 주모자로 몰렸다는 작은 도련님과 그를 조심하라는 델마의 충고까지.

시녀를 죽인 사람이 작은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택의 사용인들이 왜 그를 쉬쉬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와 가까워지면 화를 입는다는 카를라의 은유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때, 처음 막스를 훔쳐봤던 날.

아이작에게 화를 내던 막스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소공작님께서… 마야 오브릭이라는 말에 주먹을 멈췄는데.”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하얗게 뜬 얼굴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막스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막상 주모자로 의심받는 아이작은 담담한 얼굴로 마야 오브릭이라는 이름을 끄집어냈다.

아이작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막스라면, 오브릭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살인자니 뭐니 하며 비아냥거려야 정상일 텐데.

그러나 오브릭이라는 단어를 무기로 활용하는 사람은 막스가 아닌 아이작이었다. 눈으로 확인 한 두 사람의 관계는 소문과는 다르게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뭘 뜻하는 건지 영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

복잡한 심상을 추스르며 별채에 발을 디뎠다.

문 앞에 서 있던 후버가 경계 서린 눈으로 달리아를 훑고, 달리아는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꾸벅 인사했다.

거주자가 드문 별채는 한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저택에 있을 때는 늘 따뜻해서 마음을 놓았는데, 유약한 도련님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어 달리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하얀 입김이 발자국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던 달리아가 불현듯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이작이 선물해 준 하얀 리본이었다. 아까워서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그 리본.

그렇다고 도련님 앞에서 하기에는 어쩐지 쑥스러워서 주머니 속에만 고이 접혀 있던 리본이기도 했다.

짧은 고민 끝에 달리아는 올려 묶은 머리 위에 리본을 덧대어 묶었다. 거울이 있다면 조금 더 예쁘게 맬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접고 방문을 노크했다.

“도련님, 달리아예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훈훈한 온기가 확 덮쳐왔다. 추우면 어쩌나 하는 달리아의 예상을 깨부수듯 방안은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덕분에 봄처럼 따스하기만 했다.

체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아이작이 화색을 띠며 달리아에게 다가왔다. 어지러이 늘어선 체스 말들을 보니, 아마 체스를 복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쩐 일이야? 추우니까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잖아.”

“춥다고 안 올 수 있나요. 델마 씨가 책을 전해드리라고 해서 왔어요. 별일 없으셨죠?”

달리아는 갖고 온 책을 책장에 꽂고서 능숙한 손길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그녀의 뒤로 들뜬 마음을 숨기려 입매를 굳힌 아이작이 아기 새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요즘 대청소한다고 저택이 시끄러운 것 같던데. 달리아도 바빠?”

“네. 매일매일 청소하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저택이 워낙 크니까 손 갈 데가 많더라고요. 쉬는 날도 반납하고 청소하는 중이에요. 원래 엊그제 쉬려고 했는데…”

“쉬는 날 뭐 하려고 했어?”

“음, 그냥 기숙사에서 쉬려고 했어요. 로렐한테 편지도 보내야 하고 바느질할 것도 꽤 쌓여있거든요. 그런데 너무 바빠서 편지는 당분간 미뤄야겠어요.”

“그렇구나…”

달리아의 주변을 기웃거리던 아이작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을 뒤로한 채 고개를 양옆으로 살짝 흔들었다. 기행을 눈치채지 못한 달리아는 여전히 책과 종이 더미들을 정리하기 바빴다.

아이작은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막상 그녀를 마주하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심경을 대변하듯 흔들리던 시선이 그녀의 작은 이목구비와 부드럽게 흘러내린 잔머리를 스쳐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에 닿았다. 리본을 인지한 순간 바르작대던 아이작의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날, 함께 외출했던 날.

아이작이 선물했던 하얀 리본이 갈색 머리카락 틈새에서 이리저리 너울거렸다. 리본 끝자락에 달린 꽃인지 풀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무늬의 레이스가 심플한 공단 리본과 맞물려 품격을 한층 드높이고 있다.

…아니. 품격이 있는 건 리본 따위가 아니었다.

그 곁에서 하느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둥근 곡선을 그리는 이마와 빠르게 깜박거리는 다갈색 속눈썹…

리본은 그저 천 쪼가리에 불과할 뿐, 달리아가 하고 있으니 우아해 보이는 것이다. 아이작은 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커다란 초록 눈동자를 훔쳐보며 품격의 정의를 되새겼다.

누구보다 어여쁜 그의 하녀. 자신이 선물한 것을 매고 있는 자신의 하녀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 속 깊은 속에서 노곤한 기쁨이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망설임이 살짝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작은 눈을 감은 채 깊이 고심하다가 이내 큰 한숨을 내쉬며 용기를 냈다.

“저기, 달리아.”

“네?”

“다음에 쉬는 날… 별일 없으면. 지난번처럼 같이 시내 구경 가지 않을래?”

가만히 아이작을 응시하던 달리아의 눈이 서서히 동그랗게 크기를 키웠다. 놀란 듯 여러 번 눈을 깜빡이다가, 입매를 당겨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작은 탄성과 함께 아쉬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저야 좋은데 도련님께서 혼나실까 봐… 저번에도 마님께 들켜서 호되게 야단맞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매질이 전부니까.”

“그 여자… 마님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달리아가 들고 있던 필기구를 책상에 내려놓고서 근엄한 표정으로 앞에 섰다. 그리고 동생을 혼낼 때와 똑같은 어조로 훈계를 뱉었다.

“도련님. 마님께 유감이 많으신 건 알아요. 그래도 어머니께 그런 말버릇은 좋지 않아요.”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응시하던 아이작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가까이 다가와서 한다는 소리가 하필이면 공작 부인을 감싸는 말이라니.

달리아는 심정을 다 안다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시선을 쏟아냈다.

“그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마님 싫어요. 왜 그렇게 도련님을 싫어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래도… 도련님은 그러지 마세요. 똑같이 미워하지 마세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세요.”

“왜?”

“괜히 후회하실까 봐서요.”

어른이니까, 가족이니까 그래야 한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이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냐는 듯 아이작이 미간을 좁히자 달리아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음, 비슷한 예라고 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지만 저희 아버지도 썩 좋은 분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전쟁으로 돌아가시고 나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초록빛 눈동자 속으로 아버지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