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이작은 눈을 감고 벽난로 구석으로 슬금슬금 기어갔다.
지금은 다른 이에게 화를 풀지만, 그녀의 화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분노에 잠식된 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 눈앞의 모든 것에 분노를 토해냈다. 그게 자신의 아들이든, 어린아이든 상관없이.
그러니 눈에 띄지 않게 죽은 듯이 웅크려 있는 게 최선이었다. 아이작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소리가 사라지고 빛도 사라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아이작은 끊임없이 몸을 작게 웅크렸다.
발을 바짝 붙이고 가느다란 종아리를 그보다 얄팍한 손으로 세게 움켜쥔다. 그렇게 작게, 작게 자신을 압축하다 보면 언젠가 이 현실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고서 또다시 아이작의 이름을 부른다. 고개를 들자 붉은 머리를 산발한 남자아이가 뒤를 흘깃거리며 아이작의 어깨를 흔들었다.
얼마나 오래 웅크려 있던 건지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은 순간 몸이 제멋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를 지켜보던 아이가 다부진 손길로 아이작을 일으켜 세웠다.
[식탁 위에 빵 남겨놨으니까 먹어.]
[…르네는?]
[일 갔어. 오늘은 안 올 거야. 난 빨래하러 나갈 테니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아이작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아들을 출세의 도구로 여기는 르네는 혹여 밖에 나갔다가 공작 부인의 끄나풀에 해를 입으면 어쩌나 싶어 아이작을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순순한 태도에 마음을 놓은 아이가 아이작의 어깨를 재차 툭툭 두드렸다. 아이의 눈동자 속에 슬픔과 걱정, 안쓰러운 염려가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좋겠다, 넌.]
아이의 목소리가 서글프면서도 소름이 끼치게 들리는 이유는, 걱정스러운 어조 속에서 아이작을 질시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형은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이작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다. 고작 그 차이로 한 명은 성물처럼 모셔지고 한 명은 노예처럼 살아야 했다.
아이작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였다. 작은 한숨 뒤로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아이작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진창 같은 삶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작이 택한 방법은 생각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가진 게 없던 마음을 완전히 비워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감정도 없이 기물처럼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노라면 금세 하루가 지났다. 암울한 하루를 견디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암흑, 또 암흑.
잠이 든 것도 같았다. 꿈을 꾼 것도 같았다. 물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머릿속을 스친 게 꿈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꿈속의 꿈인지 꿈속의 현실인지 경계가 흐릿할 때쯤 둔한 머릿속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스쳤다.
[나를 놓고 아이작만 데려간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너머로 카랑카랑한 외침이 이어졌다.
[사랑한다고 속살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날 버리겠다는 거야? 게헤른, 이 개 같은 놈!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아니에요, 엄마. 편지에 곧 데리러 올 거라고 쓰여 있었잖아요. 부인을 설득한 다음에 꼭 엄마를 데리러 올 거라고… 꼭, 우리를 데리러 올 거라고.]
[그걸 믿어?! 멍청하기는 너도 똑같구나!]
비명 같은 외침 이후로 정적이 찾아왔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아이작을 옭아맸다.
웅크려 있던 몸을 억지로 펴자 저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아이작은 통증에 개의치 않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굳은 머릿속에 방금 전 르네가 외쳤던 문장들이 몰아쳐 흐릿하던 의식을 억지로 일깨웠다.
나를 데리고 간다고. 게헤른이…
르네와 형을 두고 나만 데려간다니.
왜, 나만…?
……느낌이 안 좋아.
생각과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아아악! 엄, 엄마!]
[웃긴 녀석이야. 우리? 우리?! 어디 감히 우리라는 말을 들먹여? 너 따위가 그 집안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낳았다고 해서 내가 너를 데리고 갈 줄이라도 알았냐고!]
[엄, 윽! 죄송해요, 죄송해요…!]
[널 낳은 이후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너만 없었으면 창부 노릇 하면서 살 일도 없었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걸 낳아서… 이런 애비도 모르는 걸 낳아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 비명과 울음소리. 그 사이로 추임새처럼 구타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리저리 부딪히던 소리가 이윽고 긴 비명으로 치환되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비명이 길었다. 아이작은 손바닥에 고인 땀을 바지에 훔친 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밀어냈다.
긴 복도 끝자락에서 르네와 머리채가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찼다. 허공을 걷어차던 작은 발이 허망한 그림자만을 남기고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쾅, 문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이마에 맺혀있던 식은땀이 아이작의 속눈썹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저 방.
들어가면 어딘가 망가져서 나오는, 르네의 방.
처음 들어갔을 때는 이가 부러져 나왔고 두 번째에는 팔이 부러져서 나왔다.
르네가 폭력을 휘두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지독했다. 게다가 저 방에 들어갔다는 건.
또 어디를 부러트리려는 걸까. 더는 망가질 데도 없는 것을.
이러다가 혹시, 형이……
……죽기라도 하면.
유일한 보호자가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입안이 바싹 말랐다. 턱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무척 생경했다.
바지 주머니 근처를 움찔거리던 손이 천천히 식탁을 향했다. 말라비틀어진 빵 옆에 무딘 칼이 놓여 있었다. 아이작은 서슴없이 칼을 들고 두 사람이 사라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빈 상태였다. 그저 본능에 의지해 움직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때가 도달했음을 알았다.
더는 삶을 방관할 수 없음을 알았다.
[차라리 죽고 싶어! 그때 죽었으면! 이 쓰레기 같은 것들 키울 일도 없었을 텐데…!]
복도 끝에 가까워질수록 비명과 신음이 커져갔다. 왱왱 울리는 르네의 목소리가 오늘만큼 거슬린 적이 없었다. 엉엉 우는 형의 울음소리 또한 오늘만큼 와닿은 적이 없었다.
이런 현실 끝에 뭐가 존재하는 걸까.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가.
늘 뇌리를 떠돌던 모호한 물음이 크기를 키워 머릿속을 잠식했다. 공포도 걱정도 자취를 감춘 곳에 삶을 관통하는 물음만 남아 아이작을 움직였다.
문을 열었다. 끼익거리는 소음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르네는 형을 괴롭히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거칠게 움직이는 몸짓 너머로 온몸이 얻어터져 부어오른 작은 몸이 언뜻 드러났다.
겁에 질린 형의 눈이 아이작을 본 순간 희망으로 번뜩였다. 서로의 눈이 마주한 그때.
…아이작은 뇌리를 메우고 있던 물음의 답을 깨달았다.
[살고 싶어?]
아주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곧장 알아들은 형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들은 순간 칼을 부여잡고 있던 얄팍한 손에 핏줄이 섰다.
[살려 줄게.]
이변을 알아챈 르네가 아이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보다 앞서 몸을 움직인 아이작이 르네를 바라보며 손을 치켜들었다.
[엄마도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아이작, 너 지금 무슨…!]
매일매일, 죽고 싶어 했잖아.
작은 속삭임은 이어진 비명으로 인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다.
시야가 울렁거렸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동요하는 건 어미를 유린하는 아이작이 아닌 꿈을 관조하는 아이작이었다. 그리고 그 동요의 기저에는, 자식이 어미를 해쳤다는 죄책감 따위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슬픔만이 존재했다.
[……아… 아이…]
증오에 찌든 목소리로 흘러나온 이름이 허무 속에 바스라졌다. 아이작을 투영하던 눈동자가 빛을 잃은 채 공허에 잠겼다.
죽음이 머무른 방 안에 남은 건 섬뜩한 정적뿐이었다.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던 아이작이 칼을 세게 다잡았다. 동공이 풀린 검은 눈동자가 광기를 담고 제 어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또 일어날지도 몰라. 또 때리려고… 죽이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죽여야 해.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이 다시 위로 솟아올랐다. 망연히 주저앉아 있던 붉은 머리의 소년이 화들짝 놀라 아이작의 발에 매달렸다.
[그만, 그만해! 이제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다 끝났어.
끝이라는 말이 심금을 울린 건지 형이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곧,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끝났어?]
안 움직이는 걸 보니 진짜 끝난 건가.
…이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건가.
묘한 감정이었다. 후련한 듯 찝찝한 듯 이름 붙일 수 없는 쾌감이 몸을 훑고 지나간 뒤 무력한 허무가 빈자리를 메웠다.
멍하니 있던 아이작이 홀린 듯 걸음을 옮겨 방 한구석에 섰다. 칼을 생명줄인 것처럼 억세게 움켜쥐고서 몸에 익은 자세로 웅크려 앉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말은 참담한 기색 따위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게헤른이 날 데려간다고 했어?]
무릎 사이로 흘러나온 말이 울음소리를 뚫고 형에게 닿았다.
부러진 발목을 붙잡고 엉엉 울던 소년이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여전히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도 같이 가고 싶어?]
[…응.]
[그놈도 르네 같은 놈일 수도 있어. 아니, 더 할 수도 있어.]
[…….]
[그래도… 가고 싶어?]
고개를 들어 자신의 형을 마주 보았다. 얼룩덜룩해 엉망이 된 형의 얼굴은 우습게도 아이작이 봐온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가고 싶어. 나는… 살고 싶어. 제대로 살고 싶어…!]
반짝반짝 빛나던 눈매가 또다시 일그러져 눈물을 떨어뜨린다. 울상인 형을 마주하고 있는 아이작의 얼굴도 점차 일그러져갔다.
나는 살기 싫은데.
어떠한 존재 의의조차 없이 태어나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이작은 르네의 노후를 보장하는 물건이었고 형에게는 애증 어린 애물단지였다. 그는 벽난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집안의 기물이었고, 언젠가 게헤른이라는 인간이 데리고 갈 사생아였다.
그게 전부였다.
아이작은 자신을 몰랐다.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그릇은 삶의 욕구마저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 해서 죽을 수는 없었다. 무섭고 괴롭고를 떠나 아이작 같은 어린아이에게 죽음이란 미지의 영역이었다.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작에게 삶은 견디는 것뿐이었다.
이대로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형은 살고 싶다고 한다. 이 좁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돌봐 준 이가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작을 원하는 그곳에, 아이작과 같이 가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살기 싫은데.
[나는……]
어디선가 쾅,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낯선 침입자의 발소리가 무서웠는지 붉은 머리의 소년이 재차 울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감쌌다.
[난 가고 싶어.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흔들리는 마음에 쐐기를 박듯이 형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이작의 삶을 유예 시킨, 절망의 선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