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문이 닫히고, 내연 기관에서 흘러나오는 배기음이 희미하게 귀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란히 앉은 탓에 서로의 체온이 진하게 느껴졌다.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던 달리아가 창가 언저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운을 뗐다.
“도련님. 손 좀 내밀어 보세요.”
“손? 왜?”
달리아는 대답 대신 아이작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살그머니 손안에 쥐여 주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맑은 빛이 서렸다. 선물을 줬다는 사실보다 달리아가 자신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게 기쁜 탓이었다.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으니 달리아가 ‘확인해 보세요’ 하며 손을 톡톡 두드렸다. 아이작은 아쉬움을 달래며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에 남겨진 물건은 작은 연고였다. 동그란 통에 담긴 보잘것없는 상처 연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는 아이작에게 달리아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련님 얼굴 다친 거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는지 몰라요. 저는 목도리나 금화처럼 귀한 건 못 드리지만… 흉터가 남지 않는 유명한 연고래요. 다음에 다치면, 잊지 말고 꼭 바르셔야 해요.”
‘물론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요.’ 작은 혼잣말과 함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이작의 뺨 위로 내려앉았다. 달리아는 흔적을 더듬듯 조심스레 뺨을 어루만지며 서글픈 한숨을 내뱉었다.
휴가가 끝난 뒤 저택에 도착한 순간, 아이작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상처를 떠올렸다. 커다란 반창고, 푸르게 멍이 든 눈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변명하던 그의 모습.
“흉이 안 남아서 다행이에요. 그 상처, 테이블에 넘어졌다고 해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잖아요. 괜히 추궁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여쭤보지 않았는데… 누가 때린 거죠?”
아이작을 투영하는 연녹 빛 눈동자에 설핏 노기가 서렸다. 달리아는 한결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누가 그랬어요? 주인님? 주인마님? 소공작님이 그러신 거죠?”
“…….”
“…소공작님이구나. 그렇죠?”
아이작은 대꾸 없이 멍한 눈으로 연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낀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학대범들의 공통점은 폭력이 아니다. 학대 사실을 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열이면 열마다 꼭 덧붙인다. 자아가 성숙지 못한 아이들은 잘못하면 또 맞을까 겁을 내며 입을 닫는다.
구빈원에서는 이런 일이 잦았다. 보육 선생에게 맞은 흔적이 뻔히 보이는데도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일도 아니라며 그냥 넘어가려 하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아이작처럼.
그리고 달리아는 그런 부조리를 타파하는 데에 늘 일선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혹시… 얼마 전처럼 그렇게 누가 해를 입히면. 누가 도와줬으면 싶을 때에는 저를 부르세요. 물론 저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긴 한데… 그래도.”
어린아이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건 여태껏 봐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전쟁통에서, 구빈원에서, 보호받지 못해 엉엉 우는 건 달리아 혼자만으로 끝내고 싶었다.
눈앞의 도련님은 몸만 큰 어린아이였다. 아무리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약자인 것이다. 이렇게 예쁘고 다정한 사람이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에게 홀대받는 건 달리아의 상식으로는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꼭 부르세요. 때리는 건 못하지만 도망치고 숨는 건 잘하니까요. 정말 힘들다 싶을 때에는 참으면 안 돼요. 꼭 저를 부르세요. 아셨죠?”
달리아가 그의 뺨을 꼭 붙든 채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낮게 깔린 속눈썹이 위로 들리더니 아래를 향해 있던 흐릿한 흑색 눈동자가 천천히 이성을 내비치며 달리아의 눈을 직시했다.
검은 밤보다 더 깊은 색의 동공이 빨아들일 것처럼 달리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차분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가쁜 숨결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작은 숨을 갈무리할 생각도 못 한 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부르면. 나 데리고 도망치기라도 하려고?”
절박한 표정과 상반되는 짙은 희열이 까만 눈동자를 잠식해갔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달리아는 그저 긍휼한 마음으로 입을 달싹였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때에는 도망쳐야지요.”
“정말?”
“네.”
“……왜 그렇게까지… 나를 걱정하는데?”
초조함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정말로 아이 같았다. 달리아는 손을 떼어내고 천장으로 눈을 돌린 채 싱긋 웃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로렐이 생각났다. 나약한 몸으로 늘 괜찮다고 말하며 먼 곳에서 홀로 그녀를 기다리는 씩씩한 로렐.
아이작은 동생을 닮았다. 힘들어도 절대 말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얼버무리는 그 모습마저 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의 처지가 자신과 동생처럼 안쓰러운 것도 한몫했다.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던 달리아는 답을 깨닫고 신음을 흘렸다. 걱정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유를 이루는 근본은 단순했다.
“도련님을 좋아하니까요.”
천장을 향해 있던 눈동자가 다시 아이작을 향했다. 달리아는 조금 더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애타는 소년의 눈시울 속에 성모처럼 웃고 있는 하녀의 모습이 담겼다.
“당연히 좋아하니까 걱정하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치맛자락을 지분거리던 손이 연고를 쥐고 있던 아이작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곤 위로하듯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던 아이작이 맞닿은 손을 향해 시선을 떨궜다. 홉뜬 눈시울 위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오래도록 눈을 깜박이지 않아 붉어진 눈동자 위로 얇은 물막이 서렸다.
좋아하니까.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여태껏 단단하게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발판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 말은, 황홀할 만치 아름다운 울림으로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시린 눈을 감추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줬지만 그럼에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힘겹게 손가락에 힘을 줘 애꿎은 연고만 연신 움켜쥐었다.
“…착한 아이.”
너는 나를 착한 아이로 보는구나.
……네가 보는 아이작은,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착한 아이였구나.
투명한 차창으로 보랏빛 황혼이 쏟아져 내려와 아이작의 볼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눈동자에 서린 물막이 무게를 못 이겨 무너져내렸다. 안식의 빛이 머무른 뺨 위로, 투명한 물줄기가 아주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 * *
어둠을 머금은 별채는 계절 탓인지 벌레 우는 소리도 새 소리도 없이 바람 소리만 가득 나부꼈다.
멍하니 책에 시선을 두고 있던 아이작이 책갈피를 들어 책에 끼웠다. 집중도 안 되는 걸 뭐하러 읽고 있는 건지, 습관이 무섭구나 생각하며 램프를 끄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오 년간 겪었던 감정들보다 오늘 하루 동안 겪은 감정의 폭이 훨씬 격해서 도통 흥분이 식지를 않았다.
“달리아는 나를…”
좋아해.
좋아한다니. 나를 좋아한다니.
누군가의 순수한 호의가 이렇게 기꺼울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벅찬 호의를 매일매일 누리고 사는 걸까.
부러움과 질투가 몽글몽글 덩어리를 이루어 가슴을 치고 나가 목구멍 근처를 세게 압박했다. 그러나 곧, 자신도 그 호의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목구멍을 짓누르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더 이상 질투하고 부러워할 필요 따위 없었다. 나도 그러니까.
달리아는 나를 좋아하니까.
가라앉은 마음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잠이 스물거리며 아이작을 삼켰다. 이윽고, 의식의 끈이 풀리고 세상을 이루던 모든 것이 꿈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잠이 아닌 꿈으로.
안식이 아닌 또 다른 절망으로 내쳐졌다.
하얀빛이 눈꺼풀을 두드린다. 눈꺼풀을 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시계가 넓게 확장되었다.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아이작이 몸을 일으켰다.
하얀빛이 모래알처럼 흩날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 위로 눈에 익은 거실 풍경이 드러났다. 낡고 낡아 곰팡내가 물씬 풍기는 그 집.
도망칠 수 없는 나락, 르네의 집이었다.
……매번 똑같은 꿈.
숨을 멈춘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돌이킬 때마다 쓰라린 상처를 동반하는 꿈이다. 아득한 의식 속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리 와, 아이작.]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아이작에게 손을 까닥였다.
고운 외양과 더불어 굽이치는 붉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자랑이었다. 혹여 불씨가 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벽난로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던 여자였는데, 웬일로 저 앞에 앉아 있는 걸까.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추위에 달달 떨고 있던 여자가 미적거리는 아이작의 몸을 끌어당겨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자작 놈. 꼴랑 2실버 줘놓고 마구간에서 그 짓을 하다니. 변태 같은 놈들 상대하는 건 아주 지긋지긋하다니까.]
[…추워.]
[가만히 있어! 집에 처박혀 있던 주제에 춥기는 뭐가 추워! 너희들이 먹고사는 게 다 내 덕분이라는 거 몰라?]
욕을 내뱉던 르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작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걸!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거지같이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너 가졌을 때는 나도 팔자 좀 펴나 싶었는데 설마 그년이 자객까지 보낼 줄이야…!]
빠득, 이가는 소리가 타닥거리는 장작불 소음 위로 낮게 울렸다.
[공작 부인이면 뭘 해! 남편 간수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멍청하기는…]
아이작을 안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가녀린 팔뚝 위로 날카로운 손톱이 사정없이 박혀 들었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묵묵히 그녀의 분노를 감내했다.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르네는 화려한 외모와 애교로 뒷세계를 주름잡던 창부였다. 부유층을 상대로 웃음을 팔던 그녀는 어지간한 귀족보다 호화로운 삶을 영위했다.
유프겐슐트 공작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정확히는, 공작 부인의 화를 사기 전까지는.
[망할 년! 내가 호락호락하게 당할 줄 알아?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지. 끝까지 숨어 있다가 네가 성년이 되는 순간 그 집안에 들이밀 거야. 그 잘난 공작가가 어떻게 무너지나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지.]
르네는 스스로 한 말에 고무된 건지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었다. 불길을 응시하는 얼굴 위에 분노가 걷히고 서서히 회한이 내려앉았다.
[게헤른… 지금도 나를 찾고 있을 텐데. 네 아버지는 정말로 나를 사랑했단다. 그 여자와 내 차이는 출신밖에 없어. 내가 후작가에서 태어나고 그년이 양초꾼 딸로 태어났다면, 지금 그 저택에 있는 건 분명 나였을 거야.]
어린 아이작은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르네가 말하는 그년이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게헤른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만 이해할 뿐이었다.
중얼중얼, 그녀가 내뱉은 혼잣말이 끊임없이 고막을 어지럽혔다. 지리하게 이어지던 혼잣말 너머로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 오셨어요…?]
애틋한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던 르네가 문 닫히는 소리에 홱 고개를 쳐들었다.
사납게 치켜뜬 그녀의 눈동자 속에 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남자아이 하나가 들어찼다. 장작불을 바라보던 따스한 눈빛이 그녀와 같은 색의 붉은 머리 아이를 응시하면서 전혀 상반된 감정으로 르네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온화한 빛에 물들어 있던 눈동자 속에 천천히 어둠이 퍼져나갔다.
[드레스 빨아놓으라고 아침부터 얘기했잖아! 넌 집안에서 하는 게 빵 처먹는 것밖에 없어? 식충이 같은 놈!]
[지, 지금 할게요. 바로 빨래할게요…]
[엄마 말이 우스워? 말하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
몸이 기우뚱한 걸 느끼고 아이작은 재빨리 그녀의 품을 벗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작을 밀쳐낸 르네가 아이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폭력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