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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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누르고 있던 커다란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허리를 붙들었다. 아이작은 인파로부터 달리아를 감추려는 듯 두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서 빠른 걸음으로 상가 앞을 벗어났다. 

두근두근, 맞닿은 가슴으로부터 느껴지는 고동이 혼란스러우면서도 몹시 부끄러운 감정을 부추겼다. 달리아는 상기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아이작에게 안긴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고작 가벼운 포옹일 뿐인데 왜……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왜 두근거리는 걸까.

도련님이 원래 이렇게 덩치가 컸었나? 힘도 이렇게 센 줄 몰랐는데…

가냘프고 처연한 도련님은 볼 때마다 새하얀 카나리아를 떠올리게 했다. 보살피고 돌봐야 하는, 손길이 닿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릴 것만 같은 연약한 사람.

그러나 막상 붙잡은 손은 달리아의 손보다 훨씬 더 크고 길쭉했다. 곧게 핀 상체는 부드럽기는커녕 넓고 탄탄하기만 해서 도저히 사춘기 소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도련님은, 카나리아 따위가 아니었다.

“달리아. 저기 노란 간판 보여. 달리아가 말한 서점이 저기 아니야?”

먼 곳을 향해 있던 시선이 다시 달리아를 향했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천천히 아래를 향하더니 선이 또렷한 눈시울이 부드럽게 휘었다.

흐린 눈으로 그를 마주 보던 달리아가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왠지, 두근거림이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허둥지둥 아이작의 소매를 붙들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맞아요, 저기가 서점이에요. 빠, 빨리 가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앞서가는 달리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곧, 부드럽게 굽이치는 다갈색 머리 옆에 삐죽 튀어나온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는 걸 보고서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 * *

서점과 공원, 카페와 쿠키 가게를 차례대로 순례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레이스 가게였다.

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며 아이작을 닦달할 때는 언제고, 달리아는 시가지 끝에 자리한 레이스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홀린 듯 쇼윈도를 응시했다.

쇼윈도에는 페티코트와 장갑, 손수건과 리본 등등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달리아는 손뜨개로 만든 까만 곰 인형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곰 인형이 매달고 있는 하얀 레이스 리본을 가리키며 웃었다.

“도련님, 이것 보세요. 인형은 엄청 투박한데 매달고 있는 리본은 되게 화려해요.”

“그러네.”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이렇게 꾸며놓으니까 되게 잘 어울리네요. 리본 예쁘다…”

그녀의 말처럼 새카만 곰 인형과 하얀 리본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곰 인형이 예쁘다기보다는 리본이 워낙 우아해서 어디든 잘 어울리기 때문일 터였다.

가만히 달리아와 쇼윈도를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시가지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인파가 모여 있는 상가 근처에 아이스크림과 레모네이드를 파는 가판대가 보였다.

“달리아. 목마르지 않아?”

“아까 차 마셔서 괜찮은데. 도련님 갈증 나세요?”

“목마른 건 아닌데 저게 맛있어 보여서. 한 잔만 사다 주면 안 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달리아는 레모네이드 가판을 쳐다보고서 도련님께 저런 음식을 사다 드려도 괜찮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곧,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드셔 볼까 싶어 흔쾌히 기다리라 말하곤 가판으로 달려갔다.

“귀여운 아가씨네. 레모네이드 한 잔 드릴까?”

“네! 한 잔만 주세요. 얼마예요?”

“2빌링이에요.”

돈을 꺼내기 위해 품 안을 더듬다가 얼핏 가슴 안쪽에 숨겨놓은 명패에 손이 닿았다. 기왕 들고나온 거 이걸로 계산할까 고민했지만 달리아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아이작을 부탁한다며 준 선물이니 그냥 써 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좋은 식당에 가서 밥을 먹거나 비싼 선물을 사는 것도 좋겠지만 왠지 도련님에게는 가치 여하를 불문하고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작은 것들을 선물하고, 먹이고 싶었다.

원래 공감대라는 건 서로의 입장이 동등할 때 가장 크게 빛을 발한다. 달리아는 사석에서까지 빚지는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저택에서는 조심해야겠지만, 적어도 저택 밖에서는 굽신거리고 싶지 않았다.

형편은 넉넉지 않더라도 그녀는 돈을 버는 직장인이었다. 게다가 바로 어제 월급을 받은 참이었다. 도련님에게 레모네이드 한 잔 정도는 충분히 사 줄 수 있는, 어른이었다.

“여기, 2빌링이요.”

작은 구리동전 두 개를 가판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은 푸근한 웃음을 머금고 재빨리 레몬을 잘라 즙을 짜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목도리가 엄청 예쁘네.”

유리병을 건네며 주인이 달리아의 목도리를 가리켰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던 달리아가 유리병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아이작이 사 준 하얀 목도리는 문외한인 그녀의 눈으로도 무척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달리아는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물 받은 거예요. 잘 어울리나요?”

“아가씨 얼굴이 그렇게 뽀얀데 뭔들 안 어울릴까. 아유, 이거 자세히 보니까 털끝만 은색인 게 설원 토끼로 만든 건가 보다. 이렇게 비싼 걸 선물 받았어?”

“설원 토끼? 비싼 거예요?”

“그러엄. 고도가 높은 곳에서만 사는 놈들이라 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래.”

자신도 젊었을 때에는 이런저런 선물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비싼 건 못 받아봤다며 주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작은 가죽으로 귀마개 만든 건 봤는데 이렇게 통째로 목도리를 만든 건 처음 봐. 아가씨 애인 엄청 능력 좋은 사람인가보다.”

“에이… 그래 봤자 목도리인데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겠어요.”

“어머머, 아니야. 지금 그거 전당포에 팔아도 30실버는 받을 수 있을걸? 설원 토끼 가죽은 황금 여우 가죽보다 더 귀한걸.”

30실버라는 말에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놀란 얼굴을 보고 한참을 웃던 주인이 레모네이드가 든 유리병을 재차 흔들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달리아는 목을 굽혀 목에 걸린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30실버…?”

걸음을 옮기면서도 머릿속에 30실버가 떠나질 않았다.

석 달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목에 두르고 있다 생각하니 도무지 황송해서 목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달리아는 목도리와 장갑을 벗어 곱게 접은 다음 옆구리에 끼웠다.

“오래 기다리셨죠?”

벽에 허리를 기댄 채 나른한 눈으로 거리를 살피던 아이작이 달리아를 보고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그게 꼭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 같아서 달리아도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석양의 전조를 알리는 노란 빛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스치는 바람 사이로 스튜와 빵 냄새가 진하게 흘러들어왔다.

이제 돌아가야지,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두 사람은 차가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련님. 이 목도리랑 장갑이요. 다음부터는 이런 선물 사 주시면 안 돼요.”

목도리와 장갑을 내보이며 달리아가 진중한 어조로 충고했다.

아이작은 레모네이드가 든 병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왜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세웠다.

“왜 사 주면 안 돼?”

“그야 이렇게 비싼 물건은… 저 같은 사람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내가 보기에는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건 도련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니 그런 거지요. 이런 건 제 분수에 안 맞는 물건이에요.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좋은 거 하고 다니면 훔친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유리병 입구의 코르크를 톡톡 두드리던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달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눈썹을 추어올린 모습이 퍽 애잔했다.

“분수에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그냥 달리아가 하면 예쁠 것 같아서 산 건데… 이런 건 사 주면 안 돼?”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괜찮아요. 저는 그냥 아무거나.”

“선물할 때마다 가격을 확인해야 해? 비싼 게 좋은 거잖아. 나는 달리아한테 좋은 것만 선물해 주고 싶어.”

눈치를 살피면서도 꿋꿋이 말을 매듭짓는 모습에 달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이작의 말은 정론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비싸고 좋은 것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모든 이가 똑같을 것이다. 달리아 또한, 자신은 코트 하나로 겨울을 나면서 로렐에게는 좋은 옷만 사서 보냈다.

하지만 입장 차이가 이렇게 크면 받는 입장에서는 부담일 뿐이었다.

너무 비싼 선물은 자신에게 외려 독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난처한 심정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아이작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손바닥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알아. 부담스럽다면 다음부터 조심할게.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만 받아 줘.”

“…이게 뭔데요?”

“아까 레모네이드 사러 갔을 때 산 거야.”

얇고 평평한 상자는 공단 리본과 말린 꽃으로 장식되어 포장만으로도 비싼 선물임을 은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망설이며 시선을 돌리니 아이작이 시무룩한 얼굴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건 비싼 거 아니야. 풀어보면 알아.”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에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달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뜩잖은 손길로 리본을 풀었다.

설마 장신구나 시계 같은 건 아니겠지?

비싼 거면 바로 돌려드려야지, 생각하며 상자를 연 찰나 전혀 예상치 않은 물건이 튀어나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 이거. 아까 그 인형이 하고 있던 리본 아니에요?”

아주 가느다란 실을 한땀 한땀 엮어 만든 것 같은 하얀 리본. 레이스 가게에서 까만 곰돌이 인형이 메고 있던 그 리본이었다.

“맞아. 달리아가 눈여겨보길래. 그 곰 인형보다 달리아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요…”

비싼 게 아니라지만 직접 수직으로 뜬 것 같은 리본은 척 봐도 꽤 값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다 해도 리본은 리본일 뿐. 달리아의 급여로 살 만한 수준은 될 것 같았다.

이거라면 갖고 다녀도 훔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부담감에 얼룩져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달리아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다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맙습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작이 화색을 띠며 미소에 화답했다. 휙휙 변하는 표정이 재미있어 달리아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먼저 차에 다다른 아이작이 손을 내밀어 달리아를 에스코트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달리아는 도련님이 자신을 에스코트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멍하니 그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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