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차분히 달리아를 응시하던 카를라의 입매가 낯선 희열로 실룩거렸다. 어리고 순진한 하녀로서는 문장의 담긴 속내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카를라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느릿하게 말문을 뗐다.
“믿을지는 몰라도 난 아이작을 싫어하지 않거든. 그 애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서로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해. 이 넓은 저택에 친구 하나 없는 건 정말 가엾잖아… 물론 어머니나 막스한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응원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카를라가 벽난로 위에서 무언가를 들고 왔다.
하얀 조각에 늑대가 부조된 가문의 명패였다. 굳어 있는 달리아의 손을 펴 명패를 쥐여 주며 카를라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선물이야. 앞으로도 아이작을 잘 부탁해.”
카를라는 그럼 나가보라며 말을 매듭지은 뒤 달리아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쥐었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에서 짤그랑,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눈으로 명패를 바라보던 달리아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패를 투영하는 눈동자가 혼란에 잠겨 있었다.
이게 뭐지?
뭔가 중요한 물건인 건 알겠는데 어디에 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의아하던 참이었다. 고민하던 달리아는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명패를 갈무리하는 손이 은근히 떨렸다. 다정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던 카를라가 직접 문을 열어 달리아를 배웅했다.
홀로 남은 방 안에 공허의 향기가 내려앉았다. 술잔을 까닥이던 카를라가 표정을 지우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텅 빈 뇌리에 사라진 하녀의 뒷모습이 잔재처럼 남았다.
“달리아 벨로흐……”
저 하녀를 이용한다면.
짐승을 제어할 수 없다면 그 주인에게 고삐를 채우면 그만이다.
가족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아이작에게까지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하녀를 잘 구슬리면 아이작을 움직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멍청한 아이작.”
주제 파악이나 할 것이지 누굴 좋아한다고.
냉소적인 혼잣말과 달리 카를라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아이작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단지 갸륵한 마음보다 그 괴물의 광기에 침식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을 뿐이었다.
만일 아이작이 조금이라도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날의 사건만 맞닥트리지 않았더라면 남매 관계가 썩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괴물의 실체를 안다. 그리고 그런 괴물을 가족이라 포용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넉넉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 앞가림만으로도 벅찬데 누굴 감싼다고.
저택에 온 괴물은 피해자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철저히 약자인 척 행동하며 살았다. 아마 아이작으로서도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사는 거겠지만, 학대에 가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카를라는 제 할 몫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방관자. 누군가는 손가락질할 테지만 카를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포지션이었다.
스스로의 옹졸함을 직시하기에는 그녀의 삶이 너무 무거웠다. 카를라는 천천히 눈을 감고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그저 괴물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를.
하녀의 초록 눈동자가 괴물을 교화할 수 있기를 바라며 카를라는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 * *
겨울이 무르익은 창공에 철새가 무리 지어 날아올랐다.
늘 똑같은 겨울이지만 저택이 아닌 곳에서 느끼는 겨울은 색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멍하니 산을 쳐다보던 아이작이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달리아. 저거 봐. 저 위에만 하얀색이야.”
겹겹이 둘러싸인 산등성이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장관을 이뤘다. 달리아는 아이작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만년설이네요. 북부는 여름에도 산꼭대기에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하지요? 정말 여름에도 녹지 않을까 궁금하네요.”
“여름에도 눈이 안 녹아? 어떻게 그래?”
“…도련님, 저 산 본 적 없으세요?”
“모르겠어. 오늘 처음 봐.”
북부를 감싸고 있는 거인의 등뼈는 헬만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런데 처음 본다니, 정말이냐고 묻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저택에만 있었으니까… 밖으로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이야. 저택은 평지뿐이라서 전부 평평할 줄 알았는데. 헬만은 산이 많구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아이작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달리아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목도리를 풀어 아이작의 목을 감쌌다. 두 사람 사이를 스친 서늘한 바람이 언덕 아래의 시가지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조금 더 걸어야 해요. 도련님, 제 손 잡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손이 다가와 달리아의 손을 덥썩 잡아들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갈라져 부르튼 달리아의 손은 장갑마저 끼지 않아 추위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매를 찡그린 채 손을 내려다보던 아이작은 장갑을 벗어 달리아의 손에 끼웠다. 그리고 벗어날 수 없도록 손가락을 단단히 얽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달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년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손. 지금도 또래보다 체격이 월등한데 손발마저 이렇게 크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대체 얼마나 클까 궁금해졌다.
“달리아, 나 서점 가 보고 싶어. 시내에 서점 있지?”
아이작이 손을 붙든 채 들뜬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자연스러운 태도에 달리아는 난처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점 가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위치를 미리 알아 왔어요. 시가지 중앙 분수 근처에 커다란 서점이 있대요. 역사가 무척 오래된 곳이라던데 서점 간판에 120년 역사라고 쓰여 있는…”
달리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얼핏 차분해 보이지만, 평소보다 보폭이 큰 걸음에서 그녀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장장 열흘 만의 휴가였다.
귀한 도련님께 낡은 책 하나를 선물이랍시고 준 게 마음에 걸렸던 달리아는 월급날에 맞춰 시내로 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문득, 도련님과 함께 외출하면 어떨까 싶어 아이작에게 의사를 물었다.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아이작은 흔쾌히 그러겠다 대답하며 달리아의 손을 잡고 저택을 벗어났다. 후버의 싸늘한 시선을 뒤로한 채, 아이작은 그녀와 함께 시내로 나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나중에 주인마님께 걸리면 어떻게 하죠? 괜히 도련님께 불똥 튀는 거 아닐까 걱정이네요.”
“괜찮아. 걸려도 혼나면 그만인걸.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싫은 소리 하는 건 똑같으니까 그냥 좋을 대로 할래.”
“…썩 좋은 해결방법은 아닌 것 같네요. 나중에 뭐라고 핑계 댈지 미리 고민해놔야겠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달리아는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저기 좀 봐.”
상업 거리에 다다르자 수많은 인파와 함께 색색의 간판과 차양이 시선을 매혹시켰다.
아이작은 길게 목을 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선물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이 쇼윈도에 진열된 오르골과 수첩, 인형 따위를 느릿하게 훑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이동하던 시선이 한 점에서 멈춰 섰다. 아이작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단 채 달리아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이거랑 이거 주세요.”
아이작은 쇼윈도에 늘어서 있던 하얀 가죽장갑과 토끼털 목도리를 집어 가게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이 가격을 말하려던 찰나 그가 먼저 프록코트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늑대가 부조된 상아 명패. 유프겐슐트의 문장이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명패를 살피던 주인이 아이작의 옷차림과 명패를 다시 살피고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비싼 옷차림도 남달랐지만 그가 들고 있는 명패는 의심할 나위 없는 진짜 유프겐슐트의 상징이었다.
아연한 얼굴로 인사를 거듭하는 주인에게 아이작은 수고하세요, 한 마디만 남기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아이작은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달리아의 손에 장갑을 새로 끼우고 목도리를 감아 주었다. 낡은 드레스와 반들반들하게 닳은 코트에 화려한 목도리와 장갑을 끼니 빈말로라도 조화롭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작의 눈에는 그런 부조화마저 달리아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편린처럼 느껴졌다.
아이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떠올린 채 손등으로 달리아의 뺨을 슬쩍 쓸어내렸다.
“예쁘다. 잘 어울리네.”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달리아가 가게와 아이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이런 걸 왜 사셨는… 아니, 도련님. 아까 그건 뭔가요?”
“아까 그거? 이것 말고는 또 산 거 없는데.”
“아뇨. 아까 코트 안에서 꺼내신 물건이요.”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작이 탄성을 흘리며 품 안에서 하얀 명패를 꺼내 들었다.
“가문 명패야. 신분 증명할 때 쓰는 거라던데 아까처럼 물건 살 때도 쓴다고 했어. 나중에 저택으로 청구서가 온다나 봐.”
상아로 만든 하얀 명패는 가문의 문장 외에도 복잡한 도식과 문양이 어지러이 섞여 어지간한 세공사가 아니라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게끔 정교히 만들어져있었다.
뚫어져라 명패를 쳐다보던 달리아는 얼마 전 카를라가 준 물건이 지금 이것과 똑같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귀한 물건이라는 건 알았는데, 설마 돈 대신 쓸 수 있는 물건일 줄이야.
괜히 신경 쓰여 명패를 숨겨 둔 가슴 옆쪽을 슬슬 어루만지자 아이작이 볼을 붉히며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린 달리아가 허옇게 뜬 얼굴로 오해라며 해명 아닌 해명을 뱉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거리를 쳐다보던 아이작이 갑자기 달리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엇…!”
놀랄 새도 없이 달리아가 서 있던 자리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탈그락거리는 소음 끝에 아이작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길이 좁아서 위험해. 이리 가까이 와, 달리아.”
허스키한 목소리가 코앞에서 울려 퍼졌다. 빈틈없이 맞붙은 상체 너머로 어린 소년이라 생각할 수 없는,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가슴이 느껴졌다.
바람을 타고 겨울밤이 떠오르는 메마른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게 아이작에게서 흘러나오는 체향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달리아의 뺨 위로 분홍빛 홍조가 확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