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수줍음 많고 조용하던 성격의 제니가 매음굴이라니.
그때도 지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비약이라고만 여길 수도 없었다. 귀족들이 점 찍은 아이들은 늘 그런 식으로 버려진다. 부인으로 들이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고 그렇다 해서 정부로 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아이들. 제니뿐만 아니라 안젤라도, 밀레나도 그랬다.
기댈 곳 하나 없고 재주도 없는 어린 여자. 게다가 애까지 딸린 여자에게 우호적인 곳은 무척 드물다. 당장 몸 하나 누일 곳 없는 여자들이 아이를 안고 매음굴에 다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저도 모르게 왈칵 화가 치밀었다.
“고아들은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줄 아나.”
고아 출신의 소녀들은 영악한 남자들의 노리개로 그만이었다. 애를 가졌다고 해서 따지고 들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혹여 결혼해서 데리고 산다 해도 가족이 없으니 지참금을 낼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성격이 순진하니 데리고 놀기 딱 좋을 것이다.
흑심 가득한 눈빛과 손길은 달리아에게도 익숙했다. 체레코팔츠를 떠난 데에는 그런 남자들의 시선이 지겨웠던 이유도 한몫했다.
……그래도, 도련님은 달라.
사생아로 태어난 도련님은 그런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렇기에 순진한 여자를 희롱해 사생아 따위를 낳게 할 일은 없을 터였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머릿속을 열어보지 않는 이상 이런 추측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여태껏 달리아가 봐 온 도련님은 누구보다 차분하고 다정하고 우아한 사람이었고, 사생아라 한들 그 유명한 유프겐슐트 공작가의 핏줄이었다. 제니를 희롱하던 자작가의 나쁜 놈과는 애초부터 격이 달랐다.
체스판을 톡톡 두드리던 곧은 손가락을 떠올린다. 감정이 희미한 얼굴 위에 간혹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미소를 떠올린다. 변성기가 막 끝난 듯한 낮고도 가느다란 목소리를 떠올린다.
제니에 대한 기억으로 삭풍이 불던 뇌리에 도련님의 허상이 꽃처럼 피어났다. 달리아는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향하는 걸 느끼고 눈을 감았다.
“도련님도 주무시고 계실까.”
잡생각이 사라지고 도련님의 웃음소리가 살며시 귓가를 맴돌았다.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그 웃음소리가 그립다니.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른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애써 도련님을 뇌리에서 지워 낸 달리아는 무슨 책을 사 가면 좋을까 고민하며 천천히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보름이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없는 일상을 보낸 달리아는 휴가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잔뜩 지친 몸으로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공작 저에 도착했을 때는 막 정오가 지난 참이었다.
하녀장에게 귀환을 알린 후 달리아는 숙소로 돌아갈까 도련님께 책을 전해드릴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가진 돈을 거의 다 써 버려서 새 책은 못 사고 헌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준 금화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아서 여전히 품속에 남겨진 상태였다.
달리아는 손에 들린 책을 힐끗 쳐다보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낡고 볼품없긴 하지만… 그래도 고심해서 고른 책이니까. 도련님이라면 실망하지 않으실 거야.
속으로 되뇌며 그가 있는 좌익관을 향해 바삐 걸어갔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던 마음은 아이작을 마주한 순간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책이고 금화고 다 잊어버린 채 달리아가 경악스러운 외침을 뱉었다.
“도련님! 얼굴이 왜…!”
못 보던 상처가 아이작의 얼굴을 잠식하고 있었다.
하얗고 매끈하던 뺨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눈썹 끝자락에 푸르스름한 멍은 또 뭔지. 아연한 얼굴로 그를 붙잡으니 아이작이 미간을 추어올리며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체스 테이블을 정리하다가 넘어졌거든. 모서리에 부딪혀서 좀 다쳤어.”
“세상에… 얼마나 다치셨길래 이렇게 반창고까지 붙이셨어요! 어디 좀 봐요!”
“아니, 괜찮아. 그냥 혹시 몰라서 붙여 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정말 괜찮아.”
뺨이 부어오른 게 확연히 보이는데도 아이작은 단호한 어조로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못마땅한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아이작은 괜찮다 거듭하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휴가는 잘 다녀왔어? 별일 없었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다친 곳을 바라보던 달리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화제를 돌린 걸 보면 상처에 대해 숨기고 싶은 거겠지. 심정이 눈에 보일 듯 선해서 달리아는 쓰린 속을 달래며 그의 의도에 편승했다.
“네. 휴가는 그냥 그랬어요. 구빈원이야 늘 똑같죠.”
“동생은? 몸이 안 좋다고 했잖아. 어디 아픈 덴 없고?”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던 것 같아요. 편지에 쓴 것처럼 키가 훌쩍 자라서 깜짝 놀랐어요.”
“애들은 원래 못 본 사이에 더 빨리 큰다고 하잖아.”
부드러운 목소리 끝에 흠, 하고 침음이 스쳤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작이 눈을 반짝이며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떤 것 같아? 안 본 새에 좀 더 큰 것 같아?”
상처 난 얼굴 위로 그와 어울리지 않게 짓궂은 미소가 스물스물 퍼져나갔다. 생기가 넘치는 표정을 보고서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마지막으로 도련님과 헤어진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걸요. 아무리 도련님이 빨리 자라셔도 어떻게 보름 만에…”
창가에 앉아 있던 아이작이 몸을 일으켜 앞에 서자, 달리아가 말을 흐리며 놀란 눈으로 아이작의 위아래를 훑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시선의 위치가 똑같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살짝 눈을 들어올려야 했다. 정말로, 키가 컸다.
“정말… 크셨네요. 와… 어떻게. 보름 만에 키가 이렇게 클 수도 있네요.”
“또래보다는 큰 편이라던데, 그래도 달리아보다 컸으면 싶었거든. 금방 이뤄져서 다행이야.”
아이작이 뺨에 붙은 반창고를 툭툭 두드리며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장난기가 다분한 어조에 달리아가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물었다.
“도련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몇 살처럼 보여?”
“아이, 장난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열 살은 아니야.’, 장난스러운 말투에 달리아가 입을 샐쭉 내밀고 토라진 얼굴로 대답을 종용했다. 아이작은 달리아의 손목을 붙들고 방을 나서며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답을 속삭였다.
“열넷. 해가 지났으니 곧 열다섯이네.”
원래도 커다랗던 달리아의 눈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래졌다. 진짜냐며 되묻는 달리아에게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성숙한 어른의 향기가 물씬 풍기던 도련님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걸 알게 된 달리아가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만 끔벅이며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둘이 함께 저택 1층에 다다른 순간, 사용인들의 인기척을 느낀 아이작이 달리아의 손목을 내려놓고 본관 쪽으로 눈짓을 던졌다.
“오늘까지 휴가지? 일하지 말고 기숙사에서 쉬도록 해. 그리고 다음부터는 좌익관 말고 별채로 와.”
“돌아가시는 거예요?”
“응. 사실… 엊그제부터 다시 별채에서 생활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제 청소하러 오지 않아도 돼.”
뒷짐을 쥔 채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서 설핏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별채로 돌아갔다면서 왜 굳이 좌익관에 남아 있었는지 의아했건만, 달리아는 아이작의 태도에서 그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말을 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헛걸음하지 말라고 그 방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아련함을 끊어내듯 아이작이 달리아의 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다음에 봐, 담담한 목소리에 달리아가 상념을 걷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갖고 온 물건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달리아는 품에 들고 있던 책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저기, 이거… 도련님 선물이에요. 책 사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그, 낡았지만 안은 깨끗하거든요. 엄청 재미있는 소설이라서 골라봤는데…”
“…….”
“도련님께서 주신 돈은 차마 쓸 수가 없었어요. 그게… 너무 귀한 돈이잖아요. 그래서 헌 책을 사 왔는데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아니. 아니야.”
뚫어져라 책을 응시하던 아이작이 소중한 것을 보듬듯 책을 안아 들었다. 반창고가 붙어 있던 볼이 살짝 위로 움직이며 밋밋하던 입가에 화사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고마워. 잘 읽을게.”
모서리가 닳아서 둥글둥글해진 것 외에는 아주 깨끗한 책이었다. 보고 싶었던 책이라고, 정말 기쁘다 말하니 달리아가 멋쩍은 웃음을 내보며 인사를 건넸다.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이작이 품 안의 책을 더욱 세게 부둥켜안았다.
작아지는 실루엣에 비례해 두근거리는 울림이 점점 크기를 키워 고막까지 다다랐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아서 책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그녀가 사라진 복도에 옅은 햇살이 내리쬐고, 허공에 너울대는 먼지가 성흔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선물…”
생전 처음으로 받아 보는 선물이었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만 구분된 그의 뇌리에 선물이라는 건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저택에 오고 난 후, 필요한 건 뭐든 구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가 사심을 담아 물건을 전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
‘혹시 돈이 남게 되면 책 좀 사다 줄래? 저택에 있는 건 다 읽어서 볼 만한 게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