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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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뭐라고 하셨어요?” 

달리아가 고개를 모로 세운 채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아이작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동생이 구빈원에 있다고 했지. 얼마 만에 만나는 거야?”

“남작 저에 들어간 이후부터 쭈욱 못 만났으니까… 1년이 넘었네요.”

혼자 구빈원을 떠나던 날. 두 사람은 서로의 실루엣이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하염없이 팔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때는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눈물을 참았다. 울보인 로렐도 그날만은 해맑게 웃으며 의젓함을 가장했다. 그게 그 아이 나름의 배려였다는 걸 달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벌써 1년이 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렸지만 조만간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슬픔이 희석되었다. 달리아는 창문 옆의 잠금쇠를 만지작거리며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키가 컸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편지마다 키 얘기뿐이에요. 저는 키가 작아서 로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얼마나 컸을까 기대돼요. 만나면 하루 종일 떠들어 댈 텐데 잠은 잘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오랜만에 만날 생각하니 기분 좋은가 보네. 달리아,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어.”

“앗… 그런가요?”

‘기분 좋으면 너무 티 나서 곤란하다니까요’, 머쓱한 웃음을 터트리며 달리아가 뺨을 쓸어내렸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미소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욱 찬연하게 빛났다.

“달리아. 손 내밀어 봐.”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던 아이작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달리아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물건을 받아든 달리아가 손바닥 안에 반짝이는 금화를 확인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화 한 개. 열 달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을 만한 큰 금액이었다.

이게 뭐냐고 달리아가 묻기 전에 아이작이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 동그랗게 주먹을 말았다.

“휴가비야. 휴가 즐겁게 보내고, 혹시 돈이 남게 되면 책 좀 사다 줄래? 저택에 있는 건 다 읽어서 볼 만한 게 없거든.”

“그… 그래도 너무 많은 돈이에요, 도련님. 이 돈이면 책을 얼마나 살 수 있는 건지.”

“어차피 나는 저택 안에만 있으니까 쓸 데도 없어. 달리아가 쓴 다음 뭘 먹었는지, 뭘 샀는지 이야기해 줘.”

“…….”

“요즘은 네 이야기 듣는 게 제일 재미있거든. 날 위해서라도 받아줘. 응?”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서 뭐라 규정지을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묻어났다. 머뭇거림을 없애려는 듯 아이작이 한 번 더 강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정말 괜찮은데… 일단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달리아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금화를 소중히 받아들었다.

너무 큰 돈이라서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여윳돈이 없는 입장에서 기차표만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는데 뜻밖의 돈을 얻게 되니 기쁘기도 했다.

도련님을 두고 혼자 떠난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곁에 남는다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들 일개 하녀인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아니, 돕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도 있지.

그리고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달리아는 괜찮을 거야, 스스로 세뇌하며 애꿎은 금화만 만지작거렸다.

잘그락잘그락, 주머니 속에서 금화와 잡동사니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자신의 부스러진 양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 * *

추수가 끝난 밀밭으로 농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역할을 다한 낡은 허수아비들이 곳곳에서 불타오르고, 뭣도 모르고 신이 난 어린아이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밭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 해의 안녕을 고하는 안식제가 끝나고 드디어 12월, 휴가가 시작되었다.

“아, 슬슬 보이네.”

밀짚 위에 반쯤 엎드려 있던 달리아가 지푸라기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덜컹거리는 마차 아래로 납작하게 눌린 지푸라기들이 푸스스 흩어져 내렸다.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그리고 마차를 얻어타고 이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저 멀리 구빈원의 갈색 지붕이 보였다. 툭 튀어나온 진회색 굴뚝에 흰색 벽돌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것이 수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긴 여정이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출발할 때쯤 전보를 쳤는데 로렐이 마중 나와 있을까.

농부에게 고맙다 인사한 뒤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들고 있던 여행 가방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 사탕과 인형 따위가 달그락거리며 경쾌한 소음을 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투란 구빈원이라고 쓰여 있는 낡은 간판이 점점 크게 시야에 들어찼다. 동시에 그 밑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점도 모습을 크게 키워갔다.

얼굴을 알아볼 만큼 가까워졌을 때, 간판 아래에서 돌무더기를 쌓고 있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달리아에게 달려왔다.

“언니!”

덥썩,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억셌다.

달리아는 자신을 끌어안고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온 아이는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보다 더 크고, 더 말라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달리아는 아이의 짧은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넘겼다.

“로렐. 언니가 뛰면 안 된다고 했잖아. 기침 심해지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오면 어떻게 해! 일찍 올 줄 알고 아침부터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로렐은 가쁘게 숨을 내뱉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언니를 읊조렸다. 그에 화답하듯 달리아가 동생을 세게 부둥켜안았다.

보고 싶어서 헬만에서 여기까지 뛰어왔다 하니 로렐이 ‘거짓말! 기차 타고 온 거 다 알아!’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자매는 느린 걸음으로 구빈원에 다다랐다.

오랜만에 만난 로렐은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비쩍 말라서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걱정했건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로렐은 잘 먹고 잘 웃으며 씩씩하게 뛰어다녔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원장 선생님과 안부를 나누고 나니 벌써 늦은 저녁이 되었다. 로렐과 함께 다락방으로 올라간 달리아는 가방을 열어 사탕과 인형, 목제 장난감 따위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장난감은 같이 놀고, 과자는 아이들하고 나눠 먹어. 이 레몬 사탕 로렐이 좋아하는 거지? 언니가 역에서 사 왔어.”

“이 사탕 비싼 거잖아. 언니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니야? 이거 다 사려면 돈 많이 들었을 텐데.”

눈치 빠른 로렐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사탕을 쳐다보았다. 달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언니가 저택에서 작은 도련님을 모신다고 했잖아? 휴가 간다고 하니까 그분이 용돈을 주셨어. 그걸로 산 거야.”

“정말?”

“정말. 언니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정작 아이작이 준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손에 들고 있기도 황송한 거금을 어떻게 이런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는 데에 쓸 수 있을까. 때문에 달리아는 비상금으로 모아둔 돈을 거의 다 써 버렸다.

그래도 로렐이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 싶었다. 달리아는 사탕을 까서 로렐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도련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알면 깜짝 놀랄걸. 원래 신분 높은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말 걸면 귀찮아하잖아.”

“응.”

“그런데 도련님은 언니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우신가 봐. 같이 차 마시자고 하고, 힘든 일은 하나도 안 시키고 매일 언니 먹으라고 간식도 따로 빼두셔.”

“정말?”

“그래. 말투도 어쩜 그렇게 나긋나긋하신지… 얼굴도 엄청 예뻐서 깜짝 놀랐잖아. 그 집 아가씨도 정말 예뻤는데 도련님은 아가씨보다 더 예쁜 것 같아. 눈이 이렇게 큰데 눈썹이 엄청 길어서…”

“알아! 언니가 편지에서도 엄청 길게 썼거든. 그래 봐야 남자인데 이쁘면 뭘 얼마나 예쁘다구.”

“아니야! 로렐, 너도 직접 보면 깜짝 놀랄걸?”

달리아가 상기된 얼굴로 그 까만 눈이 얼마나 사슴 같은지, 푸른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얼마나 부드럽게 흔들리는지 따위를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로렐은 졸린 눈으로 언니를 쳐다보다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혹시 그 사람 좋아해?”

달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뒤늦게 뜻을 깨닫고 꽥 소리를 질렀다.

“얘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니.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도련님을…… 그냥 예쁘고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한 거잖아.”

“좋아할 수도 있지 뭘 그래.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재주도 좋으니까 귀족 나으리도 좋아할걸?”

“…무슨, 아니야.”

“왜애. 사탕 가게에서 일하던 제니 언니도 자작가 도련님의 신부가 됐다고 했어. 언니는 제니 언니보다 훨씬 더 예쁘니까 분명 그 도련님도 언니를 좋아할 거야.”

제니, 이름을 듣자마자 달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즐겁게 재잘대는 로렐과 달리 달리아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니는 달리아보다 두 살 위의 언니로 같은 투란 구빈원 출신이었다. 벨로흐 자매가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뒷문으로 몰래 나와 사탕 하나씩을 쥐여 주던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제니가 자작가의 도련님과 사랑에 빠져 신분 상승했다는 소문은 한창 사랑을 꿈꾸는 소녀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달리아가 사탕 가게 아주머니에게 들은 진실은 소문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만 얘기하자. 너무 늦었으니까 이만 잘까? 졸리네.”

달리아는 늘어놓은 물건들을 치운 뒤 재빨리 램프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왜 벌써 자느냐고 투정 부리던 로렐은 피곤했는지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꿈지럭거리는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고서 달리아는 하나뿐인 모포를 동생 쪽으로 조금 더 길게 덮어 주었다.

긴 여정으로 지쳤지만 제니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각성이라도 한 듯 머리가 맑게 개었다. 달리아는 창밖에 희끄무레하게 떠 있는 달무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제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작가 도련님의 신부는 무슨.”

부른 배를 끌어안고 사라진 제니는 체레코팔츠 서쪽의 빈민가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 뒤, 국경 너머로 자취를 감춰 소식을 들을 수 없다 했지만…

마지막으로 달리아에게 날아온 엽서는 국경 근처의 소도시, 안크시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철든 여자아이들 중에서 안크시를 모르는 애는 없었다. 달리아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빈민 출신의 아이들은 더더욱 모를 리가 없었다.

안크시는 공화국과 왕국 사이에 무법 지대처럼 세워진 매음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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