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건… 뭐지.
이건 뭘까. 이 맛은, 대체 뭘까.
델마도 뭐도 전부 잊은 채, 달리아는 입 안에 든 것을 오물오물 씹는 데에만 집중했다. 신기하게도 씹을수록 단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탱글탱글하면서도 꼭꼭 씹히는 식감은 또 어떻고.
꿀꺽, 씹고 있던 걸 삼키자 공허함을 느낀 혀가 방금 그 음식의 여운을 다시 한번 곱씹고 싶다며 열심히 침을 뿜어댔다.
“맛있다…!”
눈을 빛내며 반응을 살피던 에디나가 희열에 찬 달리아의 표정을 보고서 한참을 깔깔거렸다. 그러면서도 발라낸 게살을 친절히 입에 넣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세상에, 여태까지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는 닭 다리 구이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
충격이었다.
가슴을 들썩이던 달리아는 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서둘러 포크를 집어 들었다. 충격은 나중에 곱씹어도 되지만 눈앞의 게는 추후에 곱씹을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서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게살을 입으로 날랐다.
배불리 게를 먹은 그날 밤, 달리아는 몸통만 한 게의 집게발을 붙잡고 춤추는 꿈을 꾸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찬연한 고향, 우브랑에서 달리아는 춤추고 동생인 로렐은 제 팔뚝보다 큰 게 다리를 쪽쪽 빨고 있었다.
곱씹어봐도 정말 행복한 꿈이었다.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꿈에서까지 나오는 거 있죠.”
어제 먹은 게를 회상하며 달리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책장을 정리하던 아이작이 손을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좋았어?”
“그럼요. 그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봤어요. 도련님도 게 좋아하시죠?”
아이작은 고개를 삐뚜름히 세운 채 골몰하다가 미미한 웃음을 머금고서 고개를 저었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니 달리아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 ‘세상에!’라며 탄식했다.
“설마 맛이 없어서 싫어하시는 건 아닐 텐데. 그것보다 맛있는 게 또 있나요?”
순수한 반응에 아이작이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식을 딱히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관심이 없었을 뿐이야. 그리고 게보다 맛있는 건 많지. 달리아는 반응이 좋으니까 이것저것 사서 먹이고 싶네.”
달리아가 숨을 흡 들이쉬고 짐짓 어른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도련님. 저는 정숙한 숙녀예요. 아무거나 함부로 입에 넣지 않아요.”
‘그래도 뭐든 주시면 감사히 받지요’ 이어진 대꾸에 아이작이 입가를 가리고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유쾌한 공기가 방 안을 훈훈하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쾅!
거칠게 문이 젖히고 시커먼 덩어리가 날아와 방 한가운데에 털썩,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윽고 털썩, 털썩. 두 개의 덩어리가 다시 날아와 떨어진 덩어리 위로 내려앉았다.
노랗고 하얀 털 뭉치 사이에 피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게 피투성이로 엉망이 된 토끼의 주검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아이작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북쪽 창고 옆에 토끼들이 다글다글 모여 있더라고. 죽이니까 후버 놈이 아주 안절부절못하던데. 혹시 네가 키우던 건 아니지?”
사냥총을 든 막스가 건들건들한 발걸음으로 문을 밀치며 방에 들어섰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총으로 잡은 토끼를 굳이 칼로 한 번 더 들쑤셔놓은 게 분명했다.
“도련님. 저거, 저게…”
참혹한 모습에 달리아가 잔뜩 굳은 채 아이작의 소매를 붙잡았다.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에 먼저 관심을 표한 사람은 아이작이 아닌 막스였다.
“뭐야. 웬일로 하녀가 다 들러붙어 있어? 그것도 이렇게… 처음 보는 애네.”
유령이니 뭐니 하는 소문도 그렇지만 아이작과 친밀하게 지내면 공작 부인이 난리 칠 것을 알기에 저택의 하녀들은 아이작을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하며 지냈다.
그런데 이건 또 뭐람.
어린 하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이작과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이 막스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흘깃 쳐다보니 얼굴마저 반반해 더더욱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라면 생전 관심 없는 척하더니, 너도 어쩔 수 없는 사내놈인가 보지.”
막스가 히죽 웃으며 달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아이작의 미간에 설핏 골이 패었다.
“막스, 네가 그런 걸 밝힌다 해서 나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녀를 부른 거야. 다들 내켜 하지 않으니 물정 모르는 애가 온 것뿐이고.”
아이작은 덤덤한 어조로 그의 의심을 끊어냈다.
여기서 괜히 친한 척했다가는 달리아에게까지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 우물쭈물하는 달리아를 옆으로 홱 밀치며 아이작은 시큰둥한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청소 끝났으면 이만 나가. 귀찮게 굴지 말고.”
“그래도 도련님, 저 토끼들을 치우려면…”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
그답지 않은 무뚝뚝한 말투였다. 달리아는 상황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서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쫓던 막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교양 없기는. 아무리 사용인들이 하찮아도 그렇지 그따위로 행동해서야 되겠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프겐슐트의 도련님이신데.”
“용건이 뭐야.”
“토끼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선물하러 온 것뿐이야. 마침 별채 근처에 스무 마리가 넘게 모여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
“…….”
“어때. 스튜라도 하라고 할까?”
막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죽은 토끼들을 가리켰다. 비릿한 웃음이 만연한 얼굴에서 악의가 느껴졌다.
후처리 없이 너덜너덜해져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토끼들은 이제 와 손질한다 해도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 토끼들은 아이작이 친히 먹이 주고 기르던 동물들이었다.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악의의 농도가 더욱 짙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은 죽은 토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날씨가 쌀쌀해서 따뜻한 게 먹고 싶었는데 스튜라니… 잘됐네.”
* * *
해 질 무렵의 어스름한 빛이 저택을 감쌌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달리아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야채가 듬뿍 들어간 토끼 스튜, 호밀빵과 야채 절임인 꽤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그러나 맑은 국물 한가운데에 담겨 있는 고깃덩이를 본 순간 아이작의 방에서 본 토끼들이 떠올라 입맛이 싹 사라졌다.
“고기에서 누린내가 나네. 피를 제대로 안 뺐나?”
함께 식당에 내려온 에디나가 스튜를 맛보고서 미간을 찡그렸다. 투덜거리는 모습과 달리 썩 먹을 만한 듯, 에디나는 부지런히 스푼을 움직여 스튜를 비웠다.
망설이던 달리아도 에디나를 따라 스튜를 한 입 머금었다. 역할 거라는 우려와 달리 스튜는 꽤 맛있었다.
에디나는 턱을 괸 채 열심히 스튜를 입으로 나르는 달리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곧 겨울이니까 금방 휴가 돌아오겠다. 달리아, 너는 동생한테 갈 거지?”
“휴가? 무슨 휴가?”
“올해 마지막 주에서 신년 첫 주까지 보름 동안 휴가잖아. 몰랐어?”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더듬던 달리아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정식으로 채용된 날 미시즈 프라다가 휴가에 대해 설명해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 년에 휴가가 두 번 있다더니 그게 겨울이었구나. 마지막 주라면 얼마 안 남았네?”
“그래. 기차표 살 거면 미리 사 둬야 해. 수도로 내려가는 표는 금방 매진되거든. 내일 휴무인 애한테 사 달라고 할까?”
“아니, 구빈원은 수도 쪽이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에디나는 고향으로 가?”
에디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근교의 작은 마을이 고향이라던 에디나는 집에 갈 생각만으로도 들뜨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입에 넣었다.
들뜬 기분이 드는 건 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의 저택에서 휴가란 상급 하녀들, 혹은 시녀들이나 구가할 수 있는 복지였다. 때문에 미시즈 프라다가 휴가를 설명할 때에도 반쯤 흘려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들어둘걸.
달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구빈원까지 어떻게 갈까, 선물은 뭘 사가면 좋을까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난처한 문제를 깨닫고 눈매를 찌푸렸다.
“나 없는 동안 도련님은 어쩌지.”
“도련님? 무슨 도련… 그 도련님?”
고개를 끄덕이자 에디나가 주변 눈치를 살핀 뒤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그걸 네가 왜 걱정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청소한다고 매일 마주치는데 어떻게 나 몰라라 해. 그리고 도련님 성격도 상냥하시고 무척 좋은 분이셔. 에디나 너도 직접 겪어 보면….”
“됐어, 얘. 괜히 주인마님 눈에 띄었다가 무슨 날벼락을 맞으려고. 그런데 네가 휴가 가는 거랑 도련님이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 청소 담당이 나잖아. 다른 사람들은 도련님께 다가가는 거 싫어하니까…”
말을 흐리며 달리아가 아랫입술을 오물거렸다.
사실, 청소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걱정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혹시 소공작님께서 작은 도련님께 해코지라도 하면.
그럼 어떻게 하지.
얼마 전 막스가 별채 앞에서 아이작을 때리려던 모습과 오늘 죽은 토끼를 던지며 비아냥거리던 모습이 한데 겹쳐져 마음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좋은 예감은 맞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나쁜 예감은 신기하게도 잘 들어맞는다. 항상 그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던 날에도, 여동생이 발작을 일으킨 날에도 뒷덜미에 찜찜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도 이렇게, 휴가와 함께 아이작을 떠올리니 그와 똑같은 기운이 목 뒤를 엄습했다.
과민 반응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왠지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달리아는 휴가를 즐거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며 아이작에게 저택을 비운다고 어떻게 운을 뗄까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도 며칠 후, 아이작이 먼저 휴가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면 12월이지?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달리아는 휴가 계획 세웠어?”
팔락, 종이 스치는 소리가 낮은 목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달리아는 뻣뻣한 자세로 서서 들고 있던 걸레를 조물락거렸다.
“휴가 가는 거 알고 계셨어요?”
“매년 있는 일이니까 당연히 알지.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아이작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매를 살짝 끌어당겼다.
때마침 열린 창 너머로 불어온 바람이 이마를 가리고 있던 새카만 흑발을 가볍게 살랑였다. 온전히 드러난 하얀 얼굴 위로 옅게 퍼져나가는 미소를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입매가 씰룩거렸다.
달리아는 입가를 만지작거려 머쓱한 기분을 속으로 삼켰다.
“마지막 주에 떠나서 연말 보내고 그 다음 주에 올 것 같아요. 다들 고향 간다고 하던데 저는 어차피 구빈원 외에는 갈 데도 없으니까, 동생이나 만나고 올까 해요.”
“구빈원은 어디야?”
“체레코팔츠예요.”
체레코팔츠라면 공작 저가 있는 헬만에서 기차로 여덟 시간가량 남하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도시였다. 아이작은 가늘게 뜬 눈으로 책 모서리를 응시하다가 혼잣말처럼 작은 속삭임을 내뱉었다.
“체레코팔츠… 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