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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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기색을 담고 있던 눈매가 순식간에 다시 맑아졌다. 허공에 뜬 손가락이 다시 새를 향해 움직였다. 손끝이 털에 닿을 뻔한 찰나, 아이작이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

아니. 눈앞에 있는 건 이름 모를 새 한 마리뿐인데.

여태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달리아가 아니라 그저 그런 미물일 뿐인데 뭘 이입했나 싶어 허탈해졌다.

잔뜩 굳어 있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소리 없이 손이 내려가고, 아이작은 몸을 늘어뜨린 채 황혼에 젖어 드는 주홍빛 창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하늘이 형연하게 세상을 물들였다. 적막한 평온이 지배하는 곳에 아이작의 숨소리만이 들릴 듯 말듯 미미하게 기척을 알렸다.

평온을 깨트린 건 공작이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기척을 줄인 공작이 무감한 얼굴로 방을 훑었다. 시종도 하인도 없이 홀로 방에 들어선 공작은 창가에 앉아 있던 아들을 발견하고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이작.”

낮게 울리는 저음이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아이작은 내색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로 시선을 받아치며 느긋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깬 새가 퍼드득,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날아올라 창밖으로 사라지고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이작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서 곧게 허리를 세웠다.

“각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머리가 복잡해서 잠시 쉬려고 들렸다. 상대해 주겠느냐.”

아이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체스 테이블이 있는 발코니 근처로 발을 향했다.

네 시간 전, 달리아가 세심히 정리해 두었던 체스판은 복기를 위해 늘어놓은 말들로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아이작은 흐트러진 말을 순식간에 정리한 뒤 정중한 손길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공작은 자리에 앉아 곧바로 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딱, 딱. 돌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늘어서 있던 폰들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초반은 공작의 성급한 성격을 대변하듯 속기로 이어졌다. 폰이 서로 마주 보며 방어 진형을 형성하자,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 나이트를 움직여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묵직한 정적을 깨부수는 건 체스 말이 내는 마찰음뿐이었다.

말들이 초반 진형을 모두 벗어나자 딱딱 움직이는 소리조차 줄어들었다. 공작은 빼앗은 폰을 손안에 굴리며 깊은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주름진 눈가는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났지만 그 위에 자리한 눈은 여전히 칼날처럼 예리했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아이작은 뺨이 따끔해지는 걸 느꼈다.

무슨 말이라도 할 법한데 공작은 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짓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하염없이 아이작만을 바라보았다.

따가운 시선에 아이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공작의 눈매가 한결 가늘어졌다. 그럼에도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미처 감추지 못한 감정들이 눈길을 타고 전해져 아이작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리석은 아버지.

동공 속에서 옅은 회한을 감지한 아이작이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익숙하면서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함을 유발케 하는 저 시선. 한결같은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은 자신이 아닌 과거의 망령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공작은 늘 그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눈이 투영하는 건 아이작이 아니었다. 공작은 단 한 번도 아이작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아들을 아끼는 척하지만 실제로 공작이 챙겨 주고 싶은 사람도, 사과하고 싶은 사람도 아이작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눈에 비치는 건,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건 그와 아무런 역사도 지니지 않은 무가치한 아들이 아닌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코르티잔인 르네였으니까.

“캐슬링 하시겠습니까.”

아이작이 사로잡은 폰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물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공작은 뒤늦게 그의 말을 인식하고서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떨어져 있던 킹과 룩이 자리를 바꿔 체스판의 흐름을 바꿨다. 그 모습이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엿보는 것 같아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캐슬링을 하는 이유는 왕을 보호함과 동시에 룩을 진격시켜 공세에 나서기 위해서다.

한때 아이작은 자신의 삶도 캐슬링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잡히면 게임이 끝나버리는 왕, 곁에서 왕을 지키며 가장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는 강력한 전차. 함께 시너지를 이루어 판의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는 이 특별한 규칙이 공작과 아이작에게도 통용되리라 믿었다.

“이런, 비숍을 생각 못 했구나.”

멍하니 있던 공작이 자신의 말이 잡힌 걸 보고 놀란 듯 말을 흘렸다.

비숍을 움직여 나이트를 잡은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여 다음 수를 권했다. 공작은 여전히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기계적인 손짓으로 말을 움직였다.

다시 시선이 교차했다. 칠흑빛의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건 처음 만난 시절의 아버지였다.

…처음 저택에 왔을 때는 어땠더라.

불온한 마음을 품고 헬만에 왔다. 별 기대 없이 아버지를 마주한 아이작은, 그의 배경을 알게 된 순간 그를 지키는 룩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헬만의 지배자, 공화국을 주도한 혁명 영웅. 있는지도 몰랐던 아버지란 작자는 그런 화려한 이름을 달고 나타나 자신을 뒤흔들었다.

이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이 사람이라면, 의지할 수 있지 않을까.

살아갈 의지를 잃고 휘청대는 어린아이에게 그는 어둠 속의 빛과 같았다. 아이작은 자신이 유프겐슐트의 핏줄이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스스로가 왕의 옆자리를 지키는 충실한 아들이자 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기껏 창부의 자식이라는 껍데기를 탈피하고 나왔건만 곧바로 사생아라는 껍데기가 그를 뒤덮었다.

게다가 공작에게는 이미 모든 말이 갖춰져 있었다. 퀸, 비숍, 룩, 나이트. 아이작은 제 쓸모를 입증할 필요가 없었다. 입증한들 이미 사생아라는 틀에 갇힌 그가 어떤 말로 승격할 수 있을까.

남겨진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저 체스판 위에 수두룩하게 늘어서 있는 폰들. 다른 말들을 대신해 총알받이로 쓰이다 하나씩 스러져갈 뿐인 병졸들.

유프겐슐트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입에 풀칠해가며 사는 다른 친족들과 같이 그 또한 폰으로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터였다.

반쯤 내려와 있던 눈꺼풀이 검은 눈동자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아이작이 확신에 찬 손길로 폰을 움직였다.

딱, 딱. 적막한 허공과 달리 체스판 위로는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공작의 비숍을 잡은 아이작의 폰이 어느새 반대편 끝에 도달했다. 아이작은 끝에 다다른 폰을 옆으로 치운 뒤 테이블 끝에 세워져 있던 말을 들어 폰이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퀴닝하겠습니다.”

왕관을 쓴 퀸이 보잘것없는 말을 대신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거침없이 반격하는 자신의 퀸을 짙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폰이라면.

다른 말들을 대신해 조용히 스러지는 병졸 따위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가능성을 숨기고 끝없이 전진해 이윽고 자신을 개화하는 최강의 말이 될 것이다.

흑색의 퀸 위로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손가락이 내려와 말을 움직였다. 남아 있던 말들의 수를 계산해 보니 앞으로 네 번의 턴이 지나면 체크메이트라는 결론이 나왔다.

자신이 쓰러트려야 할 왕을 지그시 굽어보며 아이작은 공작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은밀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 * *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한 달리아는 식당 앞에 모인 인파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교대제로 조를 짜 식사를 하는 터라 평소의 식당은 늘 한가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들 모여 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까치발을 들고 인파에 합류하려던 찰나였다.

“달리아! 밥 아직 안 먹었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에디나가 환한 얼굴로 달리아의 손을 붙들었다. 좀 비켜봐요, 하녀들을 제치고 식당에 들어선 에디나는 주방 앞에 쌓여 있던 상자들을 가리키며 뻐기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봐. 비텐 백작이 카를라 아가씨 앞으로 선물을 보냈대. 저 상자 안에 든 게 뭔 줄 알아?”

“뭔데?”

“게야! 북해산 털게!”

‘북해산’을 강조하며 에디나가 달리아의 어깨를 콱 쥐었다.

펄쩍 뛰면서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에디나의 기대와 달리 달리아는 커다란 눈을 끔벅거릴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에디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떨궜다.

“반응이 왜 이러지. 너 혹시 털게 안 먹어봤니?”

“난 남부에서 자라서… 진흙게는 튀김으로 먹어보긴 했는데.”

“진흙게? 그게 무슨 게야. 털게는 그런 싸구려와는 완전 달라. 엄청, 진짜 엄청 맛있단 말이야.”

흥분한 에디나가 털게가 어떤 식감인지,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달리아는 에디나의 털게 찬양이 끝나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 선물인데 왜 기숙사 주방에 있어?”

“왜긴 왜야. 게는 빨리 상하잖아. 다 먹지 못할 만큼 너무 많이 줘서 우리한테까지 떨어진 거지. 그런고로 오늘 저녁은 털게 요리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엌 하녀들이 찐 게를 한 아름씩 지고 나와 식탁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털게는 몹시 흉측하게 생겨서 식욕이 생기기는커녕 없던 입맛도 달아나게 했다. 달리아는 에디나의 입맛이 이상한 게 아닐까 의심하며 한발 물러섰다.

질겁하는 달리아와 다르게 주방 앞에서 기다리던 하녀들은 모두 활짝 핀 얼굴로 게를 집어 들었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식당을 가득 채우고, 늘 수다와 웃음소리가 배회하던 식탁 위에는 게살을 바르는 손길만이 분주하게 오고 갔다.

이 괴물같이 생긴 게 그렇게 맛있다고? 헬만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하나?

눈썹을 찡그린 채 게를 노려보던 달리아가 의심을 풀게 된 건, 식탁 끝에 앉아 있던 델마가 웃는 얼굴로 포크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무표정하거나, 아니면 찡그리거나. 희로애락 중 노여움과 슬픔 두 감정만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게살을 입에 넣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늘 그녀 주변을 맴돌던 기숙사 사감 같은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20대의 젊은 아가씨만이 내보일 수 있는 포근한 공기가 델마를 휘감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맛있나? 델마 씨가 저렇게 웃을 만큼?

달리아는 멍하니 델마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에디나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에, 에디나. 에디나!”

“왜? 그러지 말고 너도 빨리 뜯어.”

“저기 봐. 델마 씨가 저기서 웃고… 읍!”

난데없이 말랑말랑한 게살이 입 안 가득 밀려 들어왔다.

엣퉤퉤, 반사적으로 입 안에 든 것을 내뱉으려던 달리아는 혀끝에 스며드는 섬세한 단맛을 느끼고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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